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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2월 26일

✿2004년 12월 26일
동남아시아 대지진(인도양 쓰나미) 발생
2004년 12월 26일 오전 7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9.1의
강진과 60여 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수마트라섬 서쪽의 인도-
호주지각판과 동쪽의 버마판(유라시아판
에 속함)이 서로 충돌하여 발생한 것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 지진이 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1620
km 떨어진 북(北)수마트라 섬 서쪽 해안
의 해저 40km 지점에서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1900년부터 2004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발생한 지진 중
3번째 강력한 규모이며, 1964년 알래스
카 지진(진도 9.2) 이래 40년 만의 최대 지진
이었다.

이번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tsunami 지진해일)
은 지진발생 30분만에 6m 높이로 태국의 휴양도시
푸케트에 도달하여 해안지방을 초토화 시켰다.

이후 쓰나미는 3시간 뒤에 수마트라섬 서쪽 1600km 떨어진 스리랑카 동남해안
에 도착했으며, 시속 약 400km로 지진 발생 14시간만인 27일 오전 0시에는 진앙
에서 5700km 떨어진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안에 상륙했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최북
단인 아체주에서 400만 주민 중 14만명이 희생되는 등 인도네시아·스리랑카·인도
·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태국·소말리아에서 총 23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2012년 오늘,
아베 신조 2차대전 후 두 번째로 일본총리 두 번째 취임.
2013년 오늘 아베 신조 일본총리 야스꾸니신사 전격참배 국제사회비난 봇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부부가 지난 4월 도쿄 신주쿠교엔에서 열린 ‘벚꽃을 보는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도쿄|AP연합뉴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 지지율이 1년 4개월 만에 40% 아래로 떨어졌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아베 총리가 정부 주최 ‘벚꽃을 보는 모임’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벚꽃 스캔들’이 정권을 흔들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21∼22일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지난달 조사 때의 44%보다 6%포인트 하락한 38%였다고 24일 밝혔다. 아베 내각 지지율이 4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아베 총리 등의 관여 의혹이 일었던 모리토모(森友)·가케(加計) 학원 스캔들이 불거졌던 지난해 8월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지난달 조사보다 6%포인트 상승한 41%였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지지한다’는 응답보다 높은 것은 지난해 12월 이후 1년 만이다.

아베 내각 지지율 하락 경향은 최근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지난 14∼15일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도 아베 내각에 대한 비(非)지지율(43.0%)과 지지율(43.0%)이 역전됐다.

지지율 하락에는 ‘벚꽃을 보는 모임’ 문제와 이에 대한 아베 내각의 대응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벚꽃을 보는 모임’ 의혹에 관한 아베 총리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응답은 74%로, “충분했다”는 응답 13%를 크게 웃돌았다. “충분하지 않다”는 응답은 아베 내각 지지층에서 61%, 자민당 지지층에서도 67%에 달했다. 아사히는 “지지층에서도 불만이 쌓여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정부가 초청 대상자 명부를 폐기한 뒤 “복구할 수 없다”고 설명한 것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는 응답도 76%에 이르렀다. 다만 ‘벚꽃을 보는 모임’ 문제에 관해 국회에서 계속 해명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노력해야 한다”가 40%, “그럴 필요 없다”가 50%였다.

‘포스트 아베’와 관련해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이 23%로 1위에 올랐다. 이어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환경장관(20%), 고노 다로(河野太郞) 방위장관(8%),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6%),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정조회장(5%) 순이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9월 조사 때(18%)에 비해 지지율이 올랐다. 아사히는 “아베 정권을 떠받쳐온 자민당 지지층이 정권을 비판해온 이시바 전 간사장에 대한 지지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의 ‘4연임’에 대해선 응답자의 63%가 반대했다.
도쿄|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벚꽃을 보는 모임’
이 모임은 세금으로 치러지는 정부 주관 행사로 각계 공로자를 벚꽃으로 유명한 도쿄 ‘신주쿠 교엔’으로 초청해 위로하는 행사다. 하지만 8일 다무라 도모코(田村智子) 공산당 의원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총리는 지역구 후원회를 했느냐”고 물으며 사유화 의혹을 제기했다. 아사히신문은 13일 아베 총리의 지역구 사무소가 ‘벚꽃을 보는 모임’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유권자에게 발송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아베 총리가 바로 행사 취소를 결정한 것. 아베 총리는 지난달 스가와라 잇슈(菅原一秀) 전 경제산업상이 비서를 통해 부조금을 제공했다는 주간지의 의혹 보도가 나오자마자 그를 사임했다. 부인이 법정 비용 이상을 선거운동원에 줘 문제가 된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 전 법무상도 마찬가지다.



