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년 12월 3일
이만희 감독, 영화 ‘만추’ 개봉

김지헌이 쓰고 이만희가 연출한 영화 ‘만추’.
이만희(1931~1975)는
196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달인이자 충무로의 보헤미안이었다.
15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양산하면서도
작품마다 자기 색깔을 놓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감독이었다.
이만희가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은 첫 영화는 1962년 8월 9일 개봉한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의 이 영화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상업성까지 인정받았다.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끌어올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1963년 4월 1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워 영화계를 놀라게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국 전쟁영화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의 기쁨도 잠시뿐,
이듬해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편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964년 12월 18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게 잡힌 국군 간호장교
포로 7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북한군이 국군보다 더 좋은 옷차림을
하고 있고 또 국군이 바보스럽게 묘사
되어 북한이 더 우월한 체제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구속영장은 기각되고 필름에
대해서만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나서 이만희의
구속을 주도하는 바람에 이만희는 결국
1965년 2월 5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이만희는 재판 중에도 ‘7인의 여포로’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고 보충 촬영을
통해 재편집한 뒤 ‘돌아온 여군’으로
제목을 바꿔 1965년 8월 27일 개봉했다.
그러나 당국의 검열로 이미 누더기
가 된 영화의 흥행 결과는 참혹했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수그러들 이만희가 아니었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사를 빛낸
주옥 같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만추’
를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한 것이다
3일 동안의 특별휴가를 얻어 어머니 성묘
를 가는 살인 복역수 문정숙과 위폐범으로
지명수배 되어 쫓기는 신성일 두 사람이
펼치는 인생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사랑을
그린 ‘만추’는 촬영과 녹음이 보름만에
완성되고 출연진이라야 신성일과 문정숙
두 사람이 사실상 전부였는데도 2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이만희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만추’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베를린 영화제에도 출품되고 몇 편의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다.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
(김지미 주연), 1982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김혜자 주연), 2011년 김태용
감독의 ‘만추’(현빈·탕웨이 주연)로
국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리메이크되었
으며 일본에서도 1972년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5에 올랐다.
‘만추’는 이처럼 한국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걸작으로 꼽히지만 원판 필름
은 물론 지방 상영을 위해 복사한 필름도,
외국에 수출한 필름도 사라지고 없어
한국 영화계의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 2016년 오늘
대한민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발의됨.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선고기일을 열고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렸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이날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확정했다.
이는 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의 결정으로, 헌재가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인용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다.
■ 헌재의 탄핵 판결 주요 내용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에서 박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날 오전 11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사건번호 2016헌나1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개시 선언과 함께 시작된 선고 재판은 오전 11시 20분께 만장일치 파면이라는 ‘주문 낭독’으로 마무리됐다.
헌재는 ‘비선실세’ 최서원(최순실)의 이권 및 특혜 지원과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강제 모금 등을 둘러싼 대통령직 권한남용, 청와대 기밀 자료 유출 등이 헌법 및 국가공무원법, 공직자윤리법 등의 실정법을 위배했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행위가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하다고 밝혔다.
헌재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해야 하고, 공무 수행은 투명하게 공개해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대통령은 최순실의 국정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은 미르·케이스포츠 설립, 플레이그라운드, 케이디코퍼레이션 지원 등 최순실의 사익 추구를 위해 지원했고, 헌법·법률 위배 행위는 재임 기간 중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인정했다. 또 검찰과 특검 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 압수수색마저 거부하는 등 박 대통령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이에 “박 대통령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로 봐야 한다.”며 “박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밝혔다.
다만 헌재는 ▷문체부 공무원 임면권 남용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 사장 해임 압력과 관련된 언론의 자유 침해 등은 사실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생명권 보호의무 및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 위반도 파면의 근거로 판단하지 않았다. 헌재는 “대통령은 헌법상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면서도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추상적 의무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점은 어렵다.”고 판시했다. 다만 김이수·이진성 재판관은 보충의견으로 세월호 사고에 따른 박 대통령의 대응에 대해 파면 사유에 해당되진 않지만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 안창호 재판관은 “이번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파면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보충 의견을 냈다. 한편, 헌재의 파면 결정은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주문을 읽은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즉시 효력이 발생했다.
■ 헌재의 탄핵 인용에 이르기까지
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서 헌재의 판결 일정이 시작됐다. 국회가 헌재에 탄핵소추의결서를 접수하자 헌재는 12월 11일 강일원 재판관을 주심으로 지정, 본격 심리에 나섰다. 헌재는 매일 전체 재판관 회의를 열었으며, 12월 22일부터는 변론 절차를 진행했다. 헌재는 3회에 걸쳐 준비기일을 열고 사건의 쟁점과 향후 일정을 정리했다. 이에 따라 국회가 낸 13개의 탄핵 사유를 ▷비선조직 국정농단에 따른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 위반 ▷대통령 권한 남용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 ▷뇌물 수수 등 형사법 위반 ▷언론자유 침해 등 5가지로 정리하고 본격 심리를 진행했다.
그러나 재판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박한철 헌재소장은 1월 25일 자신이 참여하는 마지막 변론에서 “(이정미 재판관 퇴임일인) 3월 13일 이전에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후 박한철 헌재소장의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종료되면서 헌재는 8인 체제가 됐고, 이정미 재판관이 소장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이후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증인을 무더기로 신청하는 등 지연 전략을 폈고, 이에 최종변론기일 지정 날짜가 2월 24일에서 27일로 미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헌재는 3월 8일, 탄핵심판 선고일을 3월 10일 오전 11시에 진행한다고 확정 발표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2016년 12월 9일부터 3월 10일 선고일까지 92일간, 결정 선고일을 포함하면 21번의 재판을 진행했다. 탄핵심판 법정에 선 증인은 25명으로 헌재가 맡은 사건 중 최다 기록이었으며, 36명(국회 측 16명·대통령 측 20명)에 달하는 대리인단 규모도 헌재가 맡은 사건 중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 박 전 대통령, 청와대 퇴거해 삼성동 사저 복귀
헌법재판소가 3월 10일 대통령직에 대한 파면을 결정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 이틀째인 3월 12일 오후 7시 16분 청와대에서 나와 7시 37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복귀했다. 사저에 도착한 박 전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민경욱 국회의원을 통해 “제게 주어진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다. 저를 믿고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편, 헌재의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정으로 박 전 대통령은 경호·경비를 제외하고 통상 퇴직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연금, 비서관·운전기사 지원, 교통통신 및 사무실 제공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다만 대통령경호법은 현직 대통령이 임기 만료 전에 퇴임할 경우 경호 기간을 5년으로 정하고 있는데 필요하면 5년을 더 연장할 수 있다. 아울러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5년간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으며, 현직 대통령에게 보장된 형사상 불소추 특권도 없어진다.
https://youtu.be/IrjQl8aLY7s

