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26일
일본 유학생 이수현, 도쿄 전철노선에 떨
어진 일본인 구하려다 사망 일본에 유학
중이던 고려대 이수현씨가 2001년 1월
26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퇴근하던 중
도쿄의 한 전철역 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사망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
과 NHK 등 일본의 신문과 방송들은 이씨
의 의로운 죽음을 속보로 계속 전했다



일본에 유학온 한국 대학생이 도쿄(東京) 전철역 구내에서 술 취한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26일 오후 7시20분쯤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지하철 야마노테센 신오쿠보역. 사카모토 세이코(37)씨가 친구와 함께 플랫폼에서 술을 마시다 발이 미끄러져 철로에 떨어졌다. 만취해서인지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역에는 전차가 곧 도착한다는 벨이 울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건너편 플랫폼에서 한 젊은이가 철로로 뛰어들었다. 그는 사카모토씨를 붙잡고 일으키려했다. 그 때 한 사람이 더 내려와 거들었다. 바로 그 순간 전차가 진입했고, 셋은 함께 전차에 치여 숨졌다.
맨 먼저 건너편 플랫폼에서 뛰어든 젊은이는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26·고려대 무역과 4년 휴학)씨였다. 당시 이씨는 아르바이트하던 인터넷 카페에서 일을 끝낸 후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전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또 한 사람은 일본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인 것으로 확인됐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술 취한 승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진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며 이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크게 보도했다.
이씨는 이날 신오쿠보역 근처의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전철역에서 사고를 당하기 5분 전 휴대전화로 여자친구에게 “이제 전철에 탄다. 30분 후면 집에 도착한다”고 전했는데 이것이 세상에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씨는 부산 출신으로 고려대를 휴학하고 99년 11월 일본에 와 지난해 1월 도쿄에 있는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어 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을 기록한 그는 올 여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고려대에 복학할 예정이었다. 이씨는 평소 정의감이 강하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동료 유학생들은 전했다. 그는 지난해 일본어학교에 제출한 입학 이유서에서 “일본 유학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한국이나 일본의 무역회사에 입사해 두 나라의 교역 부문에서 확실한 1인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2012년 7선 신상우 前 국회 부의장 별세
▶2003년 중국~대만 반세기 만에 비행기 운항
▶2001년 대법원, 16대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가 벌인 `낙선운동`은 위법이라고 판결

총선시민연대가 집중낙선대상자의 이름
과 전력이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를 이용
해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1년 일본 유학생 이수현,
도쿄 전철노선에 떨어진 일본인 구하려다 사망
▶1999년 미국, 불공정무역관행 제재를 위한
`수퍼301조` 부활
▶1995년 국제통화기금,
멕시코에 차관제공을 승인
▶1995년 김영삼대통령,
`마틴 루터 킹 비폭력평화인권상` 수상
▶1994년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 별세
▶ 1988년 오늘,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 뉴욕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극장에서 개막.

▶1985년 테레사 수녀 내한(~29일)

내한한 테레사 수녀(오른쪽).
▶1983년 다나카 전 일본수상에 5년 구형
록히드사건을 통해 철저히 수사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국가기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80년 이집트, 이스라엘 정식 국교 수립
▶1978년 소련, 코스모스호 추락지역 방사능 발견
▶1976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북측에 남북조절위원회 정상화 촉구
▶1971년 일본, 북한 적십자 대표,
교포의 북송재개 합의
▶1971년 소련 인공위성 `비너스7호`,
금성으로부터 최초의 데이타 송신에 성공
▶1967년 야당통합을 위한 제1차 4자회담
▶1967년 영국 하원, 철도국유화 법안 통과
▶1965년 국회, 월남파병안 가결

조문환 주월한국군 단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베트남에 전투병력을 파견하는 파병안이 1965년 1월 26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파병 병력은 2,000여 명으로 공병, 수송 및 자체방위부대 등이었고, 파병안은 재석 125명 중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통과됐다. 이날 국군 월남파병안이 통과 됨으로써 국방장관에게 1월 29일 임명장을 받은 조문환 주월한국군 단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첫 과업은 홍수피해복구작업이라 밝혔다.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7월 15일 미국의 존슨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함으로 참전이 본격화됐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안으로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한편 한국군 봉급의 지급, 한국산 군수품 구매 등의 혜택을 제시하며 압박해왔다.
파병안에 따라 1965년 2월 2,000여 명의 비둘기부대가 파병됐고, 10월는 전투부대인 해병대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1966년 9월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군 파병은 1973년 3월 23일에 한국군이 모두 철수할때까지 8년여 동안 총 31만 2,853명이 참전했다. 참전기간 동안 한국군은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000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쳤으며 5,000여 명이 전사하고 수만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참전 대가로 벌어들인 10억 3,600만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965년 월남에서 반미데모확대 계엄령 선포
▶1962년 한국-멕시코, 국교 수립
▶1960년 서울역 압사사고, 31명 사망

