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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31일

※ 2001년 미륵사 석탑, 보수를 위해
1400년 만에 해체 시작

드잡이공 홍정수씨 등이 미륵사탑 6층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을 전통적인 방식
에 따라 들어서 옮기고 있다.

백제 전통 복장을 한 40년 경력의 베테랑 드잡이공(건축물 등 무거운 물건을 옮기
는 기능을 보유한 장인) 홍정수(64)씨는 신부의 옷을 조심스레 벗기듯, 도드레에 매단 줄을 조심스레 잡아 당겨 미륵사터 석탑의 지붕돌(옥개석)을 들어 내렸다.

가느다란 탄성에 이어 박수가 터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이 1400여년 만에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31일 오후 3시 익산 미륵사터에서 미륵사터 석탑 보수 고유제(어떤 일이 시작함을 종묘에 알리는 제사)가 열렸다.

고유제 식순은 ‘화성성역의궤’(수원 화성
의 건축에 대해 기록한 책)를, 제수는 ‘국조
오례의’를 참고해 장중하게 진행됐다.

청주에 쌀과 떡, 소고기, 닭, 조기
등 13가지 음식이 마련된 상이었다.

김동현 김병모 김일진 정영호(이상 문화
재위원) 이협 의원(민주당), 노태섭 문화
재청장, 채규정 전북 행정부지사 등 300
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축문 낭독 등에 이어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미륵사터 석탑 6층 지붕돌을 들어 내리는 행사로 막을 내렸다.

백제 무왕(7세기 전반) 때 세운 미륵사
터 석탑은 동쪽과 북쪽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붕괴된 채 방치되다가 19
15년 일본인들이 보수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소재’였던 시멘트로 외벽을 싸바른 것이었다.

경주 석굴암 역시 이 시기에 붕괴를 방지
하기 위해 시멘트를 본존불 주변 불상들 뒤편에 발랐다.

문화재청은 그러나 시멘트가 노화되면서 강도가 약화되고 물이 새 붕괴 우려가 생기자 이번에 해체 보수를 하게 된 것이다.

문영빈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발굴을
하듯 돌을 하나 하나 조심스레 들어 올려 해체할 것”이라며 “해체에만 최소한 4년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 2015년 한국 첫 여성 해부학자 나복영 교수 별세
▶2010년 브라질 첫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당선
▶2010년 '구석기 연구의 개척자' 원로고고학자 손보기 교수 별세


▶2009년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첸쉐썬 박사 사망
<1911년 12월 11일 중국 저장성 항저우 시에서 출생> 중국 공산당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주역이었던 첸쉐썬 박사를 '조우언라이' 총리는 한국전쟁에서 붙잡은 미국 공군 조종사 등 고위급 포로 11명을 맞바꾸는
'빅딜'을 통해 1955년에 첸 박사를
미국에서 귀국시켰고 '마오쩌둥'은
첸 박사에게 로켓과 미사일개발에 관한 전권을 주고 '양탄일성'(미사일과 원자탄, 인공위성개발)을 이끌어 냈다.



▶2009년 이후락 전(前) 중앙정보부장 별세
▶2006년 보타 남아공 前대통령 사망
▶2002년 여군학교 52년 만에 폐교
▶2000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상주할 우주인 태운 `소유즈
TM-31` 발사
▶2000년 대만 중정 공항에서 싱가포르. 항공 여객기 추락, 78명 사망
▶1999년 이집트항공 소속 보잉767기미 동부해안 추락. 탑승자
17명 몰사
▶1997년 국민회의-자민련, 김대중씨를 단일후보로 결정
▶1996년 우편 업무 전산망 구성 완료
▶1996년 삼성 전자 세계 최초로 1G D램 개발



▶1993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펠리니 사망<1920년 출생>
1950년에서 60년대 이탈리아영화의 붐을 일으켰던 일명 '네오 리얼리즘시대'를 이끌었던 거장 대표작으로<길> < 달콤한 인생> <8과 2/1> 등





