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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7일

♧2000년 11월 7일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2000년 11월 7일 치러진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이 공화당의 릭 라지오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힐러리는 10%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라지오를 크게 앞질렀다. 힐러리는 이날 맨해튼에서 열린 축하 모임에서 “앞으로 6년간 여러분을 위해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딸 첼시와 함께 아내의 당선을 지켜본 클린턴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힐러리는 “남편과 딸에게 감사한다”고 했을 뿐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이 남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딸 첼시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당선자 연설을 하고 있다.


힐러리는 라이벌인 라지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명도를 가지고 선거를 시작했지만 쉬운 선거는 아니었다. 유세기간 중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그녀 발목을 붙들었고, 선거 막바지에는 이슬람 단체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곤경에 빠졌다.


공화당은이 이슬람 단체가 예멘에서 발생한 미 구축함 콜호 피격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공세를 펴는 무리수를 둬, 역효과를 냈다. 라지오는 뉴욕에 아무 연고가 없는 힐러리를 `철새정치인`으로 몰아붙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비해 힐러리는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 등 불리한 이슈는 피해가면서 뉴욕 유태인들의 표를 거머쥔 조지프 리버만 부통령 후보를 선거에 투입해 성공을 거뒀다.




▶ 2010년 미얀마 20년만에 총선
▶ 2005년 감옥서 사상 첫 복싱 세계챔피언전(태국)
▶ 2005년 한국·벨기에 확대정상회담(서울)
▶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이라크 전역 60일간 비상사태 선포
▶ 2004년 중국 뤄양 룽먼석굴서 백제불상 첫 발견
▶ 2000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
▶ 1998년 조용필 음악30년 콘서트
▶ 1997년 김영삼대통령, 신한국당 탈당
▶ 1997년 유학자 류정기 옹 별세



▶ 1993년 대전 EXPO 폐막




▶ 1992년 '프라하의 봄'을 주도한 두브체크 사망
▶ 1991년 SBS TV방송, 시험전파 발사


▶ 1991년 오늘,
노태우 정부,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에게 '정신대 진상규명' 요구!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
1992년 1월 29일 국회 참의원연설에서 '사죄와 반성' 표명!




▶ 1990년 보리사브 요비치 유고 대통령, 동구권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방한
▶ 1984년 신병현 국무총리 권한대행 취임


▶ 1983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따내




▶ 1983년 한국-파키스탄, 국교수립
▶ 1982년 서아프리카 오트볼타에 쿠데타
▶ 1982년 레바논, 한국에 파병요청



▶ 1980년 미국 영화배우 스티브 매퀸 사망

The Hunter(1980), Tom Horn(1980), The Towering Inferno(1974), Papillon(1973), Junior Bonner(1972), Le Mans(1971), Bullitt(1968), The Thomas Crown Affair(1968), The Sand Pebbles(1966), The Cincinnati Kid(1965), Love with the Proper Stranger(1963), The Great Escape(1963), Hell Is for Heroes(1962), The Magnificent Seven(1960), Never So Few(1959), The Blob(1958)



▶ 1980년 정치풍토쇄신위 발족. 위원장 김중서 대법원장
▶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 1975년 해군기동연습서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안 확정



▶ 1972년 닉슨 미국대통령 재선 성공
그러나 얼마 못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퇴임.


'워터게이트' 사건,
워터게이트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 4년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남용'에서 시작되어, 현직 대통령의 퇴임까지 이어진 정치스캔들이었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본부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호텔'에서 유래한다. 처음에 닉슨과 백악관측은
침입사건과 정권과는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 1972년 아폴로 17호 마지막 달착륙


달 탐사에 이용된 마지막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17호는 유진 서난, 해리슨 슈미트, 로널드 에반스를 태우고 1972년 12월 7일에 발사되어 같은 해 12월 11일에 달에 착륙했다. 아폴로 17호의 우주인들은 달에 머무른 45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측정 장치를 설치하고 월면차로 착륙 지점으로 부터30.5km 거리를 여행하면서 탐사했다. 그들은 110.5kg의 샘플을 채취하여 귀환했다. 아폴로 17호 이후로는 더 이상 유인 달 탐사선을 보내지 않았다.



▶ 1970년 더글러스 엥겔바트, 마우스 특허


'클릭' 없이 컴퓨터가 가능할까. 그렇지만 복잡하다. 수많은 명령어를 외우고 좌판을 두들겨 입력시켜야 컴퓨터를 돌릴 수 있다. 전문가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춰야만 활용할 수 있던 컴퓨터를 클릭만으로 가동시켜주는 장치는 '마우스'.