▶ 2010년 '창고극장' 설립,
원로 연극인 이원경씨 별세


▶2010년 생태학 연구의 선구자
김준민 교수 별세
▶2009년 포천 국방과학연구소 폭발 사고
▶2009년 케이블TV 컴캐스트, NBC 인수
▶2008년 태국 시위대, 농성 해제
▶2000년 한국 천주교,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 발표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모습
▶1998년 국내, B형간염 치료제
`헤파가드` 개발

1998년 12월 3일 경북대 의대 정태호
박사가 새로운 B형간염 치료제 `헤파가드`
개발을 정식 보고하고 있다.
▶1997년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총550억 달러의 긴급자금지원에 합의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 오후 7시40분 합의서 서명
https://youtu.be/XmPiH3nE15c

▶1997년 대인지뢰 금지협약 서명
[오타와 협약 -캐나다 정부가 주창]서명.


▶1995년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
군 형법상,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소수이탈, 상관살해 및 미수, 초병살해 등 6개 혐의로 고향인
합천에서 검거돼 안양교도소에 수감.

1995년 12월 3일 오전 6시 34분, 전두환 전 대통령(가운데)이 경남 합천 종가에서 구속, 압송되고 있다.


▶1992년 유엔안보리, 소말리아
군사개입결의안 채택

소말리아로 떠나는 대한민국 상록수
부대원들의 모습.
▶ 1992년 오늘-세마그룹 소프트웨어 설계자 닐 팹워스에 의해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서비스(SMS)가 탄생함.