▶2009년YS계 조직 핵심참모
서석재 전 국회의원 별세


▶2008년언론 노조 총파업

MBC와 SBS 노조가 주축인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한나라당의 ‘방송법 개정안’ 에 반대하며 2008년 12월 26일 파업에 들어갔다.
언론노조는 이날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조합원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정식을 갖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언론노조는 일부 중앙 일간지와 지방지, MBC, SBS 노조 등으로 구성돼 있다. KBS 노조는 지난 8월 언론노조를 탈퇴했으며, 조선·동아·중앙일보 노조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번 파업에 MBC는 노조원 2000여명(지방 계열사 포함)이 참여했다. 그러나 대체 인력이 투입돼 방송 차질은 없었다. 오전 6시부터 방송된 ‘뉴스투데이’ 의 진행자가 비(非)노조원으로 교체됐고, 뉴스데스크도 신경민 앵커가 단독으로 진행했다.
EBS 노조, CBS 노조, 한겨레 및 경향신문 노조도 이날 파업 집회에 참여했다. SBS 노조는 일부 앵커들이 검은색 ‘상복(喪服)’ 차림으로 방송을 진행했다.
방송사들이 파업에 나서는 것은 1999년 7월 방송법 개정에 반대하며 전국방송노조연합이 총파업에 나선 이후 9년 만으로, 언론노조가 9년 만의 총파업 카드를 꺼내 든 것은 한나라당이 민주당 등 야당의 반대에도 국회에 상정하려는 7개 언론관계법 때문이다.
한편, 정부는 이번 파업을 ‘불법 파업’ 으로 규정했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공영방송을 자처하는 방송사 노조가 국회의 입법활동에 대해 정치 투쟁을 벌이며 파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며 “이는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방송사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유화하는 행위” 라고 말했다. 노동부는 “언론노조의 파업은 ‘근로조건의 결정’ 에 관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불법 파업이며, 노동관계법상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고 밝혔다.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은 13일간 계속됐으며 2009년 1월 8일 여야의 언론관련법 처리 유보 방침에 따라 당일 오전 0시를 기해 총파업 투쟁을 일시 중지했다.
이에 따라 MBC 지부를 포함해 파업에 동참해온 각 언론노조 지부는 이날부터 업무에 복귀했다.
언론노조는 전날 오후 여의도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언론악법.구조조정 저지’ 결의대회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파업 일정을 마무리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언론장악 7대 악법저지 언론노조파업출정대회'



▶ 2002년  세계 최초 복제아기 탄생
            

   “복제아기 사상 첫 탄생”

   사상 처음으로 인간복제를 통해 여자아기가 태어났다고 인간복제를 시도해온 종교단체 ‘라엘리언’의 생명공학회사인 클로네이드가 27일(현지시각) 밝혔다. 인간복제는 부모의 유전자를 절반씩 물려받는 인류의 생명유지 방식을 거스른 것이어서 커다란 윤리·과학적 논쟁이 예상된다.

   클로네이드의 사장 브리지트 부아셀리에 박사는 이날 오전 미국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26일 제왕절개를 통해 ‘이브’라고 이름붙여진 사상 최초의 복제아기가 태어났으며, 이브는 현재 건강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엄마와 아이의 디엔에이 정보가 같다는 증거를 즉각 제시하지 않아, 과학적으로는 성공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부아셀리에 박사는 “아이가 3일 뒤 집으로 돌아갈 것이며 중립적인 과학자를 통해 아이의 디엔에이 검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26일 밤 이 회사의 네이딘 게리 대변인은 “아기는 어머니의 체세포 일부를 떼어내 복제했으며, 산모와 아기는 유전적으로 동일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인간복제는 사람의 귀나 피부에서 세포를 떼어내 유전물질인 디엔에이가 담긴 핵을 분리한 뒤 핵을 제거한 난자에 이 핵을 융합시켜 수정란을 만들고, 이것을 여성 자궁에 착상시키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태어난 복제아기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한 사람의 유전정보만 물려받게 돼 과학적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 복제 과정에서 유산과 선천성 기형, 면역체계 결함, 조로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많다. 이 때문에 질병 치료 및 과학연구 목적이 아닌 아기 출산을 위한 인간복제는 세계 각국이 대부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불임치료 전문가 세베리노 안티노리 박사도 지난달 자신이 시도한 복제아기가 내년 1월 초 출생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인간복제 연구는 다양하게 진행돼 왔다.



