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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28일

✿2002년 11월 28일
국내 첫 액체연료 로켓 발사 성공

국내 첫 액체추진 로켓 ‘KSR-Ⅲ’이 28일 오후
충남 태안반도 앞바다의 한 섬에서 발사돼 하늘로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다. / 과학기술부 제공

항공우주연구원이 중심이 돼 순수 국내 기술로
독자개발한 액체추진과학로켓 KSR-Ⅲ이
2002년 11월 28일 오후 2시52분 충남 서해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 발사장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돼 이날 오후 2시56분에 서해상 목표지점에
추락했다.

우리나라가 독자개발한 KSR-Ⅲ은 길이 14m,
직경 1m, 총중량 6t에 추진력은 13t 수준이었다.

연구비만 5년간 780억원이 투입됐다. KSR-Ⅲ은
과학탐사용 기자재를 탑재한 채 초속 902m로
발사됐으며, 총 231초간 79km를 비행한 후
서해안 어청도 인근에 떨어졌다.

이번 액체추진 로켓개발사업은 과학
기술부 특정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1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780억원의
예산을 투입,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현대모비스·한화 등이 참여했다.

고체연료추진로켓은 일단 연료를 주입
하면 10년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다루기가
편리해 주로 미사일 등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반면, 액체연료추진로켓은 주로 상업용으로 사용된다.

항공우주연구원 최동환 원장은 “독자 개발한
로켓으로 위성을 쏘아올린 국가는
세계에 8∼9개국뿐이며 북한의 로켓기술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3년 정도 앞서 있다”고 말했다.





▶ 2010년 위키리크스 美 국무부 외교
전문(電文) 공개


▶2009년 장미란, 세계역도선수권 4연패




▶2009년 러시아, 테러로 열차 탈선



▶2008년 '존엄사(死) 인정' 국내 첫 판결

존엄사 인정 판결로 인공호흡기 제거 후 6개월 이상 생존한 김모 할머니
'식물인간' 상태로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서 인공 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는 '존엄사'(尊嚴死)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재판장 김천수)는 2008년 11월 28일 지난 8개월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김모(여·76)씨의 자녀들이 한 대학병원을 상대로 "어머니의 평소 뜻에 따라 자연스러운 사망을 위해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병원은 김씨에게 부착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환자의 치료 중단 의사는 환자가 치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듣고 난 뒤 명시적으로 표시해야 하지만, 의식불명인 경우에는 의식이 있을 당시 현재 자신의 상태라면 어떤 의사를 표시했을 것인지를 추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와 관련, 김씨가 3년 전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임종을 맞게 될 무렵 생명을 며칠 더 연장할 수 있는 기관절개술을 거부했고, 가족들에게 '내가 소생하기 힘들 때 인공호흡기는 끼우지 마라. 기계로 연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가족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씨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판결은 적극적 안락사 및 모든 유형의 치료 중단에 관한 것이 아니고, 치료가 무의미하고 환자에게 치료 중단 의사가 있다고 보이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근거한 인공호흡기 제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환자가 의학적으로 소생 불가능하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며,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환자 본인의 의사(意思)가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재판부의 판결에 따라 병원측은 가족과의 합의로 김모 할머니에게 2009년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인공 영양·수액 공급만 실시했다. 그러나 인공호흡기를 뗀 후 자발 호흡으로 201일을 생존하여 신부전증·폐부종·다발성 장기(臟器)부전으로 2010년 1월 10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에 '어디까지를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볼 것인가'라는 새로운 논란이 제기되었다.



▶2000년 네덜란드 하원, 세계최초로
안락사 합법화 법안 의결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가 죽음 이외에는 고통을 이겨 낼 방법이 없을 경우에 목숨을 끊어 주는 ‘안락사’. 안락사는 무의미한 고통을 덜어 주는 자비일까, 아니면 생명에 대한 모독일까?

2000년 오늘, 네덜란드 하원은 세계 최초로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계적으로 스위스·콜롬비아·벨기에가 안락사를 묵인하고 있지만 법으로 이를 공식 허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법안은 안락사 허용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달았다. 즉, 대상자가 불치의 환자여야 하고, 고통이 견딜수 없을 만큼 심하며, 환자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안락사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이 법안 제정 이전에도 판례를 통해 엄격한 요건 하에 안락사를 허용해 온, 안락사에 관해 가장 관용적인 나라였다. 네덜란드에서는 1996년 이후 이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이미 2,500여 건의 안락사가 있었다.