▶1991년 일본 중의원, 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안 가결
▶1990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에르샤드 사임
▶1987년 중부고속도로 개통

중부고속도로
▶1985년 10차 남북적십자본회담
서울개최
▶1984년 인도 보팔시 유독가스 유출
대참사 발생
▶1983년 부산 다대포 앞바다
무장간첩선 격침
▶1983년 백악관 콘크리트방벽 설치
▶1981년 시스케이국 독립
▶1981년교대와 국립사대 통합발표
▶1980년 부산대. 동래서 가야시대의
금동관 발굴
▶1978년 캄보디아의 반(反) 폴 포트세력
이 캄보디아 구국민족통일전선을 결성
▶1973년 파이오니어
10호 최초로 목성 탐사
▶1970년 북한 박성구 소좌.
미그15기 몰고 귀순

▶1967년 남아공 버나드 박사.
세계최초로 심장이식수술 성공

세계최초의 심장이식수술을 받은 후
약2주일이 경과한 후의 워쉬칸스키

버나드 박사, 세계최초로 심장이식수술 성공
1967년 12월3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과의사 크리스티안 바너드가 케이프타운의 흐로테 스후르 병원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을 시행했다. 바너드는 교통사고로 숨진 20대 여성의 심장을 심부전으로 죽음을앞두고 있던 55세의 루이 와샨스키에게 옮겨 심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와샨스키는 18일 뒤 폐렴으로 사망했다. 면역 체계가 파괴돼 와샨스키의 몸이 폐렴과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모험적인 수술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자 바너드는 이렇게 대꾸했다. “환자는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당신이 사자에게 쫓기고 있다면, 악어가살고 있다는 이유로 강에 뛰어들지 않겠는가?”아무튼 바너드의 심장이식 수술 성공은 외과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보다 2주 뒤에는 뉴욕의 외과의사 에이드리언 캔트로위츠도 이 수술을시도했으나 환자가 깨어나지 못했다. 미국에서 심장이식 수술에 처음으로성공한 사람은 이듬해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시술한 덴턴 쿨리였다. 한국에서는 1992년 울산의대 흉부외과의 송명근 교수가 처음으로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다른 사람의 심장을 환자에게 옮겨 심는다는 아이디어는 20세기 초부터 프랑스 외과의사 알렉시스 카렐을 포함한 몇몇 의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러나 체외순환법이 개발된 1950년대까지는 제공받을 심장의 순화 유지나 보존에 어려움이 많아 초일류 외과의사들도 감히 이 수술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너드의 성공 이후 허혈성심질환(虛血性心疾患)이나 심근경색증 등의 말기 환자들이 이 수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됐지만, 요즘도 생존율이 수술 첫 해에 50% 정도로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뇌사 상태에 있는 공여자(donor)와 수용자(recipient) 사이에 민감한 생명윤리적ㆍ법적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1964년 남산 자유센터 개관

▶1962년 쿠바의 소련폭격기들 철수 개시
▶1961년 미국 네바다 사막서 지하
핵실험
▶1960년 일본-영국 문화협정 조인
▶1959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유럽-아시아 방문 등정
▶1956년 영국-프랑스,
이집트로 부터 즉시 철수 발표
▶1952년 유엔총회. 한국전포로
중립지대 인도안 가결
▶1948년 상해부근에서 피난민들이
탄 배가 폭발침몰. 3천9백20명 사망
▶1946년 미국-영국 군사동맹 체결
▶1943년 미국-영국-소련 3거두 테헤란선언

