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20일

✿2000년 10월 20일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서울서 개막

제3차 ASEM 개막식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의 모습.

‘새 천년의 번영과 안보협력’을 주제로 한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의장국인
우리나라를 비롯해 26개국의 정상 또는 정상급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10월 20일 서울
COEX 컨벤션센터에서 개막됐다.

이틀 일정으로 열린 이번 회의에서 정상
들은 두 대륙간 정치-안보-경제-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강화방안을 모색했다.

회의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서울선언’을 비롯,
‘2000 아시아-유럽 협력체제(AECF 2000)’ ‘의장
성명서’ 등 3개 문건을 채택했다.

아셈 기간동안 사회, 시민단체, 학생과 ‘아셈
민간포럼’ 참가자 1만5000여명은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번 회의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적
제어장치’를 한층 더 강화했다는 점과 유라시아
초고속 통신망 사업을 비롯해 모두 23개 사업을
채택하는 등 구체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한편,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내실이 미흡해 각국 정상들간의 ‘고급 사료장’
이라는 지적과 북한의 인권과 대량 살상무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번 회의
가 한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다자간 정상
회의였고, 최대 규모의 외교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역량이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 2015년이근화선
‘북청사자놀음’ 명예보유자 별세



2011년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 피살

                 카다피 [Qaddafi, Muammar al-, 1942.6.7~2011.10.20]

  "카다피, 머리에 총 맞아서 사망"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교전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포된 뒤 숨졌다.
리비아 과도 정부인 NTC 대변인 압델 하페즈 고가는 20일(현지 시각) 트리폴리에서 “카다피가 혁명군에 체포된 후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가는 “이는 역사적 순간이요, 폭정과 독재의 종말”이라며 “카다피는 파멸했다”고 말했다. 그의 시신은 인근 미스라타로 옮겨졌다.

  앞서 과도 정부는 카다피군과 수 주 동안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이날 카다피의 거점인 시르테를 장악했다고 발표했었다.

  과도 정부의 카다피 사망 공식 확인 2시간여 전부터 알자지라·CNN 등 주요 외신들은 현지 고위 관리 등을 인용, "카다피가 교전 중 중상을 입고 붙잡혔으며, 간신히 살아있다"는 등의 소식을 숨 가쁘게 전달했었다.

  알자지라는 “카다피가 생포됐으며,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쳐 구급차로 후송 중”이라는 NTC 관계자의 발언을 먼저 전했었다. 이어 카다피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곧이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카다피의 시신을 촬영한 사진도 유포됐으며, NTC 관계자는 이 사진이 카다피임을 확인했다. 잠시 뒤에는 미스라타로 옮겨진 그의 시신을 촬영한 동영상도 공개됐다.

  직접 카다피를 잡았다고 주장하는 NTC 측의 한 군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중상을 입은 카다피가 붙잡히는 순간 "쏘지 마!"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카다피는 카키색 복장에 머리에 터번을 두른 모습으로 구덩이에 혼자 숨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과도 정부는 카다피의 5남 무타심과 아부 바크르 유니스 전 국방장관도 교전 과정에서 숨졌다고 덧붙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카다피 사망 보도에 대해 "상황을 체크하고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 역시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카다피는 42년간의 집권 끝에 지난 8월 권좌에서 축출됐으며,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카다피를 살인·성폭행 등 각종 반(反)인륜범죄 혐의로 수배한 상태다.

  BBC는 “카다피 사망이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보도를 접한 시민들이 자동차와 배의 경적을 울리고 총기를 허공에 발포하면서 카다피의 사망을 축하하고 있다”고 전했다.



▶ 2010년 '3무(無)경영' 실천한 '뚝심의 경영인'
설원봉 대한제당 회장 별세
▶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취임
▶ 2000년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서울서 개막
▶ 1999년 압두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당선
▶ 1999년 정부, 초저가 `인터넷PC 보급정책` 마련



▶ 1998년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발표

일본 대중문화가 지난 10월 20일 전격 개방됐다. 정부는 이날 영화, 비디오, 출판만화 부분은 즉시 개방하고 애니메이션, 음반, 게임 공연 등은 한일문화교류 공동협의회 논의를 통해 개방하겠다는 일본대중문화 단계적개방 방침을 발표했다.
영화는 국제영화제수상 작품, 비디오는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로 한정했다.
이에 따라 이달 초 '하나비', '가케 무사' 등 일본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됐다.
1998년 10월 광복 53년만에 일본 대중문화에 빗장이 풀리더니 1999년 6월 27일 문화관광부가 3차 개방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대중문화는 마침내 우리의 안방에까지 입성할 발판을 마련했다.
사실 개방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울만큼 일본대중문화는 이미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스며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히 방송이 개방됨으로써 안방까지 일본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래전에 상륙해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소설은 이미 수만의 독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학술, 패션,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본풍은 이미 우리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대중문화개방 따라 앞으로 밀려들 일본의 문화산업 앞에 한국 대중문화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 1990년 한중무역사무소 개설 합의


1989년 오늘,
대한민국 첫 대리 임신모 등장.
서울제일병원 의료진, 불임부부의 수정란을 동서 올케자매에게 이식.




