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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일

♧1952년 11월 1일 미국, 세계최초로 수소폭탄 실험

[수소폭탄 폭발 모습]

1952년 11월 1일 오전 7시15분 직경 5km의 불꽃이 마샬군도 에니웨톡환초 상공에서 작렬했다. 근처에 있던 小島 엘게랍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계최초의 수소폭탄 실험 순간이었다. `마이크`로 명명된 수소폭탄 1호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00배를 넘어서는 TNT 화약 1000만톤의 폭발력을 보였다. 핵분열없이 핵융합으로 폭발력을 얻는 수소폭탄은 1942년 물리학자 페르미가 착안했지만, 정작 자신은 개발에 반대했다.

1950년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력위원회에 수소폭탄의 조기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장으로 근무하던 오펜하이머는 개발에 반대하다가 공산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1953년 공직정지처분을 받아야 했다.

미국이 실험한 수소폭탄은 크기가 엄청난 습식 수소폭탄으로 폭탄이라기보단 지상에 설치된 핵폭발장치에 가까웠다. 소련도 1953년 8월 12일 수소폭탄실험을 성공시켰다. 실험에서 소련이 사용한 것은 보다 간편한 중수소화 리듐을 핵융합반응재로 사용하는 건식 수소폭탄이었다.



▶2011년'한반도ㆍ아시아문제' 석학 스칼라피노 교수 별세
▶2010년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 5년만에 타결
▶2009년학술원회원 우형주 명예교수 별세
▶2002년대한민국 전자정부 출범
▶2001년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병한 새 `국민은행` 출범
▶2001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김병현, 한국인으로 첫 월드시리즈 진출


▶1999년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계열사 사장단 14명과 함께 사퇴



▶1997년해태그룹 화의 신청
▶1993년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
▶1989년한국-폴란드 국교 수립
▶1988년서울시 인구 1천28만6천5백3명 기록
▶1988년외환보유-송금 자유화


▶ 1987년,1990년 오늘,
유재하(87년),김현식(90년) 세상을 떠나다.


유재하,
1962년 안동에서 태어난 유재하는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 한 장의 앨범은 그대로 가요계의 전설이 되어 수많은 후배 가수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81년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하고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김현식과 더불어 '봄 여름 가을 겨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일한 앨범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사랑', '그대 내 품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리워진 길','지난 날', '우울한 편지'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로 구성된이 앨범은 정말 많은 리메이크를 통해 전 곡이 사랑을 받았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2007년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목록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우울한 편지'는 2003년 흥행작 '살인의 추억'에서 범행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로 삽입되어 화제가 되기도했다.
유재하의 노래는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까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을 느끼게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김현식,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재하와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결성하여 함께 활동했으며, '사랑했어요',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와 같은 명곡들을 남겼다.
김현식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대표 주자였다. 그의 노래는 락의 형태를 띠지만 결코 그 맥락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형식적인 면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상으로는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만큼은 완벽하였다.
비록 유재하와 같이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었지만 방송과 음반회사에 전횡을 무시해버리는 태도와 '우드스탁'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은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1990년 이촌동자택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후 유작앨범 2 발표되었는데 이때 '내사랑내곁에'라는 곡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이전의 곡들로 이미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 곡 만큼은 대중들에게 폭넓고
큰 사랑을 받았다.
병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앨범을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던 김현식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어서 였으리라, 그의 노래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지만 결코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 슬퍼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초연한 모습이었다.
죽는 그날까지도 "퇴원해서 녹음을 하러 가겠다"던 김현식,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꺼져가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열정이라는 단어로는 김현식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을 느낀다.
유재하가 천재적인 감정을 지났다면, 목숨보다 더 한 열정을 자신의 음악 세계의 쏟아부은 김현식은 음악 그 자체였다고 말하고 싶다.




