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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2일

♧1968년 11월 2일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명 침투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명 침투]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무장공비 1백여명이 침투한 사건에 대해서
한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968년 1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이는 지난 1.21 청와대기습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8개조로 나누어져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 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30분쯤 7명의 공비가 나타나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라며 주민을 모은 다음,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사상선전을 한 다음 유격대지원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때 이 마을에 나타난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두를 대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만행이 잇따랐는데,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 세사람이 난자 당했으며,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공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결사적인 신고에 힘입어 상황을 파악한 당국은 11월3일 오후 2시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에`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며, 연말까지 대부분을 소탕했다.





▶ 2005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 주민투표 (경주 선정)
▶ 2004년 이슬람권의 여성 처우문제 비판한 네덜란드 영화제작자 반 고흐 피살
▶ 2004년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하얀 UAE 대통령 사망, 30여년 절대통치 마감
▶ 2004년 전국에서 모인 3만 여명의 식당 업주들,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 모여 솥뚜껑 시위
▶ 2000년 서울여대 설립자 고황경 박사 별세
▶ 1999년 콜레스테롤 낮추는 `신물질` 국내 첫 개발
▶ 1998년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제4차 유엔기후변화회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80개국 대표들이 참가 개막
▶ 1992년 영국 찰스왕세자부처 내한
▶ 1991년 정부, `국군의 날` `한글날` 공휴일 제외 확정


▶ 1988년 5공비리특위 청문회

1988년 18대 국회에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대한 활동.
1988년 13대 국회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되자 다수를 차지한 야당은 10월
'국회 국정감사권'을 부활시키고,
11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제5공화국의 '권력형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5공비리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청문회가 열리는 국회 바깥에서는 '전두환 ,이순자의 구속'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국회에서 5공비리 청문회가 열리던 1988년 10월 국회 밖에서는 5공비리 진상규명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지역 대학생들의 5공화국 청산투쟁은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 대각사 와 미화당백화점 앞을 주 무대로하여 시위와 집회를 통한 대국민 선전전형식으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집회이후에는 부산역을지나 서면까지 가두투쟁을 벌였다. 11월에는 재야단체 참여로 전국적인 궐기대회가 이루어지면서 열기가 가히 6월민주항쟁과 비교될 정도로 드높았다. 1988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위한 '범국민적 총궐기대회'는 3만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고, 집회 후에 참가자들은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에서 서면까지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이 기간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교내 외에서 지속적으로 집회를 이어갔으며, 11월 17일에는 넉넉한 터 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개최한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위한 민족효원 비상학생총회에 1,0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교문 앞 시위를 시도하였다. 19일에는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를 위한 제2차 부산시민 궐기대회와 평화통일 민주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주관하는 평화대행진에 1만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한편 '5공비리 청문회'는 부산직할시 동구에 초선의원인 '노무현'을 청문회스타로 만들었다.
노무현은 책임회피로 일관하는 전두환의 단상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며
맹렬이 항의하고, 청문회 내내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송곳같은 질문을 퍼부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5공 청문회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열린 청문회 였으나, 전두환등 관련자 대부분이 책임을 부인하고 변명으로 일관함으로써
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11월 23일 전두환은 대국민사과 후 재산헌납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운둔하였다.

5공비리 청문회 진행과정에서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전두환정권의 비리와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사실들이 국민 앞에 밝혀졌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인간사! 절대 피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부메랑',반드시 '죽는 것'!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는법




▶ 1987년 자오쯔양(趙紫陽)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출
▶ 1983년 남서울대공원에 선보일 각종 동물 미국으로부터 김포 도착
▶ 1983년 그레나다, 북한외교관 추방
▶ 1982년 올빼미 등 21종, 독도 등 5개섬 천연기념물 지정
▶ 1981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 구성
▶ 1980년 이란의회, 미국인질석방 건의