▶1999년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 설립자 빌 보워먼 사망
▶1996년신한국당 노동관계법-
안기부법 변칙 개정
▶1994년가양대교 착공1994년옐친, 체첸 공격 중지 명령


▶1990년대법원, 이름에 쓸 수 있는 한자를 2,731자로
제한하는 개정호적법 시행규칙을 확정

호적신고를 하고 있는 모습



▶1989년루마니아 구국위원회,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에 선출



▶ 1985년  미국의 동물학자 다이앤포시 피살
   포시 [Fossey, Dian, 1932.1.16~1985.12.26]
  미국의 동물학자. 마운틴 고릴라(mountain gorilla)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이다.

   1954년에 새너제이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켄터키 주 루이빌의 아동병원에서 몇 년 동안 직업요법의로 일했다. 1963년에 동부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그곳에서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를 만났으며 마운틴 고릴라를 처음 보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1966년 리키의 권유로 아프리카에 가 마운틴고릴라의 자연 서식지에서 이 고릴라를 장기간 연구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위해 포시는 1967년 카리소케 연구 센터(Karisoke Research Centre)를 세웠으며, 멸종 위기에 처했던 마운틴 고릴라의 마지막 서식지 중 하나였던 르완다 비룽가 산맥에서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했다. 그녀가 모은 자료는 고릴라의 습성·의사소통, 사회구조에 대한 당시의 지식을 크게 발전시켰다. 포시는 자신의 관찰을 잡지 기고문들과 〈안개 속의 고릴라 Gorillas in the Mist〉(1983)를 통해 상세히 기술했다. 1974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동물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후 뉴욕의 코넬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동시에 카리소케 연구 센터에도 계속 관여했다. 포시는 비룽가고릴라를 밀렵꾼과 근처의 농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했으며, 1985년 자신의 야영지에서 살해되었다.

            

   고릴라와 의문사

   제인 구달이 침팬지의 수호자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데 견줘, 한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고릴라의 각별한 친구 다이앤 포시는 덜 알려져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1932년생이니 제인 구달보다 두 살 위인 그녀는 1954년 대학에서 수의학 공부를 위한 준비 과정을 마치고 재활의학을 전공했다. 장애인을 돌보는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다 1963년 아프리카 여행을 가 고릴라의 멸종 위기에 대한 강연을 듣고 이 분야에 매료된다. 처음에는 자이르로 갔다가 1967년부터 르완다에 정착해 18년을 고릴라의 친구로 살았으나 1985년 성탄절 다음날 자신의 오두막에서 의문사로 세상을 떴다.

   인간과 많이 닮아 더욱 괴기스럽게 느껴졌던 큰 몸집의 고릴라는, 우리의 편견과 달리 채식주의자일뿐더러 결코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며 인간과 꼭 같은 희로애락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그녀의 작업은 체력적 한계와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안개 자욱한 산속 몇날며칠 같은 자리에서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숨소리도 죽여가며 머물다 보면 기력이 소진하고 때로 견디기 힘든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나 겸손하고 친절한 다이앤 포시는, 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행동거지를 주의깊게 살피면서 무리 속에 들어가 새끼들을 함께 돌보는 모험을 감행했고, 그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황홀한 체험을 통해 말 그대로 고릴라의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 인간과 다른 유인원의 종족에 그녀가 받아들여지는 모습이 필름으로 기록되고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발표되면서 그녀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1976년에는 이 분야의 연구를 집대성한 논문을 제출해 박사학위도 받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외롭고 또 외로웠다. 사랑했던 남자들은 그녀의 동반자가 될 수 없어 곧 떠났고, 외로움과 원망을 알코올과 일 중독으로 이겨내려 했으나 균형을 지켜내기 힘들어, 넘치는 열정을 그저 고릴라 보호에 쏟아부었다.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호텔 르완다>에 묘사된 바와 같이 종족갈등으로 1994년 르완다에서는 80만 명의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데, 이 끔찍한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은 다이앤 포시의 활동 지역이던 루엔게리주의 악질 지사로, 1985년 발생한 그녀의 토막살인 사건의 배후 인물 역시 같은 놈이라는 증거들이 수집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이태 전 고릴라의 친구가 된 사연을 적어놓은 책을 출간한 덕에, 시고니 위버가 다이앤으로 나온 영화 <안개 속의 고릴라>를 통해 우리는 그녀를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