▶1987년해병대사령부 재창설(73년 10월 10일 해체)
▶1986년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
▶1983년새주민등록증 발급 개시
▶1983년미국 신형토마호크 미사일 영국 도착
▶1983년미해병, 그레나다 철수
▶1982년한울회사건 고-대법원 핑퐁판결
▶1982년인도- 파키스탄 뉴델리서 정상회담
▶1981년언론인 유광열 사망
▶1981년정부, 앤타카 앤드 바부다와 외교관계 수립
▶1980년사회정화위원회 발족
▶1980년전국 인구-주택 센서스 실시
▶1980년문교부,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결정
▶1978년미국, 긴급 달러보호책 발표
▶1977년미국, 국제노동기구(ILO)탈퇴 선언
▶1972년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
▶1966년잡지의 날 제정
▶1966년문화예술 종합 월간지 `공간` 창간
▶1964년월맹게릴라, 월남 美공군기지 습격, 사상 56명, B57기 27기 파손
▶1963년부산 수산센터(종합어시장) 개장
▶1963년베트남 군부쿠데타(1차)로 정반민 장군 집권(2일 고딘디엠 대통령 피살)
▶1962년소련, 화성에 로케트발사 성공
▶1961년알제리서 혁명7개군 데모
▶1960년인도네시아, 석유 산업 국유화를 발표
▶1960년서울대생들, 민족통일연맹-장면총리 미소방문-남북학생회담등 주장


▶ [1959년 창경원에 벚꽃놀이를 즐기러 입장한 시민들.]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동물원이었고 동양에서는 네 번째였다.

서울 주변에 변변한 가족공원 하나 없던 시절에 생긴 문화시설이었고, 근처도 갈 수 없었던 궁궐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꿈 같은 일이었지만 이로인한 궁궐의 손상은 감수해야했다.

일제는 경내에 있던 전각과 궁문 등을 헐고 궁전의 초석을 파내 어구(御溝·도랑)의 제방으로 사용하는 등 창경궁을 훼손시켰으며, 1911년 4월 11일에는 이름까지 창경원으로 바꿨다. 봄이면 벚꽃나무를 밤까지 즐기는 상춘객들로 창경궁은 점차 위락장소로 변모해 갔다.

개원 첫해 총 72종 361마리의 동물로 시작한 창경원은 1936년에는 192종 675마리까지 식구를 불렸다. 하지만 광복 직전 미군의 폭격에 따른 맹수류의 피해를 우려한 일제가 1945년 7월 25일 150여 마리를 독살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6.25 전쟁 당시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 통에 폐허가 된 창경원은 1954년부터 재건됐다. 이후 궁궐의 훼손과 좁은 부지의 문제로 1977년 과천으로의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고 1984년 5월 1일, 창경원의 동물원은 과천에서 서울대공원 동물원으로 개장됐다.

창경원은 1983년 12월 31일 마지막 관람객을 맞은 후 문을 닫았다.




▶1956년국내 최초 TV방송국 HLKZ-TV 정규방송
▶1956년오스트리아, 영국-프랑스와 단교
▶1956년영국-프랑스군, 수에즈운하 폭격


▶1954년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7명의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 시작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7명의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 시작

  1954년 11월 1일 알제리의 전국토 30여곳에서 창고 방화, 농업협동조합 폭격, 프랑스교사 살해 등의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인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각각의 사건들로 본다면 단순한 데모행위에 불과하지만, 종합해 보면 1954년 결성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지도에 의한 결과였다. 1830년이래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폭력에 대해 경고 조치에 그치지 않고 즉시 300명의 중무장한 경비대를 마르세이유로부터 알제리로 파병했다. 또한 프랑스 수상 맹드는 3개 대대의 낙하산병의 투입을 공식 발표했다. 모로코와 튀니지 보호령에서도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폭력이 보도되자, 유목민들도 프랑스 공격에 가담했다. 이들의 공격은 유엔에서 프랑스 억압을 비난하고 나선 다른 아랍국들과 보조를 함께한 것이었다. 독립전쟁은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됐다.


