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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30일


✿ 1999년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인천시 중구 인현동은 한때 10대들의 해방구였다. 제물포고·인천여고 등 학교가 밀집해서, 분식집·당구장·노래방 등 학생을 상대로 한 가게가 300여 곳이나 번창했다. 인천지역 중고생들 사이에서 ‘동인천’으로 통하는 집결지였다.

1999년 10월 30일 저녁 7시경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4층상가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발생원인은 내부수리 중이던 지하노래방에서 발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화재로 인천시내
10여개 고등학교에서 가을축제가 있었고 가을축제가 끝난후에 뒷풀이 하던 많은 청소년들이 있지도 않은 비상구와 비상계단을 찾아 갈팡질팡 헤매다 졸지에 죽거나 부상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이 화재로 건물 2층 라이브생맥주집과
3층 그린당구장에 있던 10대 청소년 등 손님 52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겼다.
또 71명이 연기에 질식하거나 화상을 입고 인천 길병원 ,인천의료원, 인하대병원 등 인천지역 여덟개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불은 출동한 소방차 15대와
구급차19대 소방관180명과 경찰관160명이 진화에 참여하여 35분만에 진화되었지만 생맥주집 내부는 탁자와 의자가 빽빽히 가로막고있어 통로 공간이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만큼 비좁게 만들어졌다.
게다가 구조물 등이 인화성 유독성물질
들이어서 연기가 순식간에 확산되었고
매캐한 유독가스로 인한 질식한 사상자가 상당수였다. 또한 출입구가 하나뿐이어서 일단 출입구가 막히면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창문이 있기는 했으나 구조변경을 할 때 통유리로 바꿔 달았으며 베니어판을 덧붙여 비상시 쓸 수 있었던 탈출구를 막아버려서 손님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좁은 통로로 몰려 그 피해가 더 커졌다.
불이 난 이 건물지하 노래방천정에 설치되었던 '확산소화기'가 화재 당시,
공사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허가없이
모두 제거되어있어 초기진화의 실패하였다. 당시 관리당국의 관리소홀로 인해
평소 화재발생시 대량 인명피해로 이어질 요인들이 있었다. 게다가 호프집주인은
술을 마시던 학생들이 화재로 대피하려하자 돈을 내라며 소리치다가 화재가 난 것을 알자 자신만 아는 비상구를 통해 학생들을 버리고 탈출해 버렸다.
이 호프집은 상시미성년자 손님을 받아오는 불법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자주 신고를 당했으나, 주인과 경찰과의 밀착관계가
추후 조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씨랜드사건'이 일어난지 4개월 만에 또 일어난 동일한 부류의 사건으로 당시 총체적 난국이었던 대한민국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고라고 볼 수 있다.





▶2015년 자전거로 미 대륙 횡단한 유민규씨, 여행 중 모금해
‘기아대책’ 전달
▶2010년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 회장 별세
▶2009년 정부, 아프카니스탄 파병안 발표
▶2009년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타계



▶2005년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유리원판 사진 공개



▶2002년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첫비행 성공, 초음속기 보유 세계 12번째




▶2002년 중국, '양빈 재산몰 . 국외추방' 북에 공식통
▶2001년 초음속 경(輕)공격기 한.미 공동개발
▶2000년 동아건설, 채권단의 자금지원 -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
▶2000년 팔레스타인 독립선포 연기
▶2000년 앙골라 여객기 추락 전원 사망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로 중-고생 등 56명 사망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전자
회장, 평양에서 김정일 면담
▶1997년 유럽 12개국 공동상업위성`아리안5호` 발사
▶1997년 대한민국 . 캄보디아 대사급 수교 합의
▶1992년 프랑스 화가 존 미첼 사망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선소리산 타령`
예능보유자인 정득만씨 별세
▶1991년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서 개막
▶1990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개막