컴퓨터 대중화의 일등공신인 마우스는 언제 등장했을까. 주장이 분분하다. 1963년 개념이 소개됐다는 설을 넘어 1952년 자동항법장치를 연구하던 캐나다 해군이 처음 개발했다는 기록도 있다. 확실한 것은 최초의 특허등록일. 스탠퍼드연구소(SRI)에 근무하던 더글러스 엥글바트가 1967년 6월 미 특허청에 출원한 특허가 1970년 11월17일자로 인정받았다.

출원 당시 이름은 'X-Y축 위치 지시기'. 가로세로로 움직이는 소형 바퀴 2개와 버튼 3개를 나무상자로 감싼 새로운 기계는 오늘날의 마우스 기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시대는 그 편리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1980년에는 바퀴가 볼 형태로 진화하고 이름도 '마우스'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쌌던 탓이다. 마우스만 300~400달러, 별도 연결장치 가격이 300달러를 호가했으니까.

포유류 중에서 가장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던 쥐처럼 마우스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스티븐 잡스가 35달러짜리 마우스를 출시하면서부터 개인용 컴퓨터까지 급속도로 퍼졌다. 오늘날 마우스 없는 컴퓨터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윈도스와 그룹웨어ㆍ워드프로세서ㆍ인터넷에서도 '최초'의 기록을 남을 남긴 엥글바트는 무엇보다도 마우스의 발명자로 기억된다. 해군의 레이더병으로 복무하며 얻었던 영감을 과학적 창의력으로 연결해 마우스를 발명한 엥글바트 덕분에 인류는 컴퓨터의 편리함을 만끽하고 있다. 컴퓨터와 마우스의 진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





▶ 1962년 주은래, 인도가 중국의 주장선을 인정한다면 국경선에서 중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통고



▶ 1962년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사망

밝은 성격과 낙관적 인생관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느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표정은 항상 '밝음'이었다. 그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여인이 10세에 고아가 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하였던 어린 시절에 소녀는 '돈은 땀과 눈물의 종잇조각이다.'라고 말했다.

이 소녀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낙관적 인생관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비관적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엄마가 되어 6자녀 중 한 아이가 숨을 거뒀을 때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 명이나 있다.' 라고 말했다.

남편이 다리를 못써 휠체어 인생이 됐을 때, '이런 불구인 나를 아직도 사랑하오?'라고 묻자, 그 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 다리만 사랑했나요?”

이 여인이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영부인인, 미국인들이 가장 호감가는 퍼스트 레이디로 활동적이었던 '엘리너 루스벨트'였다.




▶ 1955년 영국 애틀리 노동당수 사임



▶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 발효 (17일 비준서 교환, 18일 정식 발효)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한 · 미 간에 상호 방위를 목적으로 체결한 동맹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 국회에서 비준 절차를 거친 후 1954년 11월 17일에 비준서가 교환되고 이튿날인 11월 18일에 정식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전문 및 6개 조항을 가진 본조약과 제 3조와 관련된 미국의 '양해사항'이 포함된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이 가능하게 된 반면, 한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군사적으로 개입할 의무와 함께 사전에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지원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특히 이 조약의 비준 과정에서 한 · 미 양국은 협상 끝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경제 · 군사 원조와 한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작전 통제 지속을 규정한 <한미합의의사록>을 동시에 체결하였으며, 그 이후의 한 · 미간 군사협력은 모두 이틀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미국은 전후에도 4~6만 명의 주한미군을 유지했고, 한국에 대해 1970년대 까지 수백억 달러의 경제 ·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전쟁 발발시 개입할 것임을 주기적으로 표명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제공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성공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고, 이는 그 후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적으로 재도약을 이룩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조약.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한국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과 1949년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을, 뒤이어 1950년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에 따라 1950년 3월 구체적인 군사원조품목이 정해졌으나, 6·25전쟁 당시 겨우 실현단계에 이르자 이를 거울삼아 실질적 군사동맹인 이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에서 승인되어 비준절차를 거친 다음 11월 17일 비준서가 교환되었고,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정식 발효되었다. 태평양지역의 평화를 위해 집단안보를 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과 본문 6개항의 본조약과 제3조와 관련한 미합중국의 양해사항이 포함된 교환의정서의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을 보면 "본 조약의 당사국은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결의를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조직이 발전할 때까지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본 조약의 주요내용으로는
① 국제적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원칙,
② 무력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사국의 상호협의와 자조와 상호원조 원칙에 대해 규정,
③ 당사국 일방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에 공동의 대처,
④ 주한미군의 한국주둔,
⑤ 비준절차 및 효력발생에 대한 규정,
⑥ 유효기간의 무한정성 명기 등이다.