▶1983년한일경협 2차년도 규모 495억엔으로 합의
▶1983년일본 나카소네 2차내각 발족
▶1980년입법회의, 언론기본법 대통령선거법 의결
▶1974년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시작
▶1972년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사망


▶1969년제3한강교 개통




▶1962년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포


▶1962년
워커힐 호텔 준공
1950년 가을 미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대대적인 북진작전에 나섰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

그러나 ‘워커 라인’으로 낙동강전선을 지켜낸 명장 워커도 물밀 듯 밀려오는 중공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과 국군이 흥남철수작전을 펴고 있을 때, 38도선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쳐야 했다.

12월 23일 워커 장군은 적과 대치하고 있던 미 24사단을 격려하기 지프에 올랐다. 24사단에는 외아들 샘 워커 대위가 있었다. 그는 아들의 무공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서울 미8군 지휘소에서 의정부 북방전선으로 가던 중 그는 지프가 국군 트럭과 충돌하면서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62년 오늘, 서울 아차산 기슭에 워커힐 호텔이 준공됐다. 미군 휴양시설로 건립된 호텔에는 자유를 위해 먼 이국땅에서 숨진 그를 기려 ‘워커의 언덕’ (Walker Hill)이란 이름이 붙었다.

호텔 건설 목적은 달러획득용이었다. “한국에 적당한 미군 위락시설이 없어 연간 수만명의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는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말을 들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곧바로 건설에 들어갔다.

공사는 10개월만에 일단락됐다.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했다. ‘힐 토바’ 건물은 워커의 이니셜인 ‘W’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다른 호텔건물에는 역대 유엔사령관의 이름이 붙었다. 이듬해 4월의 개관식에는 워커 장군의 아들도 참석했다. 그는 이미 중령이 되어있었다. 세계적인 재즈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도 참석했다.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일부를 횡령, 정치자금화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워커힐호텔은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1966년에 방한한 존슨 미국 대통령이 묵었고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 등의 이벤트가 계속 이어졌다. 72년 남북적십자회담 만찬장으로 이용된 이후 줄곧 남북간 만남의 장소가 됐다.출처 블로거 20년째학부모님




▶1961년아랍연맹, 예멘과의 연방 해체
▶1957년뉴델리에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亞阿)회의 개최
▶1950년맥아더 원수, 중공군의 한국전개입에 관한 성명 발표
▶1949년아인슈타인 통일자장의 원리 발표
▶1948년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1945년국군준비대회 개최
▶1941년미국-영국-중국 군사동맹 체결
▶1934년일본 최초의 직업야구단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신) 탄생
▶1932년중국 칸수 대지진으로 7만명 사망
▶1916년인도 국민회의파와 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공동전선 결성
▶1904년쿠바 소설가 겸 민속 음악학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출생
▶1900년엔리코 카루소 성악가,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프를 불러 밀라노 스칼라좌에 데뷔


▶1898년퀴리부부, 라듐 발견

마리 퀴리와 그를 지켜보는 남편 피에르의 모습.

https://youtu.be/l1MFQ8FVIQA




▶1893년
중국 초대국가주석 마오쩌둥 태어남.
중국의 정치가.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으며,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1949~1959)으로서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장제스[蔣介石]과 마오쩌둥[毛澤東]

자 룬즈[潤之]. 1893년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출생.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長沙]의 샹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공부나 외국 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를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이던 1917년 그는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대부분이 제1사범학교 학생들이었고, 이 학회는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되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수업을 청강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 학생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0년 겨울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1921년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 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대장정, 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 등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 보고를 통해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그는 국민당과 1946~1948년의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우고 국가 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 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실패하였고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로 치달았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추락하여 1959년 4월 국가 주석을 사임하게 되었고, 류사오치가 당주석이 되어 자작농을 부활시키려 했다.

1964년 4월 펑더화이가 실각한 후 린바오[林彪]가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마오쩌둥을 숭배하고 찬양하였다. 그는 군부에서《마오쩌둥 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했으며 마오쩌둥의 사상을 홍보하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마오쩌둥은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 사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68년 10월 마오쩌둥은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고, 1969년 마오쩌둥과 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 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애에서는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81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중국 정부에서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내란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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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여자,'문화혁명'의'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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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러그솦트리종려나무,블러그반가운의하이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