▶ 1980년 중국 4인방(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기소

4인방 중 요문원이 재판받고 있는 모습

중국의 4인방(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을 재판하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이 1980년 11월 2일 북경에서 개정됐다. 중국정부는 기소에 앞서 "정치색이 없이 순수한 형사사건으로서만 취급하겠다"고 국내외에 강조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재판이 문화혁명을 실행한 모택동에 대한 정치적 책임추궁을 회피할 목적으로 열린 것으로 보았다.
재판에 앞서 기소사실이 공표됐다. 주요사실은 `당간부에 대한 박해, 정권전복` `대중탄압` `모택동 암살계획` `상해무장계획`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TV로 이 재판을 지켜보았지만 의외로 냉정했다.
재판에서 왕홍문은 범죄사실을 시인했지만 장춘교는 완전 묵비권을 행사했고 강청은 판사와 검사에게 "당신들은 파시스트다"라고 고함쳤다. 검찰은 24일 강청에 사형을 구형했다.





▶ 1973년 김종필총리 일본방문. 김대중 납치사건 일단락
▶ 1972년 평양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2차회의 개최
▶ 1968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명 침투
▶ 1965년 아프리카 외상회의
▶ 1965년 196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고요한 돈강`의 번역 출판 금지
▶ 1965년 프랑스-소련, 핵병기 확산방지에 관한 공동성명 발표



▶ 1964년 한국정부 '월남파병'에 대항하여
월맹 호치민이 우방인 북한김일성에게
군사지원을 요청!이에 따라
한국의 안보를'무장공비'를 남파시킴으로서
흔들려는 시도!






▶ 1963년 베트남 쿠데타, 고딘디엠 대통령 피살
▶ 1961년 혁명재판소, 장도영 전최고회의의장 법정구속
▶ 1955년 사정위원회 발족, 위원장 조용순
▶ 1952년 한글학자 정태진 사망
▶ 1951년 공비출몰로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 1950년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 사망

◇ 가능한 한 일찍 결혼하는 것은 여자의 비즈니스이고, 가능한 한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남자의 비즈니스이다.   -버나드 쇼

  ◇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 는 것은 미련한 말이다. 건전한 육체는 건전한 정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

  ◇ 결혼은 그것이 최대 유혹과 최대 기회의 결합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   -버나드 쇼

  ◇ 그대가 할 일은 그대가 찾아서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그대를 찾아다닐 것이다.   -버나드 쇼

  ◇ 남자나 여자의 교양의 시금석은 싸울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버나드 쇼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버나드 쇼

  ◇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 는 것이 성공의 가장 확실한 길이다.   -버나드 쇼

  ◇ 모든 행로는 무덤에서 끝난다. 무덤은 무(無)의 입구이다.   -버나드 쇼

  ◇ 미인이란 처음으로 볼 때는 매우 좋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 집안에서 상대해 보면 더 보고 싶지가 않게 된다.   -버나드 쇼

  ◇ 비겁자가 되지 않고는 영웅이 될 수 없다.   -버나드 쇼

  ◇ 살아 있는 실패작이 죽은 걸작보다 낫다.   -버나드 쇼

  ◇ 선행(善行)이란 악행(惡行)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버나드 쇼

  ◇ 애국심이란 자기의 조국이 다른 모든 나라보다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믿는 신앙을 말한다.     -버나드 쇼

  ◇ 어버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여지껏 일찍이 아이들을 위해,  이 직업의 적성검사(適性檢査)를 한 적이 없다.   -버나드 쇼

  ◇사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적응시키고, 사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적응시키려고 한다.   -버나드쇼

  ◇자만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소한 일에 집착한 나머지 그들이 모르고 있는 수많은 것에 대해 마음 쓸 여유가 없게 된다.    -버나드 쇼

  ◇어리석은 자는 수치스러운 일을 할 때에도그것이 언제나 그의 의무라고 선포한다.   -버나드쇼-

  ◇거짓말쟁이가 받는 가장 큰 형벌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한다는것보다 그 자신이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슬픔에 빠지는 데에 있다.  -버나드 쇼

  ◇우리는 벌지 않은 재산을 소비할 권리가 없듯이, 벌지 않은 행복은 즐길 권리가 없다.  -버나드 쇼

  ◇꿈꾸지 않는 자에게는  절망도 없다. -버나드  쇼

  쇼 [Shaw, George Bernard, 1856,7.26~1950.11.2]
  1950년 11월 2일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856년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난 쇼는 20세가 되던 1876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소설을 썼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활동하면서 그의 진면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재치와 언변을 동원해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1892년 입센풍의 희극 <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의 공연으로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 놓았고, 이어 대작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 등을 발표했다. 쇼는 그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인 음성학에 대한 교훈극 <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으로 1938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 각색되어 인기를 끌었다. <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으로 1925년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부했다.