▶1992년 로마교황청 350년 만에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복권
▶1990년 정부, 새 민방간 TV방송지배주주로 (주)태영 선정
▶1989년 오잘 터키 총리,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
▶1986년 AIDS 병원체 국내 첫 검출
▶1986년 미국의 물리학자 멀리컨 사망 - 196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84년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 피살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가 1984년 자신의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인도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는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중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경호원으로부터 집중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그녀는 인도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로 1917년 인도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귀국, 아버지 네루를 따라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47년 독립 후에는 아버지로부터 정치수업을 받고,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에서 활동하다가 1959년 당수가 되었다. 1966년 제3대 총리가 된 간디는 1977년 총선에서 참패하기까지 인도를 통치했고 1980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도의 여러 州(주)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크교도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시크교도들의 분노가 발생했고 결국 암살로 이어졌다. 더구나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장남 라지브 간디도 테러로 사망해 비극의 가문이 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13세 때인 1930년부터 3년간 아버지 네루가 옥중에서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가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게 바로 세계사를 요약 정리한 ‘세계사 편력’으로, 많은 독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최고 권력자는 항상 측근을 조심해야 한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암살당한 권력자들은 대부분 최측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멀리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며 암살당한 로마의 카이사르에서부터 ‘난 괜찮다’며 숨진 박정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측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굳이 냉혹한 정치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범부들이 사는 세상살이에서도 친하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속된말로 뒤통수를 맞게 마련이다.

  1984년 10월31일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이 피살됐다.
  이날 오전9시30분께 수상실로 출근하기 위해 뉴델리 관저를 나서던 간디 수상은 그녀의 시크교도 경호원 3명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6시께 사망했다. 당시 66세였다.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무남독녀로 알라바하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리틀 인두(작은 인도인)’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당찬 소녀였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녀는 21세 때인 1938년 아버지 네루를 따라 반영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독립 후에는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 훈련을 쌓았다.

  1964년 네루 수상 사망에 따라 집권한 샤스트리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낸 후 1966년 제3대 수상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남인도 지방의 종파 및 인종분리소요를 무력진압하면서 철권정치인으로 이미지가 굳어져갔고 정권유지를 위한 야당 탄압으로 독재자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결국 1977년 총선거에서 야당에게 패배 한때 정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 총리에 복귀했으나 이날 경호원에 의해 암살,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1983년 알폰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 1983년 오늘,
로마교황청 350년만에 '갈릴레오 갈릴레이' 복권.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수학자, 진자의 등시성 및 관성법칙발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지지 등의 업적을 남겼다.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쓴 저서, 로마 교황청의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이단행위로 재판 받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 네이버 통합검색
http://naver.me/x0NGM05x





▶1980년 지하철 2호선 (잠실~신설동 14.31km) 준공
▶1980년 중국, 사회주의경제와자유주의경제 혼합
▶1978년 인천 화력발전소 제4호기 준공
▶1970년 국토종합개발 10개년계획 확정
▶1968년 쌍용시멘트 동해공장 준공
▶1967년 월남 군사정권, 선거 통해형식상 민정으로. 티우
대통령(중장) 취임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존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에서 세번째)이 한 노인으로부터 한복을 선물받고 즉석에서 입어보이고 있다.




▶1964년 국군파월에 관한 한월 (韓越)협정 체결
▶1962년 인도-중국군 아샘지역에서 접전
▶1961년 한국-호주 국교 수립
▶1959년 한국-브라질, 국교 수립
▶1958년 미국-소련, 과학교류협정에조인
▶1958년 미국-영국-소련 제네바 핵실험 정지회담 개최
▶1956년 미국 해군기 처음으로 남극 극점 착륙 성공
▶1956년 영국-프랑스군, 이집트 폭격 개시
▶1953년 대한상공회의소 개편 발족



▶ 1941년 오늘,
미국 '거츠 보글럼' 러쉬모어산 암벽에
4명의 대통령 두상조각 완성.
(1대 조지 워싱턴, 3대 토마스 제퍼슨,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16대 에이브라함 링컨)

