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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17일

✿ 2005년 10월 17일
서울 마포대교, 왕복 6차로에서 10차로로 확장 개통

왕복 6차로에서 10차로로
확장된 마포대교의 북단.

여의도에서 이 다리를 타고 온 차량이 강변북로
일산 및 구리 방면으로 갈 수 있는 진출 램프들도 만들어졌다.

서울 마포와 여의도를 잇는 마포대교가 17일 왕복 6차로에서 10차로로 확장 개통됐다.

서울시 건설안전본부는 16일 “1996년 말 마포대교 확장공사를 시작해 2000년 7월 하류쪽 교량을 우선
개통해 지금까지 사용했으며, 17일에는 상류쪽
교량과 북단 진출로 2곳을 추가로 개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여의도→마포 방향(상류쪽 교량) 도로는
편도 3차로에서 5차로로 확장됐고 강변북로를 이용해 일산이나 구리로 갈 수 있는 진출 램프도 개통됐다.

마포→여의도 방면(하류쪽 교량)은 편도 3차로로
임시 운영되다가 중앙분리용 탄력봉을 제거한 후
차선도색과 포장 등이 끝난 11월 말 5차로로
완전 통행됐다.

개통식은 17일 오후 3시30분에 열렸으며,
일반 차량통행은 오후 6시부터 시작됐다.

시는 이 공사를 통해 하중 32t까지만 견딜 수 있는 마포대교 성능을 개선, 43t까지 견딜 수 있는
1등교로 업그레이드 했다고 밝혔다.

유길상 교량관리부장은 “마포대교 확장 개통으로 여의도·마포 일대 교통소통이 원활해지고 마포로
정체도 크게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2009년 '매듭 페인팅' 화가 신성희씨 별세
▶ 2005년 서울 마포대교, 왕복 6차로에서
10차로로 확장 개통
▶ 2002년 정보통신부, 위치정보서비스 법제화 추진 발표



▶ 1999년 최요삼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 1997년 일본 아사히 신문 공동소유주
우에노준이치 사망
▶ 1991년 한국-에스토니아 국교 수립
▶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 272여명 사망
▶ 1985년 충주 다목적댐 준공
▶ 1985년 장세동 안기부장-박철언 특보, 김일성관저를 방문해 김일성과 비밀회담
▶ 1983년 진의종 제17대 국무총리 취임
▶ 1983년 프랑스 철학자 아롱 사망
▶ 1983년 주민등록증 갱신
▶ 1982년 중국, 중소회담 재개 합의를 발표
▶ 1981년 한국-오만, 항공협정 가조인
▶ 1981년 옥포조선소 준공
▶ 1980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로마 교황을 방문해 448년 만에 화해
▶ 1980년 미국-중국, 민항(民航)개설계획 발표
▶ 1980년 충북선(조치원-봉양) 개통



마더 테레사 수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 캘커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다.
"당신이 오늘 베푼 선행은 내일이면 사람들에게 잊혀질 것이다 그래도 선행을 베풀어라".




▶ 1978년 북한 제3땅굴 발견

북한 땅굴이 판문점 남쪽 4㎞지점의 우리측 비무장지대 안에서 1978년 10월 17일 또 발견됐다. 1974년 고랑포 땅굴이후 세번째로 발견된 이 땅굴은 지하 73m에 높이와 폭이 각각 2m로 중무장병력이 3∼4열로 통과할수 있는 규모. 탐사반은 차단터널을 뚫기전 시추파이프를 박아 땅굴을 탐색했고, 땅굴 내부는 계속 물을 퍼내야할 정도로 물이 괴고 있었다.

1974년 9월 귀순한 김부성씨(39)의 제보로 탐사작업을 펴왔다. 이 땅굴 발견은 북괴가 수도권 회랑을 노렸다는 사실과 한때 중단했던 땅굴파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978년 발견된 제3땅굴은 문산까지의 거리가 12km, 서울까지의 거리는 52km지점에 있다.   폭 2m, 높이 2m, 총길이는 1,635m로 1시간당 3만명(무장군인 1만명)의 병력이동이 가능하다.   북한의 무력남침 기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산 증거이다.




▶ 1978년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 대통령(1955-62) 그론키 사망



▶ 1974년 서울 뉴남산호텔 화재, 19명 사망

1974년 10월 17일 새벽 1시50분쯤 서울 중구 회현동 뉴남산호텔에서 불이 나 19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당했다. 이 불은 4∼5층 내부를 다 태우고 2시50분쯤 잡혔다.

1974년 10월 18일자 조선일보 사건 관련기사

  불은 4층 복도와 객실 4개, 5∼6층 복도를 태우고 7층 복도에까지 번졌었다. 경찰은 4층 503호실앞 복도천장의 전기배선이 합선, 발화되어 플라스틱 파이버의 천장에 인화 4, 5층으로 번졌다고 화인을 발표했다.

