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 8일
남산1호 쌍둥이터널

1994년 쌍둥이 터널로 차량통행 시작.
폭 9m, 총길이 1532m로 총 626억 원이 투입됐다. 쌍굴은2월 13일까지만 이용했
고, 1995년 6월까지 기존의 남산 1호터널
에 대한 전면 보수공사가실시됐다


▶2009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서 포격전
▶2009년 프랑스 제과업계 대부 가스통 르노트르 별세
▶2001년 서울지법, 건설업체 한양에 파산 선고
▶2001년 서도 명창 오복녀 여사 타계
▶1997년 통계청, 1월 1일 현재 우리나라 인구 4천5백75만7천명으로 발표
▶1996년 러시아제 안토노프32기 자이레 수도 킨샤사 시장 추락. 300여명 사망
▶1996년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 사망
▶1994년 남산1호 쌍둥이터널 개통
▶1994년 서울 제2기 지하철(6호-7호-8호선) 공사 착공
▶ 1994년 신문에 난 서울대본고사 문제풀이

▶1993년 국립교육평가원, 독학사 147명 첫 배출
▶ 1992년 오늘,
일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제1회 "수요 집회"를 개최

▶1985년 이라크 공군, 이란 영해서 한림해운 소속 마리너호에 미사일 공격
▶1981년 사회보호법 시행령 공포
▶1976년 주은래 전 중국 총리 사망
저우언라이 [周恩來, 1898.3.5~1976.1.8]
'영원한 2인자'의 삶은 어떠했을까.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중국 총리가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8년 장쑤성 하급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프랑스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유복했지만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혁명에 몸을 던진 풍운아였다. 청빈과 성실의 대명사였기에 국민적 인기는 절대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을 능가할 정도였다.

정권 수립부터 27년간 총리를 지낸 그의 삶은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인내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1935년 대장정(大長征·사진)때부터 2인자로 궂은 일을 도맡았지만, 마오의 변덕에 시달렸고 의심스런 눈초리에 몸을 낮춰야 했다.
마지막까지 그는 마오와 부인 장칭(江靑) 등 '4인방'에게 견제를 받아 아픈 몸을 이끌고 여러차례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북경 시민 100만명이 몰려들어 애도했는데 '4인방'은 추모 군중을 탄압했다. 같은해 9월 마오가 사망하고 한달도 채 되지않아 '4인방'도 몰락했다. 권력의 달콤함은 순간이지만 인간의 향기는 영원한 것인가.
▶1975년 장기영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남북간의 우편물교환 제의
▶1974년 긴급조치 1호-2호 선포, 개헌운동과 관련보도 금지
▶197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의 해산을 공고
▶1969년 주택채권 증권지상에 첫 상장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발생
▶1966년 도미니카 군부반란 수습
▶1965년 유엔무역개발회의(WNCTAD) 가입
▶1965년 정부, 비전투병력 월남 파견 결정
▶1964년 파나마 분쟁사건 발생(반미 폭동)
▶1963년 프로레슬러 역도산 내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프로 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이 1963년 1월8일, 30여 년 만에 처음 조국 땅을 밟았다. 300여 명의 환영객들은 트랩을 내려오는 역도산(180cmㆍ140kg)을 발견하고 달려가 서로 꽃다발을 전달하려고 북새통을 이뤘다.

한국 태생의 일본 프로레슬러 역도산. 그는 원래 스모선수였다.
역도산은 일본명 리키도상이고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940년 일본에 건너가 스모선수로 컸으나, 일본인이 아니면 최고자리인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스모계 규정에 반발, 1950년 9월 스모계를 떠나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는다. 이후 1년간 미국에서 선진 프로레슬링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발족시켰다.

1953년 2월19일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국제시합이 도쿄에서 열리자 경기장 앞은 몰려든 인파들로 큰 혼란을 빚었다. 일본 대표로 역도산이 출전한데다 당시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세계태그챔피언 샤프형제가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역전광장 등 220여 곳에 설치된 옥외TV 앞에는 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관중들은 역도산의 특기인 ‘가라데 촙(당수)’ 으로 거구의 서양인을 무너뜨리는 장면에 열광했다. 2차대전 패전국으로 절망에 몸부림치던 때였다. 프로레슬링 붐은 막 싹트고 있던 TV보급율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일본 전역을 들끓게 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 NTV가 프로레슬링 독점중계로 흑자로 돌아설 정도였다.

사업가로도 성공, 한때는 일본 100대 자산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1963년 12월 뜻하지 않게 야쿠자간의 싸움에 휘말려 칼을 맞고 서른아홉의 나이로 숨졌다. 역도산이 이 해 연초 방한했을 때 약속했던 국내 스포츠센터 건립 지원도 그의 죽음에 따라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1961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알제리 민족자결정책 승인
▶1961년 혁신당 결성(대표위원 장택상)
▶1959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952년 국회, 대통령직선제 및 국회양원제 개헌안 부결
▶1951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군대확장 강조
▶1949년 영국, 대한민국 승인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내한
▶1947년 제1회 종합예술제 개막(-19일)
▶1946년 조선국군준비대에 해체명령
▶1942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군사동맹
▶1942년 영국 이론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출생
영국 이론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영어: Stephen William Hawking) 영국 옥스퍼드 에서 출생 ~ 2009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로 재직한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특히, 블랙홀이 있는 상황에서의) 우주론과 양자 중력의 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자신의 이론 및 일반적인 우주론을 다룬 여러 대중 과학 서적을 저술했다. 그 중에서도 시간의 역사는 영국 런던 선데이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최고 기록인 237주 동안이나 실려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1941년 독립운동가 서동성 사망
▶1935년 연희전문대학교 농구단 전일본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1933년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출생

▶1932년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
1932년 1월 8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교외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 뒤 승용차를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는 순간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승용차 뒤에서 터졌지만 거리가 멀어 천왕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본에서 6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 이봉창 의사는 의거 한 해 전인 1931년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선생에게 천황 제거를 제안하고 1931년 12월, 도쿄에 도착했다. 천황을 처단하기 위한 폭탄 한개와 자결하기 위한 폭탄 한개를 지닌 채였다.

