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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월 18일

✿1997년 1월 18일
노르웨이 탐험가 뵈르게
오우슬란, 남극대륙 첫 단독횡단

얼어붙은 남극대륙을 스키로 가로지른
최초의 단독 남극횡단 기록이 18일 노르
웨이 탐험가 뵈르게 오우슬란(34)에 의해
수립됐다.지난해 11월15일 장장 2천8백 에
이르는 장정에 나섰던 오우슬란은 이날
새벽 뉴질랜드의 스코트 기지에 도착,영하
40도를 맴도는 추위와 격심한 고립감과
싸워온 64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2011년미국 평화봉사단 설립,
빈곤퇴치 헌신 슈라이버 별세
▶2001년사진작가 임응식 별세
▶1994년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별세
▶1990년제7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85년신한민주당 창당
▶1982년미국에서 한파로 280명 사망
▶1980년영국의 사진가 세실 비턴 사망
▶1974년박정희 대통령, 남북한 불가침협정 제의
▶1974년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군격리협정 조인
▶1969년일본 동경대 전공투(全共鬪),
야스다강당에서 경찰과 공방전
▶1965년제7차 한일회담 개막
▶1964년제주도일원에 첫 통금해제
▶1963년민주공화당 발기선언, 위원장에 김종필씨 선출
▶1963년여객선 연호 침몰(사망 138명)

침몰한 정기여객선 연호의 모습.

▶1957년저작권법 국회 통과
▶1955년서양화가 이중섭, 미도파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27일)


▶1954년독도에 한국영토표지 설치

독도 영토 분쟁은 1952년 1월 28일 일본이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일본은 6·25전쟁으로 한창 혼란스런 한국의 사회분위기를 틈타 1953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에 걸쳐 미군기를 도용하면서 독도에 상륙, 1948년 6월 30일 미군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어부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 영토 표지를 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1953년10월14일 조재천지사의 독도조난어민위령비앞에 일본이 무단을 설치했던 일본영토표주를 철거했다.​

  일본의 독도 침범이 빈번해지자 국회는 1953년 7월 독도를 보전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하기로 결정했다. 1953년 4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가 창설된 데 이어, 1954년 1월 18일 영토표지를 독도에 설치했다. 이어 8월 15일 독도 등대를 점등해 만국에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렸다.

한국영토표지 설치​

  9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우정국에서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조하기 위해 3종의 독도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 사법재판소에 독도문제를 제소할 것`을 제의했으나 한국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 한국의 영토이므로 재판소에 제소할 필요가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1952년국회, 제2차개헌안 (대통령직선제) 부결


▶1952년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대통령이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이른바 ‘이승만 라인’ 을 관보(국무원 고시 제14호)에 실어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그 당시 자국의 바다를 확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몇개국이 전부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언이 선포되자 일본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 반응을 보였으며 미국, 영국, 자유중국 등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연안수역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이승만 라인’ 을 선포했다.

  그러나 정부가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 고 명분을 밝힘으로써 이때부터 평화선이라 불려졌다. 평화선 선포의 배경을 보면, 한일간의 어업상의 격차가 심하고,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의 보호가 시급하며, 세계 각국 영해의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가 일고 있음에 대처, 특히 ‘맥아더라인’ 의 철폐에 따라 보완책의 하나로 설정한 것이었다. 평화선은 한반도 주변수역 50-100해리 범위로 그곳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다. 독도를 라인 안쪽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을 국내법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해 1953년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이 수역내에서 외국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해왔다. 이 법에 의해 일본선박 3백13척이 나포됐고 이중 1백26척만 송환되었으며 나머지 1백85척은 한국이 압류했다. 평화선은 이후 전개된 한일협상에서 우리측의 중요한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됐으나, 1965년 6월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자 사실상 철폐됐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연안수역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이승만 라인’ 을 선포했다.