▶ 1953년 발칸3개국, 조약부속의정서에 조인
▶ 1953년 막사이사이, 필리핀대통령에 당선
▶ 1952년 레바논, 부녀자에 참정권 부여
▶ 1950년 유엔안보리, 한국대표 초청안 가결
▶ 1945년 함흥 학생반공의거
▶ 1932년 제2차 쌍성보전투
▶ 1931년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 수립. 주석에 모택동
▶ 1923년 대전에서 전국형평사대표자대회
▶ 1922년 소련, 코민테른 기념 중앙 라디오 본 방송 개시(소련 라디오방송 정식 개시)
▶ 1921년 이탈리아, 국가파쇼당 창당
▶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발생


▶ 1917년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Rodin, Auguste) 사망

로댕 [Rodin, Auguste, 1840.11.12~1917.11.17]

현대 서양 조각의 문을 연 오귀스트 르네 로댕.
근대 조각은 그를 만나 비로소 전통적 형식주의의 옷을 벗었고 20세기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부여받았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현대 미술사에서 오직 피카소만이 그의 명성과 거장의 면모에 필적할 뿐이다.

화가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며 “신(神)이여! 왜 나는 당신처럼 될 수 없는가”라고 절규했지만 로댕은 스스로를 ‘신의 손’이라고 칭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신을 자처한 천재적 예술가의 오만(傲慢)과 에고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리 로즈 뵈레와 카미유 클로델.

50여년간 내연의 처였으며 한시도 로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외도까지를 인내했던 뵈레. 그녀는 로댕의 무명시절 작업실로 개조한 마구간에서 함께 지내며 삯바느질로 그를 봉양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해 “나를 향해 동물적인 충성심을 지닌 여자”라고 말하곤 했다.

44세의 로댕이 만난 클로델은 갓 스물을 넘기고 있었다. 로댕은 깊고 푸른 눈의 그녀에게 한순간에 빠져든다.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조각가와 모델로, 그리고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나 그들이 함께 한 10년은 벼린 칼날처럼 애증(愛憎)으로 점철된다.

그녀의 자전적 작품 ‘성숙한 시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비극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체로 무릎을 꿇은 채 로댕에게 애원하고 있고 그는 뵈레의 팔에 안겨 끌려가고 있다. 클로델은 로댕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였다.

이후 그녀는 로댕이 영광의 정점을 향해 비상하는 동안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결국 정신착란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치게 되는 클로델.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로댕을 저주했다.

“나는 그에게 영감을 제공해야 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나는 양육(養育)되었다. 그것은 한 여성에 대한 철저한 착취였다. 나는 예술가로서 재능을 도둑맞았다.”




▶ 1915년 월북 사학자 김석형 출생
▶ 191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사망



▶ 1913년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출생 이방인 카뮈




▶ 1911년 국세징수령 공포
▶ 1908년 어업법 반포
▶ 1903년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로렌츠 출생
▶ 1901년 청 이홍장 사망



▶ 1879년 러시아 혁명가 출신이자 구소련 정치인
'레프 트로츠키' 태어남.
볼세비키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일컬어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보통 영어 이름은 '레온 트로츠키'라고 불린다. 초기에는 '멘셰비키'였지만, '볼셰비키'로 전환, 사회주의 '10월혁명'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초대 소비에트연방의 외무부장관을 맡았으며 '붉은군대' 창립자이기도 하다. 레닌이 죽은 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연방을 튼튼한 사회주의국가로 만든 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뒤 소련에서 쫓겨나 멕시코로 이동하게 되는데, 1940년 8월 21일 스탈린이 사주한 것으로 보이는 암살자의 '얼음도끼'로 살해되었다.




▶ 1876년 한글학자 주시경 출생
- 민족정체성 형성과 언어의 상관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한 실천적 국어학자, 주시경




▶ 1867년 마리 퀴리 부인 출생
- 라듐을 발견한 폴란드 태생의 과학자, 마리 퀴리

구 소련에서 1987년 발행한 마리 퀴리 기념 우표(위) 퀴리의 조국 폴란드에서 그녀를 기려 유통되고 있는 지폐(아래)





▶ 1840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로 코발레프스키 출생
▶ 1818년 독일의 동물생리학자 에밀 뒤부아레몽 출생



https://youtu.be/_ZMXJ3dIrhc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