  면허없는 호텔 전기주임이 복도천장 배선공사를 할 때 통상보다 가는 전선을 썼기 때문에 발열, 비닐피복을 녹여 합선이나 누전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던 예견된 화재였다. 이 호텔은 지하 1층, 지상 9층으로 건평 1천5백평, 객실이 103개로 투숙객이 90여명과 고고클럽에 50여명이 있다가 탈출소동을 벌였다.  




▶ 1973년 국립극장, 장충동으로 이전해 개관



▶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 opec 석유수출국기구
제1차 오일쇼크 시작!
석유위기 네 글자는 성장일로를 달리던 서구 주도 산업문명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사람들은 천연자원의 정치력을 다시한번 뼛속 깊이 인식했고 탈석유사회를 심각하게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생 아랍국가들의 이슬람 민족주의,
자원 민족주의가 세계사 전면에 강력한 힘으로 등장한 순간이기도 했다. 1973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중동전쟁이 10월 17일부터 석유전쟁으로 진화하여
세계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71년부터 OPEC는 석유이권 수입의 인상을 추진해 오던 중
73년 10월 16일 페르시아만에 여섯 개 석유수출국들은 OPEC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하여 종전의 원유 1배럴 당 3달러2센트에서 3달러65센트로 인상한다고 발표한데이어서 17일 이스라엘이 아랍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발표함으로서 중동전쟁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서방 세계에서는 '에너지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다시 74년 1월 1일을 기해 배럴당 5불11센트에서 11불 65센트로 인상하였다.

석유로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서방세계경제는 석유부족으로 인한 제품생산의 부족과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세계적인 불안과 인플레이션을 만연시켰다, 이 결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진국 및 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왔다.
외교면에서는 서방 세계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친이스라엘에서 친아랍,중동 정책으로 기울게 하였으며, 한 편OPEC은 국제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에 결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자원 민족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석유 위기로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되었다. 1973년의 경우 14.9%의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나 이해 연말에 시작된 제1차 석유위기를 1974년에는 8.0%로 1975년에는 7.1%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다. 제2차 석유위기가 발발한 1979년의 경우 위기가 연 중에 발생하여 경제 성장률은 대호황 이었던 1978년에 11.6% 보다 크게 떨어진 6.4%에 그쳤으며
이는 다시 1980년에 흉작과 겹쳐
사상 유례없는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 1972년 박정희, '10.17 대통령특별선언' 발표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후 7시를 기해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라디오 중계를 통해 4개 비상조치를 선포하는 ‘10.17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維新)’을 선포한 것이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씨(가운데)가 10월 유신 실시와 함께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중지됐으며, 헌법의 일부 효력이 정지되고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나, 정부가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지도계몽반을 편성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 결과, 헌법개정안은 91.9%의 투표율과 91.5%의 높은 찬성률로 통과됐다. 총유권자 84%가 찬성한 수치였다. 이렇게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을 공포하고 이어 12월 15일 2,359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제8대 대통령으로 다시 뽑았고, 박대통령은 12월 27일 제4공화국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0월 유신’의 특징은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중선거구제, 국회의 권한 축소로 요약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철저하게 박정희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 면모를 보였고, 중선거구제는 야권을 견제하려는 수단이었으며, 국회의 권한축소는 국정감사 제도의 폐지와 국회회기제한, 국회가 발의한 헌법개정안의 처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대통령의 후보 추천으로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동의하는 형식으로 뽑은 것은, 명목은 직능대표제의 도입이었지만 국민의 선거권 박탈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장악하고 이들을 통제하는 지위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연임이나 중임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일인장기집권의 길도 열어 놓았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10월유신을 단행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이 부정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 이에 1973년 유신헌법개정 100만인 서명운동,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1976년 민주구국선언, 1979년 부마사태(釜馬事態) 등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이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시해(弑害)될 때까지 7년간 지속됐다.

어! 이게 누구야?
리틀박정희 전두환따라쟁이!
이 인간은 빠지는 일이없네.




▶ 1970년 페루 중부해안지대에 대지진
(사망 1백여명, 부상 1천여명)



▶ 1969년 3선개혁안 국민투표 실시, 확정

1969년 10월 17일,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치뤄져 65.1%의 찬성률로 확정됐다.

3선개헌을 묻는 국민투표를 마치고 개표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공화당의 상황실에서 의원들이 여유있는 표정으로 한담하고 있다

  1969년 1월,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이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 등을 포함해 헌법개정을 연구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을때, 이미 장기집권의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다.

  개헌할 시기가 아니라며 부인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7월, 찬반은 국민의 자유의사라며 입장을 선회했다. 정부가 야당과 학생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여당의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가운데 50여 개 친여 사회단체가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8월 7일 공화당의원 108명을 비롯해 122명의 의원이 서명한 개헌안이 정식 제출됐고, 곧이어 9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됐다. 야당의원들이 개헌안 통과 저지를 위해서 국회 본회의장에서 취침농성까지 벌였지만, 여당은 9월 14일 새벽 2시 반, 국회 제3별관으로 이동 후 참석한 공화당의원 등 122명 전원의 찬성으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밖에는 기동경찰 1,200여 명이 통행을 차단하고 있었다 .