▶ 1986년 카드식 공중전화기 첫 설치
▶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자본주의경제개혁안 채택
▶ 1983년 비숍 그레나다 수상 피살
▶ 1982년 중국, 국경무역사무소 개설 보도
▶ 1982년 환경청, 진해 부산 광양만 등 4개 해역에 `연안오염특별관리해역` 선포
▶ 1982년 에콰도르정부,
에콰도르전역에 비상사태 선포. 헌법기능 정지
▶ 1980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기공
https://youtu.be/Qaj-3Dlbs3U


▶ 1980년 북한,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발표
▶ 1979년 마산 창원에 위수령 선포
▶ 1973년 문화의날 선포


1973년 오늘,
호주의 랜드마크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완공되었다.

호주의 시드니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로 오페라하우스. 푸른 바다 위로 우뚝 솟아있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1973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커다란 조가비를 엮어놓은 듯한 형상으로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시드니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건물. 이 건물이 실은 주먹구구식으로 지어졌다고 하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시드니항에 건설할 종합공연장 설계 공모가 있을 때 출품된 작품 수는 223점. 그 중에서 당선된 설계도는 덴마크의 건축가 '이외른 우트존'이 맨손으로 그린 스케치였다. 기상천외한 모습이 마치 범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공학적인 요소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너무 비현실적인 설계로 건축 자체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이다. 1973년 완공 때야 건축·공학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건축물'로 칭송받았지만, 개관은 원래 예정보다 9년이나 늦었다. 건설비는 계획했던 것의 14배나 들어갔다.

  건물의 모양을 지키려 숱한 공학적 결정 과정이 임시변통으로 이루어졌다. 건물의 유지 관리를 어떻게 할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결과는 10년간 7천500만 달러를 투입한 복원공사였다. 최고의 건축물 뒤에 숨겨진 얘기가 참 어이가 없다




▶ 1968년 주간조선 창간
▶ 1964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33 재임)
후버 사망



▶ 1963년 거물 간첩 황태성 검거



▶ 1962년 중국-인도, 국경서 전면 충돌

중국과 인도의 국경협정에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제안이 있었으나 중국은 영국이 설정한 맥마흔 라인을 불평등조약으로 간주, 인정하지 않고 인도는 자국측에 유리한 현상유지를 주장했다. 1954년 인도, 티베트의 중국 영토 인정으로 양국 관계 원만.
50년대 말 이후 악사이친 지역에 대해 중국과 인도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59년 티베트 라싸에서 발생한 폭동에 인도가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달라이 라마의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양국관계가 급격히 악화. 중국의 대약진운동 (58, 60)실패,
소련지원단의 철수 등 중국의 국력이 약화된 상황을 이용 인도가 동지역에 수십개의 초소를 설치하자 62년 10월 중국은 군사적으로 대응. 중국은 1개월 전쟁 후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하고 퇴각.
인도측 사망, 실종자 3,000명 포로 4천명 중국측 사상자 소수, 포로 없음.
이후 75년에도 국경 충돌 탈냉전기 양측은 국경지역에 안정화에 합의하고 기본적으로 현상유지 추구.
90년대 양측은 국경신뢰구축 노력을 지속. 96년 11월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의
인도 방문시 국경협정체결 및 후속조치로 국경문제가 안정화 되었다.
98년 5월 인도의 핵실험 등 양국관계 긴장 및 화해 국면이 반복 지속되고 있으나 적어도 국경문제로 인한 충돌의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된다.




▶ 1958년 태국, 무혈쿠데타 발생.
사리트 원수 정권장악
▶ 1951년 동경서 제1차 한일회담 개최
▶ 1947년 브라질, 대소련 단교
▶ 1946년 영국, 버마의 독립허용을 설명
▶ 1944년 레이테섬 상륙작전
▶ 1943년 일제, 우리나라에 학병지원제 실시




▶  1940년  독립운동가 이범윤 사망    
이범윤은 간도의 대한국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 간도관리사가 되었다. 토문강에 거주하는 대한제국 한인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1만 3,000여 명을 편적시켰습니다. 특히 사포대를 조직해 동포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자치활동을 지도하였습니다.
1910년 성명회를 조직, 유인석등과 을사조약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민회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 되었습니다. 1912년 이후에도 국내진격작전을 벌여 회령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학신의 최우익등과 함께 간도 일대의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의군부를 조직하였으며 5개 대대의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그 후 서일과 김좌진이 지휘하는북로군정서와 제휴, 합동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나,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전개되자 군정서 및 다른 독립군부대들과 함께 헤이룽강를 건너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습니다. 1925년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참의원 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노년에 국내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여생을 마쳤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1935년]홍군(紅軍)의 대장정 1년 만에 끝나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오른쪽)