당시에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열차 편이 많지 않아서
야간 열차를 타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3번 계단에서 집단으로
넘어졌다. 이 사고로 다들 큰
부상을 당하여 31명이 압사를
당하고, 41명이 부상을 당했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 합병 합의
▶1956년 제7회 동계올림픽 개막
(이탈리아 코르티나 담페소)

▶1951년 해병대 인천상륙
▶1950년 인도, 독립정부 수립

사아드 모타데 이스라엘 주재 이집트 초
대대사(왼쪽)가 엘리아 벤 엘리사르 이집
트 주재 이스라엘 초대대사와 악수를 나
누고 있다.
▶1950년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조인
▶1948년 폴란드 피아니스트 프리드만 사망
▶1934년 소련, 폴란드 불가침조약 조인
▶1910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헤이그협약` 국제적으로 발효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1901년 10월에 준공된 한성전기회사
사옥.
1898년 1월 26일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됐다. 이근배와 김두승 두 사람의 명의로 ‘서울시내 전차, 전등 그리고 전화의 시설 및 운영권’ 허가받아, 고종을 비롯한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운 기업이었다. 자본금은 일화 30만엔 규모였다.
미국 콜로라도 중부철도회사 사장을 지낸 콜브란은 황실과 용역계약을 맺고 전차-전등의 건설과 운영을 위탁받았다. 결국 미국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 회사는 전차 운행에 필요한 선로 부설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전차 구간이 정식 개통됐다.
이때 건설된 구간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단선 궤도였다. 곧 이어 민간에도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해 일반인들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1904년 한성전기회사는 한미전기회사로 회사명칭을 바꾸었고 1909년에는 일본 국책회사인 일한와사회사로 넘어갔다.
▶1881년 프랑스, 출판의 자유 확대
▶1880년 더글라스 맥아더 출생
- 맥아더 원수의 걸작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을 최초로 시찰한 6월 29일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 상륙작전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북한군의 거칠 것 없는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수단은 적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적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이 배후를 칠 생각을 한 것은 맥아더가 아닌 다른 장군이라면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데 대하여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
둘째,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다.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먼저 월미도를 점령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셋째,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육군 및 해군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천을 선택했다. 즉, 아군뿐만 아니라 적도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표를 찔러서 공격하면 전략적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적은 인천을 허술하게 지키고 있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부대로서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속시켰다. 미 제7보병사단은 약 8,600명의 카투사 병력을 포함하고 있어 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명에 이르렀다. 약 20%에 해당하는 이 병력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냄으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맥아더가 예상한 대로 인천의 적 방비태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유엔군은 약 2,000명밖에 되지 않은 적을 쉽게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약 3일 후부터 유엔군은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인천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남쪽의 낙동강 선에서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에 전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 소식이 알려지면서 적 사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드디어 전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다. 적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 되었다.
맥아더 원수의 걸작 중에서도 걸작인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사에서 전통적인 승리의 비법이 되어온 '망치(Hammer)'와 '모루(Anvil)'의 원리를 적용해 이루어낸 것이었다. 즉, 낙동강에서부터 정면공격에 의한 반격은 엄청난 손실이 따르므로 인천에 상륙해 모루를 만들고, 낙동강에서부터 망치를 휘둘러 그 안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개념의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이 작전은 맥아더 원수의 대담한 착상, 결단력, 필승의 신념으로 이루어낸 20세기의 칸나에(Cannae) 전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본국 정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는 마치 승리의 신으로부터 계시라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부하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빛나는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879년 영국의 초상 사진작가 케머런 사망
▶1841년 영국, 홍콩에 대한 주권선언
▶1823년 종두법 발견한 에드워드 제너 사망

제너 [Jenner, Edward, 1749.5.17~1823.1.26]
영국의 의학자로 우두접종법의 발견자인 에드워드 제너가 1823년 1월 26일 사망했다. 천연두는 종두법이 생기기까지 몇백년 동안 가장 무서운 전염병의 하나였다. 제너는 글로스터셔주 버클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770년에 J.헌터로부터 2년간 외과학을 배우고, 세인트조지병원에 근무했다.
제너는 어떤 여성 환자로부터 "과거에 우두에 감염됐던 사람은 일생 동안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는 말을 듣고 확인하기 위하여, 8세된 피프스라는 소년의 팔에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얼마 후 자연 감염의 경우와 똑같은 두진이 생긴 후 치유됐다. 그 후 그 소년에게 천연두 바이러스를 접종했으나 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즉 우두의 병원체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또한 우두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 등이 실험적으로 증명됐다.
이로써 종두법에 성공한 그는 1798년에 `우두의 원인과 효과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의사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 뒤 효력이 인정되어 1803년에 런던에 우두접종 보급을 위한 왕립제너협회가 설립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접종을 해주었다. 영국의회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상금을 내리기도 했다. 제너가 발명한 종두법은 그 후의 모든 백신 개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후 제너는 면역학의 원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1788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첫 상륙
▶1700년 북미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 등지 진도 9.0 지진 발생
https://youtu.be/5mbZ1gM27f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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