따라서 이 법안의 통과는 그동안 묵인돼 온 안락사를 사실상 합법화한 것이다. 안락사는 격렬한 찬반론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옹호론자들은 인간 생명의 신성함과 함께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계 등 반대론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된다는 입장이어서 양측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안락사 논쟁은 올해 미국의 시아보 사건으로 다시 한번 큰 논란을 빚었다.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오던 테리 시아보라는 여인의 인공생명 유지 장치 제거 여부로 대통령과 의회까지 가세해 정치적 공방전까지 벌이는 등 전 미국인이 이 문제를 놓고 둘로 갈라진 것이다.




▶1999년 한-중-일 정상 사상 첫3자회담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
▶1999년 우루과이 대통령에 호르헤
바트예 당선
▶1996년 소설가 김정한 사망


▶1995년 한글윈도95 시판개시

학생들이 진열대에 나온 `한글윈도우95`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1993년 온두라스 대통령선거 실시,
자유당의 카를로스 로베르토 레이나
당선


▶ 1989년 오늘, 체조 부분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아 세계 체조 팬들을 놀라게 했던 루마니아의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Nadia Elena Comăneci)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1961년 11월 12일에 오네슈티에서 태어난 코마네치는 여섯 살 때 카롤리 코치의 눈에 띄어 ‘카롤리 체조연구원’에 입문한 뒤 하루 4~5시간의 훈련과 음식조절을 해가며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루마니아 전국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코마네치가 처음 참가한 국제 경기는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였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6년, 14살의 어린 나이로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했다. 코마네치는 이단평행봉 연기로 10점 만점을 받았다. 이때 해프닝이 발생했다. 10점 만점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만들어진 체조종목 컴퓨터가 10점 만점을 1.0점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점수판은 9.9점까지 표시가 가능했다. 이때문에 심판들이 10.0점을 입력하자 1.0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려 일곱차례나 10점 만점연기를 펼치며 개인종합·평균대·이단평행봉 등 세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일약 세계 스타로, 조국의 영웅으로 부상한 코마네치는 이후에도 1980년 올림픽에 참가했으며, 1984년 2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스포츠 광장에서 은퇴했다. 그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경기대회에는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한 가운데 루마니아 코치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루마니아 혁명이 발발하기 몇 주전인 1989년 오늘 (11월 28일) 사랑과 자유를 찾아 헝가리로 망명, 이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다. 2001년에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다. 망명 후에는 방황하다가 체조 지도자로 거듭 나기도 했다.

당시 그녀의 사생활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특히 코마네치는 철혈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아들 니쿠의 성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호색한으로 알려진 니쿠는 권력을 등에 업고 코마네치를 수차례 강간했다는 것이다.

1989년 10월 26일 루마니아의 집을 떠난 코마네치는 진흙길과 광활한 산림지역, 얼어붙은 강을 건너며 우여곡절 끝에 헝가리국경수비대에 극적으로 발견, 1달여만에 헝가리를 거쳐 미국망명에 성공했다. 이후 코마네치는 그녀의 루마니아 탈출의 이유이기도 했던 연인 콘스탄틴 페니트와 결혼했다.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디아 코마네치는 2008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체조 선수들을 특별 지도하기도 했다




▶1986년 남극조약 가입

  남극조약[ 南極條約, Antarctic Treaty ]

  남극지역의 영유권에 관하여 195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12개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1908년 영국이 남극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이 지역의 영유권문제가 표면화됨으로써 조약 체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남극(the Antarctic)이란, 남극대륙(Antarctica)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남극해(the Southern Ocean)로 정의되며, 1819년에 발견되었다. 남극은 이전까지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 뉴질랜드, 칠레, 아르헨티나와 포경어업 관련 산업이 활발했던 영국, 노르웨이, 프랑스 등 7개국에 의해 영유권이 주장되어 왔었다. 따라서 미국, 러시아 등 영유권 주장 유보국들은 지속적인 남극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 남극을 관리하는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미국의 요청에 의해 1959년 12월 1일 12개국(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칠레, 프랑스, 일본,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소련, 영국, 미국)이 워싱턴에 모여 역사적인 남극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모두 14개 조문으로 구성된 남극조약은 남위 60˚ 이남 지역의 평화적 이용과 과학연구의 완전한 자유보장을 명시하고, 남극에 대한 기존의 영토권 주장을 유예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남극조약은 1961년 6월 23일 비준됐으며 전문과 14개 조항으로 이뤄졌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남극의 군사사용 금지, 평화사용만 허용하고(1조), 과학조사의 자유 보장(2조), 과학조사를 위한 국제협력 증진을 위해 조사계획에 관한 정보와 과학자와 조사 결과 서로 교환(3조), 영유권 주장 동결(4조), 핵실험, 방사능유출, 발암물 처분 금지(5조), 협약적용범위 남위 60˚의 남쪽지역의 함(6조), 조약 가입은 유엔회원국이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남극조약협의당사국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13조). 2012년 현재 남극조약국은 총 50개국에 달한다.

