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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23일

✿2009년 10월 23일
중국, 차스닥(CHASDAQ) 개장
중국판 나스닥 증권시장인 ‘차이넥스트
(ChiNext·차스닥)’ 전광판이 상장사의 주가를 표시하고 있다.


2009년 10월 23일 중국판 나스닥(미
국 장외주식시장)으로 기술 벤처기업의 상장 무대가 될 ‘차스닥(중국명 創業板)’
이 광둥(廣東)성 선전에서 개장식을 갖고 공식출범했다.

차스닥은 26일 상장 심사를 통과한 28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상장 공고를 한 뒤, 30일부터 본격적인 거래가 시작됐다.

공식 개장일인 30일은 모든 종목이 75% 이상 급등하며 차스닥에 대한 기대를 보여줬다.

거래 시작과 함께 ‘대박’을 꿈꾸는 투자자들의 매수주문이 폭주하면서
한때 모든 종목이 100% 이상 상승했다.

업종이나 종목 구분 없는 투자 열기로 거래중단 사태(주가 20% 이상 급등락할 경우 30분간 거래중단, 이후 50% 이상 급등락 때 다시 30분 휴장)가 속출했다.

첫날 마감 결과, 진야과학기술이 209% 폭등해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고, 안커, 탄루저, 화이 등 10개 종목이 100% 넘게 올랐다.



▶ 2009년   중국, 차스닥 개장
▶ 2009년   정명환 전(前)
                      향군 사무총장 별세
▶ 2009년   정명세 전 과학기술연합
                      대학원대학교 총장 별세
▶ 2009년   삼성전자, 이동통신 4세대
                       'LTE 단말기' 세계
                      첫 공급 계약 성사
▶ 2004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강진 발생, 33명 사망
                       2100여명 부상

 
▶ 2003년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
                     부인 송미령 여사 사망

쑹메이링[宋美齡, 1897.3.5~2003.10.23]

  '권력을 사랑한 여인' 쑹메이링

  쑹아이링(宋靄齡) 칭링(慶齡) 메이링(美齡).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3자매로 모두 독특한 개성을 타고났고 개성만큼이나 인생행로도 다양했다. 엄청난 재력의 은행가와 결론한 아이링은 '돈을 사랑한 여인',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 결혼한 칭링은 '중국을 사랑한 여인', 장제스(將介石) 총통의 부인이 된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린다.
그 권력을 사랑한 메이링이 2003년 오늘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향년 106세. 그녀는 총통의 부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동료로서 중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역량도 대단해 1936년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감금한 시안(西安)사변 때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단독 면담해 장제스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미국 웨슬리 대학을 나온 수재로, 중국과 서방의 문화 모두에 익숙해 양국 모두에서 인기가 있었다. 미국 방문 중 3만명의 인파를 모았으며 2차례나 타임지 표지 인물이 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두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장제스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그녀도 책임감 있게 장제스를 대했다고 한다.



▶ 2002년   체첸반군,
                     모스크바극장서 인질극

러시아 모스크바 오페라극장 인질극 사건 발생!
모스크바 오페라극장 인질극은 당시
체첸독립을 주장하는 4인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자행 되었으며 공연을 관람하던
850명의 시민을 인질로 잡았다.
이를 러시아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질 133명포함
170명이 사망하고 700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말았다.
10월 26일 체첸 반군 테러리스트 4명 전원 사살됨으로써 종결되었다.




▶ 2000년   노사정위원회
                     '주40시간 근무' 합의
▶ 2000년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북한 방문
▶ 1998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평화 교환협정'에 서명




▶ 1996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피살





▶ 1991년   캄보디아 내전종식 평화협정



▶ 1990년   남북통일 축구대회
                     서울서 2차 경기




▶ 1989년   헝가리, 40년간의 공산통치
                     종식하고 공화제 선언



▶ 1983년   레바논 주둔 미국,
                     프랑스 군사령부 폭파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폭탄테러 발생!
1983년 10월에 레바논 베이루트 주재
미 해병대기지에 대한 회교 시아파의
차량자살폭탄테러로 미국인 241명이 숨졌다. 241명에 미국 해병과 58명의 프랑스군이 이슬람의 폭탄공격으로 사망한 사건이었다.