왼쪽부터




▶1939년 친일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결성
▶1929년 조선어연구회, 조선어사전 편찬회 조직
▶1927년 광통신 기술 개척한 인도 출신 미국 과학자 나린더 싱 카파니 출생
▶1922년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 수립
▶1920년 전인도 노동조합회의, 봄베이에 사무국 설치
▶1919년 중국 남북평화통일 선언
▶1908년 한일 어업협정 조인
▶1906년 토지건물증명규칙 반포
▶1903년 미국 북장로회선교사 모펫, 평양에 숭의여학교 설립



▶1887년 중국정치가 장개석 출생



▶1883년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발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조선정부는 교보 수준이 아닌 근대적 의미의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한다.이는 박영효가 건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인쇄는 박문국에서 행해졌다. 박문국 초대 총재로는 외아문 독판인 민영옥이 임명되었으며, 부총재로는 김만식이 임명되었다.
창간호는 1883년 10월 20일 (음력 9월 20일) 발간, 10월 31일 (음력 10월 1일)발행되었다. 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하는 순보였으며, 크기는 가로 19cm, 세로 26.5cm 전체지면 수는 18쪽이었으며, 제본되어 잡지형태로 발행되었다. 1부당 가격은
30전으로 다소 비싼 가격이었다.
표제와 본문 모두 4호 활자를 사용하였으며, 순 한문으로 씌였다.
기사의 대부분은 승정원에서 돌리던 조보의 내용이었다. 편집자와 기자는 모두 조선의 관원이었다. 주사 또는 사사로 불렸고,
매우 정열적인 자세로 일했다.
하지만 신문의 평판은 그리 좋지않았다. 우선은 순한문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없었고, 내용 자체가 관보의 성격을 띄었기 때문에 정부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이 읽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가격도 1부당 30전으로 책정한 것이 너무 비싼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한성순보 제10호 <1884년 양력 1월 30일 자> 에 실린 '화병범죄'라는 제목의 기사를 문제 삼아 청나라에서 간섭하였다.
이 기사는 한성의 한약방에서 약값때문에 시비가 일어나 청의 병사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으며, 이에 청나라는 2개월 반이나 지난 4월에 조선정부에 대해 허위가 있어서는 않되며, 확실한 증거없이 씌여서는 안된다.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기사 작성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이노우에가 손을 떼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기사가 문제가 된 한국최초의 '필화사건'이다. 결국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에 타면서 간행이 중지되었고,
이후 '한성주보'로 바뀌어 간행되기에 이른다.




▶1874년 청, 타이완 출병을 둘러싼 베이징조약 체결
▶1846년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데아미치스 출생
▶1795년 `희랍의 옛 항아리`의 저자, 영국 시인 존 키츠 출생
▶1517년 루터, 면죄부 비판… 종교개혁 점화

종교개혁 점화!
1517년 오늘 독일 작센 지방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는 학교내
교회 정문에 장문의 대자보를 내붙였다. 내용은 교황의 면죄부 판매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95개항에걸쳐 조목조목 밝힌 것이었다. 34세 된 신학교수의 주장은
교황지배하에 당시 유럽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는 도전이었다. 바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다. 종교개혁의 원인제공자는 메디치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10세였다.
그는 성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많은 돈이 필요 하자 면죄부라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다. 면죄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천국행 마차 티켓'이었다.
"상자속에 돈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돈 낸 사람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반은 속아서, 반은 교회권위에 눌려서 면죄부를 샀지만, 그것이 정말 진짜인지 반신반의한 이들도 있었다. 루터에게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감정요청을 한 사람들도 그런 이들 중에 하나였다.
절대권위자에게 맞선 루터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루터의 주장은 로마교황청의 절대권력에 불만을 갖고 있던 영주, 기사 등 독일국민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루터의 주장은 순수한 신앙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종교운동으로 비화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https://youtu.be/6nRGVmmu0e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