  조약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12개 원초서명국과 과학기지 설치 등을 통해 실질적인 남극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들이 가지고 있다. 이들 국가를 남극조약 협의당사국(ATCP : Antarctic treaty consultative party)이라 지칭하며, 이들 국가들만이 매년 개최되는 남극조약 협의당사국회의(일명 남극조약회의)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남극조약협의당사국이 되면 당사국 회의에서 의견을 제안하고 각종 사안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 남극조약협의당사국은 2012년 현재 총 28개국이다.

  우리나라는 1978년부터 남극 연구를 시작했으며 1986년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하였다. 이후 1986년 남극조약협의당사국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했으며, 1988년 2월 남극의 킹조지섬에 세종기지를 완공함으로써 세계에서 18번째로 과학기지를 건설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남극에 관한 과학적 연구수행과 국제사회에의 기여를 인정받아 1989년 10월 18일 ATCP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후 제19차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를 1995년 5월 8일부터 19일까지 서울에서 개최한 바 있다.
​세종기지 전경




▶1986년 담배가게 아가씨 / 송창식

▶1985년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 사망
▶1983년 문교부, 로마자표기법
개정안 확정
▶1980년 내무부, 도서지방 낙도
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80년 문공부, 정기간행물 66종
등록 취소
▶1980년 한·일 해저케이블 개통
▶1969년 한국축구대표팀,
제2회 킹스컵 축구대회 우승
▶1966년 부룬디왕국에 쿠데타 왕정
전복. 수상이 정권 장악
▶1966년 동아일보 백광남특파원,
월남전서 순직
▶1962년 라오스 연립정부, 좌우
중립군을 단위국방군으로 통합 발표
▶1961년 유엔총회, 남아연방의 인종
차별 비난안을 채택
▶1960년 모리타니,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8년 메디칼센터 개
▶1958년 중앙의료원 개원



▶1956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체결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체결
1956년 오늘!
한국과 미국은 서울 중앙청 회의실에 한미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양측 대표는 국문과 영문으로 된 두 종류의 문서에 서명 날인했다.
조정환 외무부장관 서리는 인삿말에서 '조약도 중요하지만 도의적인 우정을 더 한층 강화해나가자'고 말했다.
이 조약은 구한말인 1882년 제물포에서 한미 사이에 통상조약이 맺어진 지 74년만에 다시 체결됐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미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20세기 초 35년 이상의 단절이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관계의 시작은 제2차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에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다만 소위 “에치슨 라인”에서 보듯이 냉전 초기 한반도는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경제적 가치가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시각이 바뀐 것은 한국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미국인들은 한반도가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미국의 중요한 요충지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서명되고, 1954년에 비준, 발효됨으로써 미군의 한국주둔을 위한 제도적 장치 및 연합방위체제의 근간이 마련되었다.
   또한 오늘의 한미 FTA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조약이 몇 년 후 체결되었다. 바로 1956년 11월 28일 한미양국이 서울 중앙청 회의실에서 서명한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이 그것이다. 당시 조정환 외무장관 서리는 “조약도 중요하지만 도의적인 우정을 더 한층 강화해 나가자”고 말했는데, 이는 19세기말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미국의 도덕적인 의무 불이행으로 체결된 지 20여년 만에 휴지조각이 되었음을 아쉬워하는 발언이었다고 보여진다.
   조약은 전문과 25개 조항, 그리고 의정서로 구성되었으며, 평화 및 우의를 강화하고, 상호 유익한 투자 및 통상, 경제, 문화관계 촉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양국간의 통상 ·거주 ·항해 등에 관하여 서로 최혜국민(最惠國民) 대우 및 내국민 대우를 부여하기로 규정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사망

   페르미 [Fermi, Enrico, 1901.9.29~1954.11.28]