 
▶ 1983년   제22회 세계양궁대회 여자
                      단체 개인종합 우승




▶ 1982년   영국, 소련 KGB 거물요원.
                      쿠지치킨 (전 테헤란주재
                      부영사)의 망명을 발표
▶ 1982년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
                     북한 방문
▶ 1980년   코시킨 소련수상 사임. 후임
                     에 니콜라이 티호노프 임명
▶ 1978년   일본-중국,
                     평화우호조약 비준서 교환
 
▶ 1973년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사망
▶ 1973년   1차 석유파동. 메이저들의.
                     30% 유가인상으로
                     세계경제 큰 혼란
▶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
▶ 1963년   여주 나룻배 참사, 49명 익사



▶ 1958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파스테르나크(Pasternak, Boris Leonidovich, 1890~1960)는 18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톨스토이의 《부활(復活)》의 삽화 등으로 유명한 화가를 아버지로,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유대계 예술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A.N.스크랴빈에게 사사하며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09년 모스크바대학교의 역사·철학부에 들어갔고, 1912년 독일의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유학하여 신칸트파 철학을 공부하였다. 1914년 처녀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를 출간한 후, N.N.아세예프 등과 함께 미래파계의 시 그룹 ‘원심력(遠心力)’에 참가하였다. 초기의 시작에는 A.A.블로크와 R.M.릴케의 영향이 강하였으며, 또 동시대의 시인 V.V.마야코프스키의 존재가 항상 의식되었다. 1917년 여름에 쓴 시집 《나의 여동생―인생》(1992년 발표)은 자연과 현실세계와의 교감(交感)·융합(融合) 속에서 시의 본질을 찾으려 하였다. 상징주의(象徵主義)를 극복한 ‘연상(聯想)’의 방법으로 그 본질을 표현하려 한 그의 독특한 시작법(詩作法)이 명확하게 나타난 작품이며, 난해(難解)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서사시(敍事詩)의 장르로 기울었고, 《1905년》(1926) 《슈미트 대위》(1927) 등에서는 혁명과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시인의 사색(思索)을 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운문체(韻文體) 소설인 《스펙토르스키》(1931)에 계승되었는데, 거기에는 후년에 발표한 《의사 지바고 Doktor Zhivago》에 나오는 주인공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서정시에서는 1932년의 《제2의 탄생》에서 1943년의 《1번 열차에서》로 고전적인 명석함이 더해가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그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격화되어,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그루지야 시인집》(1946) 《파우스트》(1953) 《셰익스피어 희곡집》(1953) 등은 명역(名譯)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이 죽은 후, 그는 창작의욕을 되찾아 1957년 유일한 장편 《의사 지바고》를 완성하였으나 소련 내에서의 발표가 허락되지 않자 이탈리아에서 출판하였다. 이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놓고, 또다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러시아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처분되었다. 그는 당시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러시아를 떠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부디 엄한 조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탄원하여 국외추방을 면하고, 노벨문학상을 거부하였다. 1년 반 후 모스크바 교외 작가촌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 외에 시집 《마음이 밝아질 때》(1959), 자서전 《안전통행증》(1931) 《사람과 상황, 자전적 에세이》(1958) 등이 있다.


노벨상을 거부한 수상자들

1938 - 쿤 (Richard Kuhn, 1900-1967), 화학상, 독일
1939 - 부테난트 (Adolf Fridrich Johann butenandt, 1903-1995), 화학상, 독일
1939 - 도마크 (Gerhard Johannes Paul Domagk, 1895-1964), 생리학 의학상, 독일
1958 -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cich Pasternak, 1890~1960), 문학상, 소련
1964 -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1980), 문학상, 프랑스
1973 - 레 둑 토 (Le Duc Tho, 1911~1990), 평화상, 베트남

  지금까지 노벨상을 가장 많이 거부한 나라는 어디일까? 1938년 쿤(Richard Kuhn, 1900∼1967)이 화학상, 1939년 부테난트(Adolf Fridrich Johann Butenandt, 1903∼1995)가 화학상, 1939년 도마크(Gerhard Johannes Paul Domagk, 1895∼1964)가 생리의학상을 거부했는데 이 세 사람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이던 언론가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 1889∼1938)가 1935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결과를 국제 사회에서 자신과 나치 독일을 탐탁치않게 여긴 증거로 생각해 그 후로 독일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은 세계인들이 자신과 나치독일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도마크의 경우엔 체포되어 수상을 거부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고, 그로부터 8년 후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에야 비로소 상장과 메달을 받아갈 수 있었다. 1958년 소련의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cich Pasternak, 1890∼1960)가 문학상을 이와 비슷한 이유로 거부했고, 1964년엔 프랑스의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가장 최근인 1973년 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 1911∼1990)가 평화상을 거부했다. 이중 레둑토가 가장 명확한 수상 거부 이유를 밝혔는데 그가 수상을 거부한 것은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 공동수상자로 선정되었던 헨리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납죽 받아간 것은 두고두고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 1958년   소련, 애스완댐
                      건설에 1억달러 원조 발표
▶ 1956년   국제원자력기구 설립