장제스가 2년간에 걸친 4차례의 포위섬멸작전으로 1931년에 마오쩌둥이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 세운 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뿌리 뽑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33년 10월, 장제스는 70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펼치며 5번째 공격에 나섰다. 결국 홍군은 수적으로 월등한 장제스군에 대패하고 생필품과 의약품까지 동나자 탈출을 결심한다.
1934년 10월 15일, 부녀자·병자를 포함한 2만8000명을 남겨둔 채 홍군 9만명의 대탈주극이 시작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대장정(大長征)’이었다. 홍군은 집요한 장제스군의 추격과 지역 군벌의 방해를 피해 24개의 강을 건넜고 18개의 산맥을 넘었으며 11개의 성을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가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다. 이동 중 무려 2억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며 중국 대륙을 붉게 물들여 나갔다. 출발 당시 불안했던 마오쩌둥의 위치도 어느덧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본격적인 마오(毛) 시대를 열었다. 밤낮으로 1만2500km를 행군하기를 1년여.
1935년 10월 20일, 마침내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에 도착함으로써 대장정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병력은 출발 때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있었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승리였다.



1920년 오늘,10월20일
빛나는 청산리전투 대승!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전과였던 #청산리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본국으로부터 망명에 오는 청년들이 격증했고, 노령 자유시로부터 무기구입이 용이하게 되어 만주에 한국독립군부대들은
대부대 편성이 가능케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만주에서의 한국독립군 육성을 보조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중국 당국에 항의를 제출했고 중국 당국은 독립군 부대들에게 되도록 일본군의 눈에 띄지않는 산속으로 들어가 달라고 권고했다.
당시 북로군정서가 주둔하고 있던 북만주 길림성에 와청현 서대파구에서는 도안성 당국으로부터 맹부덕이란 사람이와서 그 뜻을 전함으로 이해9월 20일 북로군정서는 장백산(백두산)에 들어가 더욱 실력을 기르기로하고 여행단을 편성, 이범석을 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본군은 북로군정서에 대한 협공작전을 개시하여 함북 나남으로부터 제21사단이 북상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전했던 제19 사단이 장고봉을 넘어 남하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북로군정서는 할 수 없이 장백산으로 이동할 계획을 포기하고 10월 16일 전투단을 조직, 총사령에 #김좌진, 참모장에 나중소, 연성대장에 이범석을 임명했다. 18일 독립군은 화룡현 청산리 배군평 산림 속에서 유리한 지형을 찾아 잠복하고 부대를 2개 중대로 분리하여 1개 중대를 김좌진장군이 지휘하고, 제2중대를 이범석장군이 지휘에 하게하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

19일 일본군은 3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하더니 다음 날 기병 1개부대가 마침내 백운평 산림 속으로 들어섰다. 이 때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500여명의 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이것은 적군의 1개 전위대에 불과할
뿐, 본대가 아직 남아있으므로 백운평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이날 밤2시40분까지 16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에 닿음으로서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곳에서 김좌진 총사령과 이범석대장은 다시 작전 계획을 세워 천수평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천수평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락인데 일본군의 기병대 12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20일 날이 밝자 독립군은 전격적공격을 개시하니 적군은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져 곳곳에 적의 군마와 시체가 언덕처럼 쌓이고 얼음과 서리로 빛을 발하던 천수평들판을 붉은 피로 물들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도망 간 적은 불과 네 명 뿐이며 시마다중대장 이하 전원이
섬멸된데 비해 독립군의 전사자는 두명 뿐이었다. 또한이 싸움에서 독립군은
시마다중대장이 소지했던 문서를 통해 일본군의 사단사령부가 어량촌에 있음을 확인하고 즉각 부대를 출동, 어량촌전방의
마록구고지를 먼저 점령했다. 적군은
전 사단의 병력으로 쳐들어왔다.
실로 1천대 1만의 대혈전이었다. 적의 포탄이 김좌진 총사령의 군모를 날려 버렸으며
적의 총탄은 이범석대장의 군도를 두동강으로 잘라버렸다. 독립군의 기관총대장 최인걸은 기관총수가 전부 부상을 당하자 자신의 몸을 총열에 묶어놓고 기관총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여 쏘아 대었으며 부족한 병력으로 가장 위험한 전방에 길목을 방어하느라고 후면의 독립군 1소대는 40명 전원 전사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승리했다.
22일 적군은 가노오 연대장 이하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틀 밤, 이틀 낮을 싸운 청산리 혈전에서 적의 사상자는 3,300여명에 달했으며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세계 전사상 희유한 결과로서
망국 10여년의 원한에 불타는 한국독립군 전사들이 이역 만주에서 얻은 최대의 승리였다.



▶ 1907년 베를린에서 제2회 독일노동자회의 열림
▶ 1904년 볼리비아와 칠레가 강화조약에 조인
▶ 1903년 미국-캐나다, 알래스카 국경확정
▶ 1891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출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 1859년 미국 철학자 존 듀이 출생
▶ 1854년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랭보 출생
▶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6세 사망
▶ 1437년 경원성(慶源城, 둘레 1,755척)과
경흥성(慶興城, 2,186척) 완공
▶ 1361년 고려, 홍건적 10만군
삭주(朔州)·이성(泥城)에 침입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로거 안젤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