  알제리 독립전쟁
  프랑스인에게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알제리를 점령한 1830년 이후,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프랑스계 2세·3세에게 알제리는 고향이었고 프랑스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디엔비엔푸를 빼앗겨 10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11월 1일 민족해방전선(FLN)이 알제리 전역에서 대불(對佛)항전을 시작한 것이다. FLN이 점차 대량학살을 일삼고 프랑스군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으로 응수하면서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5만명에서 50만명으로 늘어난 프랑스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FLN의 저항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그러나 프랑스 내부에서 갈등이 다시 폭발했다. 식민주의자와 프랑스군의 잔학상이 알려지면서 프랑스인과 국제여론이 알제리 독립 쪽으로 기울었고 이 때문에 1958년 5월, 위기의식을 느낀 현지 주둔 프랑스 군부와 식민지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청사를 점거하고 코르시카섬까지 장악한 반란군은 사태해결에 드골이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반란은 드골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진정됐으나 반란군은 머지않아 드골에게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 알제리로 날아간 드골이 “당신들의 말을 알겠다” “프랑스령 알제리 만세”를 공공연히 외치면서 그들을 안심시켰으나 드골은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가 이미 저물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1년 1월 알제리 민족자결정책의 시비(是非)를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면서 알제리는 서서히 프랑스로부터 멀어져갔다. 그 해 4월, 백인 비밀군사조직 OAS가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시기와 명분을 놓쳐버린 반란이 성공할 리 없었다. 한동안 폭격기와 탱크를 동원한 OAS의 테러와 폭력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래도 독립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1962년 7월 3일 드골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알제리 식민통치도 132년 만에 막을 내렸다. 비싼 대가를 지불했던 독립전쟁이었다.



▶1954년호남선에 특급열차 태극호 등장



▶1951년미국, 네바다사막에서 원폭실험 개시

1952년에는 미국 태평양 '에니웨톡 섬'에서
첫 수소폭탄 실험!
1952년 오늘, 인류가 그 때까지 보지못한 가공할 무기가 그 위력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 태평양 마샬군도에 '에니웨톡'이라는 산호초지대 상공,
무려 지름5km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
근처에 있던 작은 섬 하나는 순식간에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실험 순간이었다. '마이크'로 명명된 수소폭탄의 위력은 실로 상상을 초월했다.
TNT 1,000만톤의 폭발력,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 2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자폭탄의 500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핵분열에의한 원자폭탄과 달리 핵융합으로 폭발력을 얻는 수소폭탄의 원리를 이탈리아의 원자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처음 발견하고도 정작 자신은 개발에 반대한 이유를 짐작할 만했다. 미국이 수소폭탄개발에 나선 것은 소련이 원자폭탄개발에 성공한데 따른 위기감 때문이었다.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력위원회에 수소폭탄의 조기개발을 지시했다. 존 오펜하이머 등 과학자들이 수소폭탄은 비도덕적인 무기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했지만 한 번 불붙은 핵무기 개발경쟁을 막지는 못했다. 소련은 미국이 실험에 성공한 이듬해인 1953년 수소폭탄실험을 성공시켰다.
이후 수소폭탄은 점점 그 위력과 성능이 개량되어갔다. 지상에서 실험할 공간을 찾지 못한 미국과 소련은 우주공간에서 핵실험을 하기도 했다. 수소폭탄개발은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어, 1967년에는 중국이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수소폭탄이 실제 사용된 적은 없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사용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50년코리아타임즈 창간
▶1949년서울-부산간 민간항공취항(운임 1만100원)
▶1948년중국 상선, 남만주해에서 폭발, 침몰로 6천여명 사망
▶1948년여순반란사건 반도 89명 사형집행


▶ 1947년 오늘, 미국 폴라로이드사 사장
'에드윈 랜드'박사가
폴라로이드사진기를 개발.
폴라로이드사진기는 촬영한 장소에서 암실작업없이 흑백필름은 10초, 컬러필름은 1분안에 인화가되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폴라로이드필름은 일대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사진의 역사에서는 큰 충격이었다.
(1909년 5월 7일 미국 코네티컷 주 브리지 포트에서 출생 1991년 3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