카이로회담, 테헤란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포츠담선언.
카이로회담은 대한시대(1897- )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43년 11월 22일 - 26일 개최한 1차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 영국 국무총리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했다. 또한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대한국(1897- )의 독립 보장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11월 27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 성명이었다. 카이로회담의 주요 내용은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다.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나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동북·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모든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구축(驅逐) 등이다.
또한 대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대한국 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대한국을 자유독립 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대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 이상의 내용들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1차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 처칠과 루스벨트는 요시프 스탈린과 테헤란 회담을 위해 이란으로 갔다가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 2차 카이로 회담(1943. 12. 2 - 7)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터키의 이뇌뉘 대통령을 설득해 터키를 연합국 측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아이젠하워 장군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으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테헤란회담은 대한시대(1897- )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43년 11월 28일 - 12. 1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사이에 열린 회담이며 주요 토의사항은 유럽에 2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스탈린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여 앞으로 있게 될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대한 침공과 보조를 맞추기로 약속했다. 군사적 문제가 토의의 주된 과제로 오르기는 했으나 연합국 수뇌들 간에 벌어진 그 이전의 어떤 회담에서보다도 정치 분야에 대한 논의가 더 많이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과 1940년의 러시아-핀란드 조약에 의해 소련이 획득한 지역을 전후에도 계속 보유해야 한다는 희망을 거듭 피력했으며 발트 해 연안의 동프로이센도 소련의 영토에 추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독일에 대해서는 그 해결을 놓고 오랫동안 논의가 벌어졌으나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의 연합국 수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후의 국제조직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스탈린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해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계속 밝혔다. 또한 연합군이 부분 점령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서는 전후 분할 점령을 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하여 독립시키는 동시에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는 데 합의하여 1943년 12월 1일 공식 선언문을 발표했다.
얄타회담은 대한시대(1897- )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연합국의 지도자들인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인민위원이 나치 독일의 최종 패배와 점령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개최한 회담이다. 독일에 관해서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채택하고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한다고 선언했으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해 위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다른 패전국이나 해방국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얄타 회담은 "해당 지역의 모든 민주 세력을 폭넓게 대표하는 인사들에 의한 임시적인 정부 조직을 구성할 것과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자유 선거를 통해 인민의 의지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수립할 것"을 합의했으며, 스탈린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루블린 소재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승인하고 있었다. 서방 연합국과 소련 중 아무도 자국이 지지하는 폴란드인 단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폴란드의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며 자유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고 폴란드 국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극동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는데 그 것은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해야 하며 그 대가로 연합국은 소련에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는 데 동의했다. 국제연합(UN) 헌장의 초안이 이미 작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얄타 회담 참석자들은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했다. 소련의 16개 공화국 모두가 UN 총회에서 회원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했다.
1946년에 공표된 얄타 협정은 미국에서 특히 폴란드·독일·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국무부의 친소집단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비난과 함께 그가 회담 당시 병에 걸려 무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후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그 것 역시 얄타회담의 결과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역사가의 조사와 회담 참석자들의 증언 결과 이런 비난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을 신뢰했으며 그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었다. 스탈린이 유럽의 모든 인민전선 정부를 공산당에 접수시킬 계획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얄타 협정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간도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으나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였다.
포츠담선언은 대한시대(1897- )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45년 7월 26일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이다. 연합국 정상들은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 방침을 밝혔다.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후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세 번째 전시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전쟁 수행 방침 등이었다. 1945년 7월 26일 미국의 대통령인 트루먼, 영국의 국무총리인 처칠, 중국의 총통인 장제스가 포츠담 선언에 서명하였고 그 후 8월 8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대일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포츠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1 - 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류와 일본 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7항은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9항은 일본 군대의 무장 해제, 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및 강화, 언론·종교·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 존중의 확립, 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12항은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13항은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포츠담 선언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이 일본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또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대한국(1897- ) 문제와 관련해서는 8항에서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전후 대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다.

▶1937년 헝가리 시인 요제프 사망
▶1931년 스페인 부르봉왕조 멸망
▶1929년 서울학생독립운동 사건 발발
▶1921년 조선어연구회 조직
(후에 한글학회로 개칭)

국내서 가장 오래된 한글학회 학회지
`한글` 창간호

조선어 연구회(한글학회)
1921년 12월3일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서울 휘문의숙에서 결성됐다.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 연구회를 만든 이는 임경재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등 한힌샘 주시경의 제자들이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1월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쳤고, 우리 정부 수립뒤인 1949년 9월 지금의 한글학회로 다시 개칭했다.
한글학회가 일제때 겪은 가장 커다란 고난은 1942년에 터진 조선어학회사건이다.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과 국어연구에서 ‘불온한’ 민족주의를감지한 일제는 학회 회원과 관련자들 수십명을체포해 모질게 고문하고 그가운데 1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옥중에서 이윤재 한징 두 회원이 고문과 기아로 죽었고, 주요 관련자들은해방 이틀 뒤에야 옥문을 나왔다.
학회의 일제시대 활동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은 1933년에 확정 발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일 것이다. 이 통일안을 그 당시의 한국어 신문들이 채택함으로써 그 때까지 한글 표기가 겪었던극심한 혼란이 극복됐다.
지금 남과 북의 국어 철자법은 그 당시의 통일안을 조금씩 손질한 것에지나지 않는다. 1933년의 이 한글맞춤법 통일안은실용성에서만이 아니라이론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통일안의 핵심은 모든 형태소가 그것의 기본형으로 선정된 단일형태로 표기되는 형태음소론적표기라는 점에 있다.
이 원리에 따라 고립적으로는 똑 같이 /낟/이라고 읽히는 말들이 낟, 낫, 낯, 낱으로 다르게 표기된다.
한국어의 음운조직원리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이 형태음소 표기는 그 당시 유럽 구조조의 언어학의 형태음소론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30년 뒤에야미국에서 출현할 생성음운론의 기저형 표기와 이론적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만하다.
▶1920년 청록파 시인 조지훈 출생
(~1968년5월 17일 서울에서 사망)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대표작으로 , 등이 있다.
시집으로 〈역사 앞에서〉(1959), 수필집으로 〈창에 기대어〉(1958)· 〈시와 인생〉(1959)·〈돌의 미학〉(1964)·〈지조론〉(1963), 평론집
으로〈시의 원리〉(1953)·〈한국문화사 서설〉(1964) 등이 있다.