▶ 1956년   헝가리 反蘇 봉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반소련, 반정부 시위! 1956년 10월 23일부터 13일간에 걸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발생한 민족자립과 자유화를 위한 대규모 반소운동.
53년, 스탈린의죽음 이후 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 일기 시작하자 동유럽 제국에서는 비스탈린화 운동의 파도가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6월의 포츠담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10월 소련의 압력을 물리치고 당시의 개혁파 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인 고무카가
당 제1서기의 선출되었다. 당시 헝가리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스탈린이라 불린 라코시는 개혁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10월 23일에 작가, 학생, 시민의 시위가 일어나 치안 당국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게레와 교체된 라코시에 의하여 부분적인 민주화 조치가 강구되고 있었지만 국민은 불만을 품고 '너지'의 정권 복귀를 요구하였다. 정부는 개혁파의 너지를 수상으로 지명함과 동시에,
소련의 군사개입을 요청하였다.
군사개입은 국민을 더욱 흥분 시켰으며
반소기운이 고조되자, 정부는 공산당의 독재 제도를 폐지하고 복수정당에 의한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의 탈퇴와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대규모의 소련군이 투입되었고,
12월 4일 제2차 대규모 군사개입을 단행하여 헝가리 전 국토를 장악하였다.
이어 라코시파와 너지파의 두파을 추방한 뒤 중도파 '카다르'에게 정권을 수립시켰다. 카다르 노동혁명정부는 소련에서 수립되었다. 수상 너지는 소련군의 납치되어 처형되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기수였던 너지는 헝가리의 애국자였다.
헝가리의거의 실패로 수 천명이 희생되었고 무력 저항은 12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발족
▶ 1954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독일점령 종식 위한 파리
                     협정 조인
 
▶ 1951년   동독경찰, 서베를린서 철수



▶ 1946년   유엔총회 뉴욕서 개막

유엔표성냥을 보시고 추억속으로



▶ 1945년   조선신문기자협회 결성
▶ 1945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 1942년 오늘,영국 몽고메리 장군,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의 명장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을 제압하다.




▶ 1936년   한강 인도교 두 번째 개통식
 
▶ 1926년   레온 트로츠키,
                      소련 정치국에서 추방
▶ 1923년   김약수 등 사회주의자160
                      여명 서울에서 건설사조직
▶ 1919년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
                      대한정의군정부(大韓正義.
                      軍.政府)로 개칭
▶ 1893년   창랑 장택상 출생





▶ 1881년 오늘,
스페인 파블로 피카소 태어남.
스페인의 시골청년 피카소는 19세기 사실주의적 내지는 인상주의적 평면회화를 해체시키고, 20세기 새로운 입체파회화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이전까지 금기시되던 성의 환희와 광기를 그의 회화에 주제로 삼아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인 성의 신비를 표현하기도했다. 당시 전설적인물이 된 피카소는 개인을 떠나 국가적차원에서 거대하게 상징화 되었고, 모든 예술에서 새롭게 변형되어 '낯설게 보이는 것은
다 피카소적'이다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렇게 피카소는 위대한 화가 일뿐 아니라 20세기 최대의 조각가 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고전회화를 재정리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대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하나씩 재해석해 나갔다. 이전에 대가들을 모방하려는 무의식은 19세기나 20세기에 모든 예술가들의 머릿속에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마네 나 세잔느 같은 화가들, 스트라빈스키같은 음악가들, 그리고 장콕도 와 같은 시인들도 다 그랬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풍자하고 모방하는 궁극적 목표는 어느 장르건 마찬가지 고전적 규율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모방하는 것이고 그 결과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피카소는 이 어려운 난제를 풀어나갔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들라크루아  14점,
이나 벨라스케스  44점 그리고 마네의  27점 등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해체하고 재조립 함으로서 과거와 대화를 나누었고 진정한 피카소식의 '큐비즘'의 핵심을 정리해 나갔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미술인 되었다. 1956년 (75세) 독일 뮌헨에서 피카소 회고전을 시작으로 1962년 (81세) 미국 뉴욕에서 피카소 80세 기념 회고전.
1964년 (83세) 일본 동경에서 피카소전. 1970년 (89세) 스페인 아비뇽 법황궁 고딕식 성당에서 피카소전.
1971년(90세)프랑스 파리에서 '피카소탄생 90년' 대 회고전 등.
그는 미술사에서 드물게 보는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죽음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그의 자화상에 솔직하게 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렘브란트 당신은 죽음을 냉소했지만 난 죽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싶소."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별장에서 사망.
눈 내리는 4월 10일 생 빅투아르 산기슭 보방 오그리 라는 산비탈에 묻혔다.
그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진실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유언처럼...

피카소는 현대사회에서 아인슈타인, 다윈, 프로이드, 칼 마르크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되었다.
평면회화 해체와 신 미술의 창조와 지각변동을 준 엄청난 혁명이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 바르톡, 문학에서 베케트, 카프카의 업적을 넘어서는 미술에서의 업적을 남겼다.




▶ 1868년   최초의 영국 자동차를
                     만든 란체스터 출생
▶930년   일본 제60대 천황 다이고 사망


▶ B.C 42년 오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연합군 블루투스 군대 격퇴!
블루투스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에서 자살. 블루투스는 B.C 44년 3월
로마의 영웅 딕타토르(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모자들 지도자였다.
'부르투스! 너 마져....'
(암살당하던 카이사르의 마지막 절규)



https://youtu.be/l8BVaG36L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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