   1954년 11월28일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53세로 작고했다.
   페르미는 흔히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부의 맨해튼 계획(원자폭탄 제조계획)에참가했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물리학자들은 페르미 외에도 많았고 그 계획이 여러 선행 연구에 바탕을 두고 수립됐으므로, 페르미를 원자폭탄의 ‘발명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페르미가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페르미가 조국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를 힘들어 하지 않았다면,그래서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하지않았다면, 원자폭탄의 등장은 다소 늦춰지거나 유럽에서 먼저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페르미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안긴 업적은 인공방사능 연구였다. 1930년대초에 인공방사능을 처음 만든 사람은 졸리오-퀴리(마리 퀴리 부부의 사위)였지만, 그 뒤 중성자 충격을 통해 50종에 가까운 인공방사능을 만들어보인 사람은 페르미다.
   인공방사능이 처음 발견될 무렵 페르미는 그 이론적 바탕이 될 베타붕괴(불안정한 원자핵이 전자나 양전자를 방출하고 다른 핵종으로 변환하는 현상) 이론을 내놓은 상태였다.
   그는 또 미국으로 망명한 뒤인 1942년 시카고 대학 야금연구소에서 자신이설계한 원자로 CP-1을 통해 우라늄 핵분열 연쇄 반응 실험에 성공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통제된 핵에너지 방출을 뜻했다. 미국 정부와 군부가 페르미에게 눈길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르미는 로마 출신이다. 1926년부터 미국에 망명하기 전까지 로마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가르쳤다. 기억력이 뛰어나 나이가 든 뒤에도 단테의‘신곡’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1943년 루스벨트-처칠, 카이로회담
직후 테헤란에서 스탈린과 회담
▶1941년 임시정부, 워싱턴에
구미외교위원회 설치. 위원장 이승만


▶1941년 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 강령 발표

공포한 임시정부의 정강정책. 민족독립을 앞두고 건국원칙 방침을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44년의 제5차 개정임시약헌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구성은 1장 총강(1~7항), 2장 복국(復國)(1~8항), 3장 건국(1~7항)의 22개항으로 되어 있다.

1장 총강에서는 ①민족공동체로서의 한국 ②삼균제도의 역사적 근거 ③토지국유제의 전통 ④주권상실 당시 순국선열들의 유지(遺志) ⑤혁명으로서의 3·1운동과 이를 계승한 민주제도 건립으로서의 임시 정부 ⑥삼균제도의 발양확대 ⑦혁명적 삼균제도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均治)의 동시 실시의 7개항으로, 삼균주의가 고유의 건국정신임을 주장했다.

2장에서는 복국의 단계를 3기로 나누어 ①제1기, 독립을 선포하고 기타 법규를 반포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계속하는 과정 ②제2기,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이 국내에 들어가는 과정 ③제3기, 국토·인민·교육·문화 등을 완전히 되찾고 각국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이라 하였다.

3장에서는 건국의 단계를 역시 3기로 나누어 토지와 주요산업의 국유화, 무상의무교육 실시 등 삼균제도를 실시하는 과정을 구체화했다. 이로써 건국강령은 민주공화국 정체와 토지·주요산업 국유화를 혼합한 일종의 민주사회주의체제를 표방했다. 그러나 해방 후 정치과정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약화됨에 따라, 건국강령과 그 기초가 된 삼균주의 역시 주목받지 못하게 되었다.




▶1934년 진단학회, 진단학보 발간

진단학회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던 두계 이병도 선생.

1934년 5월 7일 오후 5시, 서울 소공동 코라다느 다방에 20여명의 한국인 학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국과 인근 지역의 문화를 연구할 목적으로 탄생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총회였다. 진(震)은 중국의 동쪽, 단(檀)은 단군을 뜻하므로 '진단'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식민주의 사관을 전제로 한국사 연구를 주도하고 있어 우리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할 필요성이 절실한 때였다. 이병도ㆍ손진태ㆍ조윤제ㆍ이희승 등 당시의 대표적인 국학자 24명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연구성과를 담은 ‘진단학보’ 창간호는 그해 11월 28일에 발간됐다. 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은 이병도가 맡았고 한성도서(주)가 발간을 도왔으나 2호부터는 회원들 스스로가 자금을 조달했다. 이병도는 집을 저당잡혀 비용을 마련했고 윤치호ㆍ김성수 등은 찬조금으로 지원했다. 이후 해외의 각 학회와 학술잡지를 교환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인 이윤재ㆍ이희승 등이 구속되는 바람에 활동을 마감해야 했다. 진단학보도 14호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해방 후 속간된 진단학회는 미국 록펠러재단의 도움으로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사' 전 7권을 완간했다. '한국사'는 한국 실증사학이 이룩한 연구성과의 총결산이었으며 이후 한구의 역사학은 이 '한국사'를 계승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1930년 당인리발전소 준공