▶1945년북한 노동신문의 전신 `정로(正路)` 창간
▶1939년외국인 입국체재 및 퇴거령 공포
▶1935년나진항 개항
▶1934년부산-장춘간 직통열차운행개시
▶1931년동아일보 신동아 창간
▶1925년중국, 무한정부 수립
▶1925년백암 박은식 선생 사망
▶1922년오스만 투르크 제국 멸망


▶1916년신소설 작가 이인직 사망

이인직, 그는 뼛속까지 일본인이었다
   신소설이라고 하면 20세기 초에 등장한 고대소설과 현대소설의 가교 역할을 했던 소설을 총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최초의 신소설로 이인직의 [혈의 누]를 꼽고 있다.
   그러나 뼛 속까지 일본인이었던 그를 우리는 ‘신소설의 선구자’ 정도로만 알아왔다. 추억해 보건데 최소 고등학교 시절까지 우리는 이인직을 개화사상과 자유연애를 소설로 설파한 위대한 개화사상가로 배워왔다. 어쩌면 해방 65주년을 앞둔 오늘까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그의 친일행보가 문학사적 업적에 가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사회가 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인직의 사상이 가장 짙게 배어있는 소설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라고 할 수 있다. 이인직이 지향하고자 했던 이상향은 제목과 이 소설의 정치적 배경이 된 사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인직은 ‘혈의 누’의 우리말인 ‘피눈물’을 제목으로 설정하지 않고 굳이 일본식 표현인 ‘血の漏’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청일전쟁’을 ‘일청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죽은 이인직
   1904년 일 본의 대륙 침략에 자신감을 완전히 얻게 되는 러일전쟁 때 이인직은 일본 육군에 배속되어 통역을 담당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1906년에는 송병준이 주도하는 친일 단체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이 되면서 국내에서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한일합병 당시 일제와 합병을 앞장선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바로 송병준의 일진회와 이완용이 이끄는 내각이었다. 이인직은 처음에는 송병준 계열의 《국민신보》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이완용의 후원으로 이완용 친일 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 사장에 취임하면서 이완용 내각과 관계를 맺어 나간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 이완용의 비서로 활동한 이인직은 경술국치 이후에 ‘경학원 사성’이라는 직위를 얻는다. ‘경학원’은 조선 왕조의 정신적 기관인 성균관을 격하하여 유림들을 친일로 전향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인직이 합방 조약 때 활약상에 견주어 생각보다 낮은 직위인 경학원 사성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의문점으로 남는데, 아마도 정치적 수완은 조금 약했던 모양이다. 합병 때 이인직은 이완용의 밀사로서 자신의 유학 시절 스승이자 합방 조약의 실무자였던 고마츠와 자주 내통했다고 한다. 송병준 세력을 견제하면서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합방 조약을 체결하려는 이완용으로서는 고마츠의 제자인 이인직의 활용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뒤에 고마츠는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에서 이완용의 밀명을 받고 자신을 찾아온 이인직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한일 합병’에 앞장 선 그이가 꿈 꾼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표 작품인 <혈의 누>가 아마도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은 청일전쟁 때 청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여주인공 옥련을 구해 주는 일본군 군의관을 등장시킨다. 이는 조선이 그동안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과 함께 조선을 구해줄 구원자는 바로 일본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개화 사상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의식 구조이다. 즉 조선의 근대화는 덩치만 크고 무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청나라가 아닌 서구의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또는 미국, 영국 같은 서구 열강을 통해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식인들의 눈과 마음은 이미 자신이 개화를 통해 발전시켜야 할 조선에서 떠나 오히려 그 나라들을 흠모하게 되어 버렸다. 마치 없는 살림에 농사지어 서울로 고생고생하며 유학을 보낸 자식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을 도시와 견주면서 천하게 여기는 경향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다시, 주인공 옥련은 일본에서 구완서라는 조선 청년을 만난다. 구완서는 조선을 업신여기면서 자신은 일본과 만주를 합하는 대연방을 건설하겠다고 말한다. 구완서의 꿈은 정확히 26년 뒤인 1932년 일본이 건국한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있다. 이인직이 <혈의 누>에서 말하고 있는 꿈은 본디 자신의 꿈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스승인 고마츠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꿈이었을 것이다.
   구한말 조선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한 청년 이인직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새로운 조국 일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국 일본의 성공을 곧 자신의 성공으로 맞바꾸고자 했던 이인직.
   1916년 이인직의 장례식은, 이미 정신마저 완벽한 일본인인 데다 일본 신도의 한 분파인 천리교 신자였으므로 천리교 식으로 치러진다. 문학뿐 아니라 연극 따위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이인직. 그이는 태어날 때는 조선인이었지만 죽을 때는 이미 완벽한 일본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인직의 소설 <혈의 누>는 바로 자신의 조국이 희망을 주지 못할 때 그 조국을 등지게 되는 과정을 피눈물로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1911년압록강철교 완공
▶1911년총독부, 교과서편찬 개시
▶1909년사법청의 개청으로 법부 폐지