▶1949년한국-영국 국교 수립
▶1931년한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출생
▶1922년박인호, 천도교주가 됨
▶1920년정안립, 조선고사연구회 조직


▶1919년파리강화회의 개최

파리강화회의 주요 멤버들. 앞줄 왼쪽부터 이탈리아-영국-프랑스 수상과 윌슨 미국 대통령.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 1월 18일부터 5개월간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처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5개국에 의해서 진행됐으나 일본의 무성의와 이탈리아의 철수로 결국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등 3거두에 의해 주도됐다.
회의에는 패전국의 출석이 허가되지 않았으며 소규모 국가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회의를 통해 국제연맹 규약과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 등이 결정됐다. 이날부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6월까지 모두 6차례의 본회의가 열렸다.
특히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전범조항과 엄청난 배상금을 규정해 독일인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심어 주었다. 조약에 따라 독일 주민과 영토는 13%정도 축소됐고 600만명의 인구를 빼앗겼다. 군병력도 대폭 감축돼 공군은 해체됐고,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됐으며 해군의 군함 보유량도 10만 톤 이내로 묶였다. 배상금액은 독일인들이 꼬박 3년간 빵 한조각 먹지 않고 일해야 겨우 모을수 있는 1,320억 마르크로 결정됐다.
이 회의에 따라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및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1915년일본, 중국에 21개조 대

중국의 원세개.



▶1912년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 도달

1912년 1월18일, 지치고 지친 다섯 명의 사내가 남극점에 도달했다. 로버트 스콧(Robert Scott)이 이끄는 영국 탐험대다. 목표에 도달했다는 기쁨도 잠시. 탐험대는 허탈감에 빠졌다.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문센이 36일 전 남긴 편지와 함께. 절망이 발길을 누른 탓일까. 귀환길의 스콧 일행은 전원 얼어죽었다.

남극점에 선 스코트 대장(뒷줄 중앙)과 4명의 대원들.

스콧의 실패 요인은 준비 부족. 극지탐험 경험 출판으로 얻은 명성, 범국민적 지원을 안고도 서두르는 통에 경쟁에서 졌다. 반면 재정이 빈약했던 아문센은 탁월한 피복ㆍ이동수단 선택과 치밀한 보급지ㆍ탐험경로 선택으로 승리를 따냈다. 아문센이 고의로 스콧의 방심을 유도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승부를 가른 것은 사전 대비의 차이다.


   중요한 점은 역사의 평가. 역사는 패자인 스콧을 더 기억하거나 최소한 아문센과 동격으로 쳐준다. 승자만을 알아주는 역사의 속성과 한참 다르다. 왜 그럴까. 탐험대가 보여준 의지와 명예의식 때문이다. 죽음의 여정에서도 그들은 길을 돌아 채집한 지질견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동상으로 대열에서 처지자 ‘볼일 보러 나간다. 오래 걸릴 것 같다’며 동료의 짐을 덜어준 대원도 있다. 스콧은 그를 ‘신사답게 처신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들은 안락사할 수 있는 모르핀을 ‘영국인답지 않다’고 거부하며 자연사를 택했다.


스콧 일행의 시신이 확인된 후 영국은 국왕과 총리가 나서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경솔한 판단으로 동료를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유족들의 오열 속에 스콧은 넬슨에 버금가는 명예를 안았다. 독일의 부상과 1차대전의 전운에서 ‘영웅 스콧’은 영국을 하나로 묶었다. 패배지만 불굴의 패배가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응집원으로 승화한 셈이다.



▶1905년화폐조례 공포(일본화폐의 유통을 공인)
▶1894년소설가 전영택 출생
▶1890년스페인의 왕(1870.11.6 -1873.2.11)
▶아마데우스 사망
▶1888년영국 항공기 설계가 소프위스 출생
▶1881년프랑스 갈리마르출판사의 창업자
가스통 갈리마르 출생


▶1871년독일제국 성립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 또는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파리 시가 행진을 벌이고, 1871년 루이 14세가 지어놓은 사치의 대명사이자 프랑스의 자랑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또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빼앗겼던  엘자스-로트링겐 지역도 다시 찾아오게 된다. 알자스-로트링겐 지역은 역사적으로 늘 독일의 영토였으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 민족이 살고 있던 곳이다. 철광석과 석탄산지로 유명한 이 지역은 1648년 프랑스에게 강제로 합병된 후 1871년 다시 독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1차대전 이후 프랑스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다. 2차 대전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은 히틀러는 이 지역을 다시 독일의 영토로 합병하였으나, 종전이후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넘어가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영토로 남아있다.

베르사이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 




▶1862년미국의 제10대 대통령(1841-45) 존 타일러 사망
▶1861년독일의 화학자 한스 골트슈미트 출생
▶1858년미국의 의사 다니엘 윌리엄스 출생
▶1854년미국의 전화 창시자 웟슨 출생
▶1841년프랑스 작곡가 엠마누엘 샤브리에 출생
▶1733년발생학의 아버지 카스파 프리드리히 볼프 출생
▶1689년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 출생


https://youtu.be/yncuycpW7X4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