“끈질기게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때가 오면 과감히 돌진한다!”
  마르크시즘이 맥을 추지 못했던 영국에서 ‘피 없는 혁명, 소리 없는 전진’을 이끌었던 페이비어니즘(Fabianism·점진적 사회주의). 그 산실인 페이비언협회를 주도한 이가 극작가 버나드 쇼다. 그는 ‘극좌와 극우의 발호를 막아 영국을 내란의 위기에서 건졌다’는 협회의 좌장 격이었다.

  쇼는 자신이 ‘정부 이면(裏面)의 공작’이라고 표현했던 지적(知的) 침투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데 힘썼다. 혁명이 아닌 개혁, 아니 개혁보다는 개량, 그것도 점진적으로 절차를 밟아.

‘20세기 세계 지성의 대부’라는 작가 H G 웰스가 협회에서 탈퇴한 게 그 뜨뜻미지근한 온건론에 반발해서다.
권력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그것을 탐하지는 않았던 쇼. 이 철저한 의회주의 신봉자도 현실정치엔 어지간히 물렸는지 예의 독설을 남긴다. “민주주의는 부패한 소수가 정하던 것을 무능한 다수가 선거로 대체했다.”

  쇼는 이상의 작가였으나 또한 실천의 작가였다.
“모차르트가 나의 문학적 스승”이라던 그는 음악과 미술에도 통달했다. 모든 예술의 장르를 종횡무진 넘나들던 그가 연극에 눈을 돌렸을 때 영국 사실주의 근대극은 탄생한다.

  그는 입센의 참여문학을 전범으로 삼았다. 대도시 빈민가의 주택문제와 조직매춘 같은 ‘불쾌한 주제’를 다루며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담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찌든 연극 무대를 일신(一新)했다.

  몽상가이자 신비주의자였던 쇼. 그의 예술은 도덕적 열정에 이끌렸으나 실제 생활에선 오만불손하고 자기 과시적이었다. 94세가 될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남아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는 쾌활한 기지를 마음껏 내뿜었다.

  깡마른 체구와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유명세를 탔다.
쇼는 매사에 신랄했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고는 이렇게 내뱉었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세계문학상을 생각해낸 건 참으로 언어도단이야….”

  어떤 이는 그를 “사회주의의 선전가”로 혹평하기도 하나 그의 문제작은 아직도 연극적 생명을 잃지 않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 의사에게 “당신은 마치 골동품처럼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 든다”고 투덜거렸던 쇼. 그는 이런 묘비명을 부탁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 1948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재선
▶ 1941년 콜롬보회의, 한국을 회계자문위원회 13차회의 옵서버로 승인
▶ 1941년 영국, 노동당수에 휴 케이츠켈 재선


▶ 1936년 BBC, 세계최초의 TV방송 시작

영국 BBC가 세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규 텔레비전방송을 'BBC 텔레비전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시작.
1964년에 'BBC 1'으로 명칭을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28년 조선문예영화예술협회 창립
▶ 1927년 상해에서 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 개최


▶ 1920년 미국, 라디오 정시 방송 시작

미국의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라디오방송국 kdka가 오후 6시에 "대통령 선거속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라는 멘트로 뉴스를 전함으로써 정해진 시간에 방송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26년에 경성방송국이 설립 되어서, 1927년 2월부터 방송이 시작되었다.

  "대통령 선거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920년 11월 2일 피츠버그 라디오 방송국 KDKA가 세계최초로 정해진 시각에 방송을 시작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방송은 하딩 후보와 코크스 후보의 표대결을 리얼타임으로 보도했다.