▶1909년창경원 개원

밤 벚꽃놀이 기간 중 인산인해를 이룬 창경원 문 앞 모습. 조선일보 1928년 4월 23일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 벚꽃놀이 풍습이 들어오면서, 봄만 되면 경성 시민은 창경원과 장충단 공원, 혹은 멀리 우이동이나 인천, 월미도, 개성으로 꽃놀이를 떠나는 게 유행이었다.

   일제는 1907년 일본의 상징꽃 같은 벚꽃을 창경궁에 심었으며, 1911년엔 ‘궁(宮)’이 ‘원(苑)’으로 격하되어 창경원이 시민들 꽃놀이터의 하나가 됐다. 1924년 4월 20일, ‘창경원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이 처음 실시되면서 조선의 봄 꽃놀이 문화는 완전히 바뀌었다.

   ‘야앵’은 단순히 밤에 벚꽃 구경만 하는 게 아니었다. 휘황찬란한 오색 전등의 ‘일미네이?V(illumination)’ 아래, 이왕직(李王職·조선왕실 사무 담당 기구)이 주관하는 아악과 양악 연주, 기생들의 검무, 야외 영화상영과 ‘라듸오’ 공개 무대가 펼쳐지는 조선 유일의 ‘종합엔터테인먼트’ 장소였다.

   망국의 한이 서린 곳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너도나도 창경원에서 먹고 마시고 놀았다. ‘창경원 야앵’은 ‘30만 경성시민이 손꼽아 기다리는 밤의 환락장’(1929년 4월 15일자)을 넘어,‘어마어마한 시골관광단이 창경원으로!’ 몰리면서 ‘장사군들은 돈궤짝을 바라보고 만족’하는(1936년 5월 3일자) 조선 최대 축제로 자리 잡았다.

   보통 일주일가량 이어진 ‘야앵’ 기간 동안, ‘꽃에 미친 어머니, 미아 45건’(1932년 4월 28일자), ‘당신의 나들이를 엿보는 도적, 꽃구경도 좋지만 문단속도 철저히’(1934년 4월 17일자), ‘야앵표 파는 곳에 소매치기가 우글우글’(1939년 4월 19일자) 같은 사건· 사고도 비일비재했다.

   ‘야앵에 미처난 군중이 일주일 밤낮동안 16만여명(1932년 4월 28일자)’에 달하는 등, 입장객이 폭증하자 이왕직은 1935년부터 입장료를 10전에서 20전으로 배나 올렸다. 그러자 첫날 입장객이 3000명에 그쳤고, 이튿날에도 6000명에 불과, ‘창경원 야앵’ 신화는 깨지는 듯했다. 그러나 요란한 전등불과 각종 공연의 유혹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사흘 만에 다시 전과 같은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1908년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 발행



▶1905년한국, 도량형 신제도 채택
▶1894년러시아 민족주의를 지지한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 사망


▶1800년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1757년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출생
▶1755년포르투칼 리스본에 지진(약 10만명 사망)
▶1435년조선, 일식 발생



https://youtu.be/wvRt71sdXYU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