▶1925년 이상재, 태평양문제연구회조직
▶1919년 대한애국부인회 간부23명검거
▶1917년 파리에서 연합군대표회의



▶1916년 독일, 최초로 런던 공습




▶1910년 하와이 거주 이내수,
본국 최사라 여인과 최초의 사진 혼인


▶ 1891년 오늘,'농구' 탄생!
북한의 김정은이 집권 초기 한때에 미국의 프로 농구에서 과거에 기괴한 행동으로 유명했던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이라는 전직 농구선수를 북한으로 초청해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학교 다닐 때 농구를 좋아했던 것에 향수를 느껴 그런 희극을 연출했던 모양이다. 농구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어떤 점이 있나 보다.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는 김정은이 미국의 망나니 농구선수를 북한으로 불러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농구’라고 하면 역시 미국이 본고장이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 중의 하나가 농구라는 스포츠이다. 농구는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의 대중 스포츠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전 세계로 전파되어 거의 모든 나라가 농구를 즐긴다.

농구는 보스턴 지역에서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891년 미국의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라는 곳에서 YMCA 체육학교에 근무하던 캐나다 사람인 제임스 네이스미스(James Naismith)라는 선생이 농구를 창안했다. 겨울이 긴 북부지방에서는 겨울에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겨울에 적합한 스포츠를 찾던 중 실내에서 아이들이 바구니를 달아 놓고 놀이를 하던 것을 보고 네이스미스가 농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농구를 영어로 배스킷볼(Basketball)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구니에 공을 넣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말 ‘농구’도 ‘바구니’라는 뜻이 들어 있는 말이다. 참고로 중국어로는 바구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남구’라고 표현하고, 일본에서는 ‘Basketball’을 그대로 음역하여 ‘바스켓도볼’이라고 부른다.

네이스미스가 창안한 최초의 농구는 양쪽 팀에 아홉 명씩 하던 방식이었으며 실제로 복숭아 바구니를 실내 벽 높은 곳에 달아 놓고 그 바구니에 정해진 시간에 많이 넣은 팀이 이기는 경기였다. 바구니를 아주 높은 곳에 달아 놓았기 때문에 점수가 현재 농구처럼 대량 득점이 가능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이 바구니에 들어가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꺼내어 다시 경기를 속개하는 방식이어서 경기의 맥이 끊이는 일이 잦았다. 점차 바구니를 개량하고, 바구니 밑에 구멍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나타났으며, 링에 그물을 매다는 아이디어로 발전하였다.

농구가 YMCA 중심으로 창안되었고, 주로 실내에서 운동을 주로 하는 YMCA의 특성상 농구 경기는 자연스럽게 YMCA의 간판 스포츠였다. 전국적인 YMCA 조직에 의해 농구가 퍼지기 시작했으며 농구의 규칙도 점점 개량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편, 농구가 유대인 사회에 의해 널리 퍼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대인 사회는 모여 옥외 스포츠보다는 실내 스포츠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실내에서도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젊은이들에게 어필하여 많은 유대인 청소년들이 열광적으로 즐겼다. 그래서 지금도 농구계에는 유대인들의 입김이 강하다.
1898년에는 미국에 벌써 프로 농구가 생길 정도로 농구는 미국에서 급속히 확산하였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농구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올림픽 경기가 농구가 널리 퍼지는 데에 기여했다. 1903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 시범경기로 채택될 정도로 농구가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여자 농구도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었다.

초창기에는 주로 백인들이 농구를 즐겼지만, 점차 흑인들이 농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좁은 공간에서도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농구의 특성 때문이다. 흑인들이 모여 사는 곳은 대개 넓은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도심의 골목 같은 곳이기 때문에 이런 협소한 곳에서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는 농구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흑인들에게는 농구가 가난을 벗어나 갑자기 상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탈출구 역할을 하였으며 프로농구에서 흑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주로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농구가 사람들의 체력 보강과 건강 증진에 크게 이바지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하겠다.




▶1895년 춘생문사건 발생
▶1859년 미국 최초의 단편 소설작가
워싱턴 어빙 사망
▶1829년 러시아 작곡가 루빈스타인
출생(구력-11.16)
▶1820년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엥겔스 출생



▶ 1660년 오늘,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영국 런런에 본부를 둔 지리학회로 1830년 런던지리학회로 설립되었으나 1859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왕립지리학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00여개 나라 14,0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리학 연구와 교육 등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구분지리학협회설립일1830년설립목적지리과학의 발전주요활동/업무지리학 강연과 회의 개최소재지영국 런던규모회원 1만 4000여명.