  마침내 10월 17일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며, 국민은 "안정과 혼란"이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안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후 1972년 유신헌법 개정을 통해 영구집권을 시도했으나 10.26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 1967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망
일생에 세번이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1967년 10월 17일, 파란 많은 61년의 생을 마쳤다.


‘만주국’ 황제 정장 차림의 푸이(溥儀). 동경재판에서 그는 일제의 꼭두각시였다고 주장했다

  1908년 두 살의 나이로 황제자리에 올라 신해혁명으로 재위 4년 만인 1912년 황제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개인의 비극으로만 끝난 일이 아니었다. 286년간 지켜온 사직(社稷)과 2000년 이상을 유지해온 황제 지배체제도 함께 무너져내린 천지개벽이었다. 1917년에 한 군벌의 쿠데타로 잠시 황제자리를 되찾았으나 ‘12일 천하’일 뿐이었다.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에 ‘청조 부흥’의 환상에 젖어 있는 푸이야말로 최고의 홍보상품이었다. 1924년에 일본 조계를 찾아온 푸이에게 일본은 지극정성을 다했다.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황제 자리를 선물하고 두 번이나 일본을 방문케 해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마련함으로써 행여라도 그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각별히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은 그에게도 파멸이었다.

  소련군에 체포돼 5년간, 다시 중국 공산당으로 넘겨져 9년간, 이렇게 총 14년간을 구금생활을 하다 1959년에야 풀려나 식물원 정원사로 비로소 ‘땀’이 무엇인지를 처음 경험했다. 시신은 1995년에야 황릉으로 옮겨졌다. 죽어 28년 만에 다시 황제로 복귀한 셈이다.





▶ 1966년 페루 중부해안지대에 대지진
(사망 1백여명, 부상 1천여명)
▶ 1961년 알바니아, 중국과의 적대관계 공식화
▶ 1961년 소련공산당 22차 대회
흐루시초프의 반당파 숙청 개시
▶ 1960년 유엔군, 콩고의 카탕가주 전면점령 개시
▶ 195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지진. 300여명 사망
▶ 1958년 유엔신탁통치이사회서 토고랜드 독립 부여
▶ 1957년 유엔특별정치위원회, 51대 9로 한국의 유엔가입자격 재확인
▶ 1956년 영국 콜다홀 원자력발전소 개소(본격적인 원자력발전소 시대 개막)
▶ 1950년 터어키군, 부산항 도착
▶ 1945년 경성제대를 경성대학으로 개칭
▶ 1935년 조선일보 월간지 `조광(朝光)` 창간
▶ 1933년 아인슈타인 미국으로 망명
▶ 1919년 미국 전기방송회사 `RCA" 설립
▶ 1918년 헝가리 독립 선언



▶ 1917년 한강 인도교(구교) 준공


1950년 6.25사변 발발 3일후인 6월28일
새벽2시30분,한강 인도교 폭파!
무고한 피난민 수백명 수몰.(추정 800명)



(아래부분 사진은 왜관철교입니다.)

여러분이 이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책임자'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난민은 인산인해! 교량에 꽉 들어차있고
북한공산군 탱크(2대 선발대)는
교량을 목표로 전진해오고...
급히 후퇴하는 국군은 정확한 전선의 정보는
없고(사실 이때 북한공산군은
미아리고개쪽에 진지를 펼치고있어, 5~8시간의폭파시간 여유가 있었다고
사후조사에서 밝혀졌다.)
총참모장 채병덕의 성급한 폭파명령으로
6월28일 새벽2시30분,고뇌와 번민 끝에
폭파를 실행했다.
결국, 공병감 최창식대령은 8월28일
'적정 비행죄'란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최대령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판결'을 받아 사후복권 됬다.

6.25사변 당시 폭파명령으로 희생당한 국민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 1907년 함부르크에 금융대공황 발생
▶ 1905년 일본, 요동에 관군총독부 설치
▶ 190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즉위
▶ 1895년 미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도리스 험프리 출생
▶ 1893년 프랑스의 제3공화정 2대 대통령
마크 마옹 사망
▶ 1883년 서머힐 학교를 창립한
영국의 교육자 A.S.닐 출생



▶ 1849년 폴란드 작곡자 쇼팽 사망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1849년 10월 17일 파리에서 39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프레데리크 쇼팽

  쇼팽은 1810년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에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 무렵, 쇼팽의 병세는 악화됐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이 많이 작곡됐다.

  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이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 1833년 호흡기에서
가스 교환원리 발견한 폴버트 출생
▶ 1813년 독일의 극작가 뷔히너 출생



▶ 1777년 오늘, 미국 독립전쟁 승리!
세계사적 슈퍼 베이비 태어나다.

https://youtu.be/ojpJPsTn7rM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블로거 안젤라,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