거사 전의 이봉창 의사가 태극기 앞에서 천황 저격을 선언하는 모습.


▶1918년 윌슨 민족자결주의 선언
▶1905년 동화작가 마해송 출생
▶1902년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출생
▶1896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 사망
▶182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출생
▶1786년 미국의 금융업자 니콜라스 비들 출생
▶1642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망
‘현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42년 1월 8일 78년에 걸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인했고,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고전역학의 틀을 마련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교회와의 갈등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한 ‘대화’(1632)가 종교재판에서 성경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이단으로 심히 의심’을 받아, 그후 200년 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10명의 재판관 중 7명이 서명했던 교회의 역사적 오류는 360년이나 지난 1993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비극적인 상호 몰이해’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함으로써 마침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갈릴레오는 ‘출세’에 관심이 많았다. 사교술이 뛰어났던 그는 박봉의 교수직을 벗어나 ‘궁정학자’로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끝에 토스카나 대공의 아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고, 그 아들이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면서 그는 마침내 1610년 대공의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교회와의 충돌만은 피해보려 노력했으나 성경의 독선적 해석에 집착했던 신부들의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교황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됐다. 연금상태와 딸의 죽음에 따른 고통으로 시력까지 상실했던 그는 마지막 저서 ‘두개의 새로운 과학’(1638)을 교회의 눈을 피해 네덜란드에서 발간하고, 이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324년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사망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1324년 1월 8일 사망했다. 1254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마르코 폴로는 1266년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을 따라 몽골제국의 수도 대도(大都)로 향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생 마페오와 함께 동방무역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킵차크 칸국에 갔다가 전쟁으로 귀향길이 막히자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에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소아르메니아의 라이아스를 출발, 터키 동부를 지나 이란을 경유하여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북방 육로로 향한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카슈미르를 거쳐 파미르를 넘은 뒤, 중국 서부의 신강과 감숙 지방을 지나 마침내 1274년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제국 지배하의 중국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로부터 여러 임무를 부여받아 때로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고, 3년간 양주라는 도시를 통치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측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장에는 상당한 과장이 섞여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한 것은 1290년이나 1291년이다. 그로부터 몇년 전 칸국의 군주인 아르군(1284~88)의 부인이 사망하자 그녀를 대신할 또다른 왕녀를 원나라에서 이란까지 호송하는 임무가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폴로 일가와 왕녀 일행을 태운 열네 척의 선단은 중국 동남해안의 천주항을 출발하여 26개월 만인 1293년에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 도착했다. 왕녀를 인도해준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로 귀향한 것이 1295년의 일이었다.
3년 뒤 지중해 상권을 두고 경쟁하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에 참가한 폴로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루스티켈로를 만나 그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구술하여 `세계의 서술` 이른바 `동방견문록`을 완성한다. 1299년 감옥에서 풀려나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상업에 종사하다 이날 사망했다.
▶881년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입성

황소의 장안 입성도.
당 왕조의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꾀한 황소가 군사를 일으킨 지 7년 만에 마침내 당나라 군을 격파하고 881년 1월 8일 당나라 수도 장안에 입성했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했으나 과거시험에는 낙방해 관료로 진출하진 못했다.
874년 왕선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 황소도 군사를 일으켜 본격적인 반란군의 생활을 시작했다.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고향을 등진 유랑민들이 그의 수하에 속속 모여들어 군사는 순식간에 수천으로 늘어났다.
당나라군과 계속된 접전중에 왕선지가 피살되자 황소는 `충천대장군`으로 추대되어 연호를 왕패라 이름지었다. 황소군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전투형태를 취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880년 11월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어 12월 장안을 향하는 동관을 돌파할때 황소의 군사는 60만이었다고 `후당서`는 기록하고 있다. 열세를 느낀 당나라 희종이 이날 장안을 탈출하자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무혈입성했다. 황소는 당의 황족 전원을 몰살하고 12월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나라이름을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칭했다.
그러나 도망간 희종을 중심으로 당나라 군사들이 계속해서 장안을 공격하자 황소군의 전력은 눈에 띨 정도로 약화되었고 황소군의 부장 주온의 배반으로 황소는 장안을 탈출해야 했다. 884년 6월 1천여 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태산 낭호산으로 탈출한 황소는 호랑곡 전투에서 패배하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어 그후 23년 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647년 신라, 선덕여왕 사망, 진덕여왕 즉위
성은 김(金), 이름[諱]은 승만(勝曼)이다. 시호는 진덕(眞德)이며, 태화(太和, 647〜650)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성골(聖骨)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동생인 진안 갈문왕(眞安葛文王) 국반[國飯, 국분(國芬)]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아버지가 국기안(國其安) 갈문왕(葛文王)이고 어머니는 아니부인(阿尼夫人) 박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키가 7척이나 되었고,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팔이 길었다고 한다. 진덕여왕은 647년(선덕여왕 16) 사촌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해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염종(廉宗)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이 진압되면서 선덕여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진덕여왕 원년(元年)의 기록을 비담 등을 처형한 정월 17일에서 시작하고, 선덕여왕은 그해 8월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https://youtu.be/LT51vc1_usE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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