  피츠버그 교외의 한 시민회관은 라디오에 확성기를 설치해 선거상황을 알려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하기도 했다. 1920년대 대중화시대를 연 것은 라디오와 자동차였는데 작은 스피커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는 `만화경`이었다. 이탈리아 테너 카루소의 감미로운 노래,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가 친 홈런, 가축도둑을 쫒는 보안관의 말발굽 소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1922년까지 미국 499곳에 방송국이 설립됐고 라디오 10만대가 팔렸다.

  기업들은 라디오 광고에 총력을 기울였고 방송에 광고를 집중시킨 담배회사 럭키 스트라이크는 1년 만에 매출액이 47%나 늘었다. 한국에서는 1926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 2월 공식 개국방송을 했다.


   라디오 첫 정규방송
  1920년 11월2일 오후6시, 미국 피츠버그시. 창고를 개조한 사무실에서 네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상업적 라디오가 정규방송을 시작한 순간이다. 최초의 정규방송은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선거 개표 속보를 실시간으로 중계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집계되는 동안 방송국은 축음기를 틀거나 악사들의 직접 연주를 내보냈다. 청취자가 극소수였지만 라디오는 하딩의 당선을 가장 빨리 알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캐나다의 한 방송국이 6개월 전에 정규방송을 시작했다는 논란 속에서도 ‘최초의 라디오 정규방송’으로 공인 받은 개표방송의 주인공은 KDKA.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가 라디오 판매촉진책의 일환으로 세운 방송국이다.

  첫 방송의 성공에 자극받아 1922년까지 499개 방송국이 생겼다. 방송 영역도 클래식 음악에서 예배 방송, 권투 중계까지 넓어져 다양한 문화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아마추어 무선사들이나 자작하던 라디오의 판매시장도 형성돼 1922년 매출 6,000만달러(요즘 가치 27억달러)를 기록한 뒤 1929년에는 8억4,255만달러 규모로 커졌다. 방송광고 시장도 태어났다. 1922년 한 부동산 업자가 50달러를 내고 10분 동안 광고할 시간을 따낸 뒤 기업들이 뛰어들며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라디오는 미국 문화를 하나로 묶었다. 라디오의 재즈 선율, 권투와 프로야구 중계, 선거 속보와 광고방송은 거대한 미국 땅에 동일한 유행과 문화를 심었다.



▶ 1917년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 유태인 국가건설을 지원하는 '밸푸어선언' 발표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는
영국정부의 입장을 담은 편지를 유대인대표 '로스차일드'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벨푸어 선언'이라 하는데 당시 영국은 유대인과 아랍국에 각각 친화정책을 썼는데 결국은 대립되는 정책을 남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1915년 오늘,
알프레트 베게너 사망(1880년 11월 1일~ 1930년 11월 2일)

독일 지질학자 '알프레트 베게너', 1915년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 에서 '알프레트'는 너무도 유명한 '대륙이동설'을 주장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알프레트 베게너는 지구의 대륙이 하나로 뭉쳐진 '판게아'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 1909년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고 일본총영사관을 개청
▶ 1906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출생
▶ 1874년 만국우편조약 체결
▶ 187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창간
▶ 1865년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하딩 출생
▶ 1795년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 출생


▶ 1755년 프랑스 왕 루이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793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1792년 9월 21일 프랑스혁명으로 군주제 폐지되었다.
1793년 10월 14일에 시작된 2일간의 재판이 있은후 '마리 앙투아네트' 1793년 10월 16일 혁명재판소에 반역죄로 기소되어 '기요틴'(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 1699년 프랑스 화가 샤르댕 출생
▶ 1594년 조선 명장 임경업 출생

▶ 1417년 오늘,
조선7대 국왕, 세조 (음력 9월 24일, 조선 한성부 본궁에서 출생, 1468년 9월 23일 음력 9월 8일 조선 한성부 수강궁 정전에서 승하) 재위기간 (1455년~1468년)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다.



https://youtu.be/pX5oQdQDVs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