▶1990년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관통

나폴레옹 이래 정치가와 기술자들의 꿈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 해저터널 `채널 터널`이 1990년 10월 30일 맞뚫렸다. 착공 3년 만이었다. 도버 바로 옆 포크스톤에서 출발한 영국 토목 기술자들과 칼레를 떠나 바다 밑을 파 온 프랑스 기술자는 양국 국기를 흔들며 반갑게 만났다.
실제 승객이 오가는 철도 개통은 4년 후 (1994년 5월 6일) 이뤄졌지만, 유럽 대륙과 48㎞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나왔던 유럽의 변방 섬 나라 영국이 대륙에 문자 그대로 `연륙`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꿈 꾼지 2백년. 스스로 20세기의 나폴레옹을 자임했던 미테랑 치하에서 영불 해저 터널 건설은 현실로 이뤄졌다.
유럽통합이라는 정치적-사회적-역사적 대명제도 200년간의 꿈을 현실화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가지 차이라면, 순수한 민간 투자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 150억 달러가 투자된 20세기 최대 민간 토목 공사였고 정치적 투자이기도 했다.
해저 터널은 여객 전용 열차용과 자동차를 싣고 달릴 열차용 2가지로 설계됐다. 평균 깊이는 해저 44.4m, 총 거리 48㎞. 7년에 걸친 공사에는 모두 1만5000명이 투입됐다. 여객 전용 열차는 `유로 스타`, 자동차용은 `르 셔틀`로 명명 됐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가 투자한 유로 스타는 프랑스의 고속열차 TGV와 영국 벨기에의 열차 선로 관리 기술의 총화였다.

영국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섬’이 아니다. 1990년 10월30일 영불해협 아래로 해저터널이 관통된 후 영국은 육로로 연결된 유럽 대륙의 일부가 됐다. 거대한 굴착기가 각각 영국의 포크스턴과 프랑스의 칼레를 출발한 지 3년여 만의 일이다. 약 150억달러(약 18조원)가 소요된 ‘유로터널’의 총 길이는 50.45㎞이며, 그중 바다밑 해저 구간은 38㎞에 이른다. 뱃길로 2시간 이상 소요되던 구간이 35분으로 단축됐고 고속철 ‘유로스타’는 3시간 만에 런던과 파리를 잇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저터널 건설 계획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즉위하기 2년 전인 1802년 프랑스 광산기술자 알베르 파비에르(Albert Mathieu Favier)는 두 나라 사이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해저터널을 제안한다. 가스등으로 불을 밝히고 바다위까지 굴뚝을 뽑아 환기문제를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이론상 가능한 설계일 뿐 당시 기술로는 실현될 수 없었다.
터널의 가능성이 구체화된 것은 영국 토목기술자 존 호크쇼(John Hawkshow)가 1865년 실시한 해저지질조사 덕분이었다. 해저의 두꺼운 백악층을 덮개 삼아 그 아래로 터널을 뚫으면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토대로 1882년 에드워드 웟킨스(Edward Watkins)는 양국의 해안에서 해저를 향한 첫 굴착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군부가 국방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의회까지 나서 반대 결의안을 내자 더 이상 공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
20세기 들어서도 해저터널을 향한 도전은 계속됐지만 그때마다 재정적인 혹은 정치적인 문제로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결국 1986년이 돼서야 영국과 프랑스의 육로연결이 충분한 상업적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양국 간 공동추진 조약이 체결됐고 ‘유로터널’은 유럽통합의 상징물로 세계 토목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비록 개통 후 크고 작은 사고와 만성적인 적자로 경영난을 겪으며 그 효용성이 논란이 되고 있지만 ‘유로터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이 터널은 200년 가까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이며, 또한 역사 속 ‘앙숙’이었던 두 나라가 언어와 관습의 차이를 극복하고 일궈낸 국제협력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1988년 국내 가입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총재 김종필)
▶1983년 그레나다 북한 군사동맹
▶1981년 폴란드,파업금지법안 의회에 제출
▶1981년 정전위 중립국감독위 소속체코병사, 판문점 유엔군
관할지역으로 망명
▶1979년 일본, 오오히라(大平)내각 총사퇴
▶1976년 중앙정보부,거문도 침투간첩 김용규의 자수 발표
▶1975년 스페인왕에 후안 카를로스 즉위



▶1974년 무하마드 알리.조지 포먼에 KO승
- 영원한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



▶1972년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ABM) 발효
▶1967년 소련 인류 최초로무인원거리. 조종 위성 코스모스 186,
188호 자동도킹 성공, 3시간30분 궤도 돌고 분리
▶1967년 중국-인도네시아, 쌍방 외교관 완전철수 합의
▶1966년 아베베 동아마라톤(서울~인천)서 2시간 17분 04초로 우승, 1위로 골인한 마지막 레이스
▶1963년 알제리와 모로코간 사하라전투 휴전에 합의(2일 재발)
▶1962년 이스라엘, 벤스비대통령 3선
▶1962년 유엔총회, 중국 가입안 부결


▶ 1961년 오늘, 현재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핵폭탄 '차르봄바'핵실험. 소비에트 연방 노바야제믈랴제도에서 실험이 실시되었다. 코드네임은 개발자의 이름을 딴 '이반'이었다.