다른 학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학문적 토론을 나누는 만찬 클럽(dining club)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827년 설립된 랄레이 클럽(The Raleigh Club)이 모태가 되었다. 설립 당시의 명칭은 런던지리학회(Geographical Society of London)였지만, 1788년에 설립된 아프리카내륙발견협회(Association for Promoting the Discovery of the Interior Parts of Africa)를 흡수하고 윌리엄 4세(William IV, 1765~1837)의 후원을 받으며 점차 왕립지리학회라는 명칭으로 알려졌고, 1859년에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에게 공식 허가장(Royal charter)을 받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1933년에 일부 회원들이 학회를 탈퇴해 영국지리학자협회(Institute of British Geographers, IGS)를 구성하기도 했지만, 1995년 이들과 재통합하여 ‘새로운 왕립지리학회(the new Royal Geographical Society, RGS)’가 출범하였다.

무역 발달과 원양 항해가 본격화한 15세기 이후 새롭게 발견되는 지역을 지도로 나타내기 위해 지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대의 야심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내륙 등의 지역에 대한 탐사에 나서면서 곳곳에 지리학회들이 만들어져 1885년에는 100여개의 지리학회들이 생겼다. 각 나라마다 설립된 이들 지리학회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탐험을 직접 조직하거나 후원하고, 탐험으로 얻어진 자료를 지도화하고 연감 형식으로 출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지리학의 발달에는 학문적 탐구욕과 함께 식민지 개발과 확보라는 정치적인 동기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영국의 왕립지리학회는 1821년 설립된 파리지리학회(Paris Geographical Society)와 1828년의 베를린지리학회(Berlin Geographical Society) 다음으로 역사가 깊다. 그리고 19세기에 수많은 탐험가들의 탐험을 직접 조직하거나 후원하여 지리학에 대한 관심과 지리적 인식의 발달을 이끌었다. 영국은 1788년에 아프리카내륙발견협회(Association for Promoting the Discovery of the Interior Parts of Africa)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대륙 내부에 탐험가를 들여보내기 시작해 1795년 파크(Mungo Park, 1771~1806)가 니제르(Niger)강 탐험을 시작하였고, 1821년 데넘(Dixon Denham, 1786~1828)과 클래퍼턴(Hugh Clapperton, 1788~1827) 등은 차드(Chad) 호 연안에 도달하였다. 왕립지리학회는 설립 이후 아프리카내륙발견협회를 흡수하여 버턴(Richard FrancisBurton, 1821~1890)과 스피크(John Hanning Speke, 1827~1864), 그랜트(James Augustus Grant, 1827~1892),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 톰슨(Joseph Thomson, 1858~1895) 등의 아프리카 탐험을 지원하고 조직하였다. 그리고 헤이워드(George W. Hayward, 1840?~1870)의 중앙아시아 탐험과 프랭클린(John Franklin, 1786~1847)의 북극 탐험,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과 톰슨(Charles Wyville Thomson, 1830~1882)의 해양탐사 등도 지원하였다. 20세기에는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과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의 남극 탐험, 힐러리(Edmund Percival Hillary, 1919~)의 에베레스트(Everest) 등정(登頂) 등을 지원하였다.
<본의야 어쨌든,'제국주의 세계정복'에 가장 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왕립지리학회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지리학회 가운데 하나이다. 100여개 나라의 1400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마다 15만명의 사람들이 지리학 연구, 교육, 훈련 등과 관련된 학회 행사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영국 런런(London)의 켄싱턴(Kensington)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3년 임기의 25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이사회(Council)가 학회의 운영과 관리를 책임진다. 그리고 재정, 교육, 현장탐사, 정보지원, 연구 등 5개 부문에 자문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등의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학회지에서 대중적인 사진집까지 지리학과 관련된 서적들을 폭넓게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1839년부터 지리학 연구와 탐사, 교육 활동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인물들에게 창립메달(Founder’s Medal)과 후원메달(Patron’s medal)로 불리는 두 개의 메달을 수상하고 있는데, 이 메달을 수상하는 것은 세계에서 매우 큰 명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520년 마젤란, 태평양 발견

1810년에 제작된 작자미상의
마젤란 판화(미 국회도서관 소장).



https://youtu.be/JWnVUxnHO8I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