▶1919년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 사망

▶1912년 발칸제국과 터어키
휴전(터어키 불가리아 세르비아 3국간
휴전조약 승인).
▶1908년 기독교청년회관
(YMCA) 개관식 거행
▶1904년 이준 나유석 윤효정 등
공진회 설립
▶ 1896년 오늘,
제1회 올림픽 경기 대회,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림 쿠베르텡 이
올림픽을 제창한 것은 그가 영국에 유학하면서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이튼 교정에서 꽃피웠던 스포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청소년의 교육으로 스포츠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1회
아테네 대회에는 13개국에서 311명이 참가했으며 경기 종목은 10개였다.

▶1894년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사망
▶1884년 인도의 초대 대통령
프라사드 출생
▶1879년 에디슨 전등 발명


▶1869년 초대 부통령 이시영 출생
▶ 1833년 오늘-미국 오하이오 주 오벌린 컬리지가 세계 최초 남녀 공학 대학으로 개강함.

▶1779년 독일 작가 브라이팅거 사망
▶1753년 영국의 발명가 크럼프턴 출생.
뮬 정방기(精紡機) 발명
▶ 1586년 오늘-토마스 헤리엇 경이 콜롬비아에서 영국으로 감자를 처음으로 들여옴.


1586년 12월3일 영국 플리머스항. 북미 식민지개척을 위해 떠났던 배가 돌아왔으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기대했던 금도, 정착할 만한 땅도 찾아내지 못한 탓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신인 월터 롤리가 주도한 개척단이어서 주목받았지만 내보일 만한 결과물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가치를 몰랐던 식물 몇 가지가 처음 영국에 들어왔다. 감자와 담배. 롤리의 개인교사이던 토마스 해리엇(Thomas Harriot)은 요즘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탐험과 원주민과의 물물교환으로 얻은 수집물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영국에 감자가 전해진 시기가 이보다 빠르다는 설도 많지만 그 주역이 해리엇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태양의 흑점을 연구하던 천문학자였지만 당시 20대 중반의 청년이던 해리엇은 롤리경의 부탁으로 북미로 건너가 생태계와 환경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도 남겼다. 롤리 경이 개척하려던 로어노크 식민지는 성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사라지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해리엇은 감자는 물론 인디언의 담배 건조기술까지 전했다. 미국의 초기 담배산업도 해리엇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헤리엇은 훗날 부등호(>, <)를 처음으로 문서에 남긴 수학자이며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망원경으로 달을 먼저 관측한 천문학자라는 명성도 얻었다.
영국에 들어온 북미산 감자는 스페인이 1520년대에 소개했다는 페루산 감자보다 빠르게 퍼졌다. 아일랜드에 거대 농장을 갖고 있던 롤리 경에 의해서다. 도입 초기에는 하층민의 음식으로만 취급받았으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이 많다는 점이 부각하며 각국의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감자가 없었다면 18세기 산업혁명과 국민국가의 출범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카를 마르크스의 후원자이자 자본론의 일부를 집필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감자가 철 이상의 역할을 해내며 산업혁명을 부채질했다’고 봤다.
독일의 토대인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키워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구증가 정책에도 감자는 크게 기여했다. 독일에서 감자요리가 발전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반대로 감자 때문에 인구가 반감된 나라도 있다. 일찍부터 감자가 전파돼 ‘감자와 양배추 볶음’류의 요리까지 개발됐던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뿌리가 썩는 식물전염병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미국이나 호주로 떠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감자는 약 200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도 구황식물로 쓰였다. 유럽의 식탁에 오른 지 430여년이 지난 오늘날, 감자는 세계가 공유하는 영양 공급원이다.

▶1522년 1622년 3월 12일 성인으로
추증된 근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자
하비에르 사망
https://youtu.be/EUzI6eWU62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행디의행복블러그 ,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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