'차르봄바'(차르'는 시저 또는 카이사르의 러시아 말)는 1961년 10월 30일 오전 11시 33분에 소비에트연방 노바야제믈랴 제도에서 폭발하였다. 실험시점은 소련공산당총회 시기가 열리는 기간 중에서 선택되었다.
콜라반도에 비행장을 이룩한 개조된 tplf tu-95 폭격기를 이용해 고도 10,500 m에서 투하되었다. 폭탄은 기압센서를 이용 지면으로부터 4,000m,해발 4200m 높이에서 폭발하였다. 폭발의 화구는 지상에까지 닿고 위로는 폭탄이 투하된 비행기의 고도까지
닿았다. 비행기는 이미 45km 밖에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였지만, 폭발은 1,000km 바깥에서도 보였고, 폭발 후에 버섯구름은 높이 60km, 폭 30~40km까지 자라났다. 100km 바깥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열이 발생했고, 후폭풍은 1,000km 바깥에 있는 핀란드의 유리창을 깼을 정도였다.
폭발에의한 지진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다.




▶1961년 소련 공산당대회, 레닌묘에서스탈린유골 추방 결의
▶1960년 부산 밀수깡패 100여명의경관납치 구타사건
▶1959년 서울지검, 위장자수간첩 김승균 월북 직전 체포
▶1957년 혼혈아 80명 미국으로 첫 이민
▶1953년 일본-중국, 무역협정 조인
▶1948년 유엔임시총회, 총회에 대하여 남북평화교섭 달성시까지 점령군 계속 주둔 요청
▶1847년 미군정 장관에 딘 소장 취임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WHDLS
▶1945년 군정청, 출판등록제 실시
▶1943년 일화(日華)동맹조약 체결



▶1938년 미국, '화성인 습격했다' 대소동

라디오 드라마 `화성인의 습격`을 방송하고 있는 오손 웰스.


1938년 10월 30일 밤8시. 미국 CBS 라디오가 ‘화성인의 습격’이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방송할 때였다. 드라마는 23세의 오손 웰스가 ‘우주 전쟁’이라는 소설을 할로윈용(用)으로 제작한 가상 드라마였다.
그런데 방송 도중 갑자기 ‘임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필립스 기자로 분(扮)한 오손 웰스가 뉴저지의 한 농장에서 “화성군(軍)의 습격으로 미국 곳곳이 파괴되고 혼란에 빠졌다”고 전하는 가상 실황중계였다. 뉴스를 들은 미국인들은 방송 중에 “오손 웰스의 드라마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성우의 목소리도 잊은 채 이를 현실로 착각, 공포에 빠져들었다. 뉴욕에서는 수천명의 시민이 피난하고 뉴저지주에서는 “유독가스가 퍼졌다”며 20여 가구가 탈출을 시도했으며, 전투 준비에 나서는 사람들도 나오는 등 미 전역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매스미디어 해프닝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곧 세계대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막연한 공포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제상황으로 착각하게 할만큼 뛰어났던 오손 웰스의 연출력이 크게 작용했다. 웰스는 이 드라마로 재능을 인정받아 ‘신동’으로 불렸고, 1941년에는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격찬받고 있는 ‘시민 케인’을 연출ㆍ연기했다.


▶1930년 일본 발명가 도요다 사키치 사망
▶1929년 나주역 사건, 광주 항거 시작


▶ 1925년 오늘,
스코틀랜드 출신 '존 베어드'가 텔레비전 방송으로 인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화상으로 최초전송성공!
그 이듬해 1926년 1월 27일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실험에 성공했다!
영국 왕립아카데미회원들 앞에
놓여있는 인형이 무선 장치를 통해 멀리 떨어진 브라운관화면의 영상으로 그대로 보여지는 순간이었다!
사진처럼 평면적 이지 않고 인형에 햇빛이 비치는 부분과 그림자부분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입체적인 영상이었다.
비록 주사선이 30개 지나지 않고
초당 프레임도 10개에 그치는 조잡한 형태였지만, 베어드는이 장치를 '텔레비젼'이라고 명명했다.





▶192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로마 점령
▶1920년 경성복심법원, 3.1운동관계자48인에 대한 공소심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림
▶1913년 부제(府制) 공포 (일본인거류민단법, 거류지제도철폐)
▶1910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사망
▶1905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국민참정권 인정. 의회소집선언
▶1885년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 출생
▶1871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출생
▶1861년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출생
▶1861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와 동맹 결성
▶1823년 방직기 발명가 카트라이트 사망
▶ 1735년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https://youtu.be/zRIE4nQo9TE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