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인천국제공항 모습.
21세기 동북아 허브(중심) 공항을 목표로
건설된 인천국제공항이 2001년 3월
29일 개항했다. 인천공항은 이날 오전
4시 46분 방콕발 아시아나 항공의 첫
착륙과 오전 8시 30분 마닐라행 대한
항공의 이륙을 시작으로 한국의 새 관문
역할을 시작했다. 우려했던 혼란은 없었다.여객기 281편,
화물기 58편 등 모두 339편의 항공편
이·착륙이 이상없이 이뤄졌다. 인천공항을
통해 입·출국한 승객은 4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공항 관계자들은 시험가동 기간 중 잦은
고장을 일으켰던 수하물처리시스템(BHS)
과 항공권 발권 업무가 정상적으로 이뤄
지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종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조마조마해
하던 공항측은 “일단 첫날은 순항했다”며
안도했다.
수치로 본 인천공항은 단군 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진기록들로
가득차 있다.
부지면적 1700만평은 여의도의 18배 크기
이며, 45만장의 설계도면을 쌓으면 15층
건물 높이에 이른다. 연건평 15만평 크기의 여객터미널은 여의도
63빌딩의 3.1배이며, 축구장 60개 크기이다.
또 바닥면적 기준으로 국내 최대의 건축물이자
단일 공항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다. 관제탑은 세계에서 3번째로 높100.4m로
지진이 일어날 경우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복합 내진장치가 설치돼 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영종대교는 2층
왕복 6차선 도로, 1층에 철도와 4차선 도로가
함께 붙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량이다.
▶2010년국어학자 이응백 선생 별세
▶2010년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 폭탄 테러 발생
▶2009년음악가 모리스 자르 별세
▶2009년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별세
양정모 (梁 正 模 )전 국제그룹 회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 교병원에서 사망 (1921년 9월 13일 부산 동래구 안락동 에서 출생~)
1949년 부친 양태진과 함께 부산에 국제 고무 공업 사를 설립하여 이후 《왕자 표》 고무신을 첫 생산하기 시작했다
국제그룹(國際-)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대한민국의 대기업이었다. 회장은 양정모이다. 프로스펙스라는 상표를 만들기도 하였다.
부산에 지역 기반을 둔 국제고무라는 회사를 모태로 고무신 브랜드 ′왕자표 고무신′을 출시하여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신발을 수출하는 성과까지 이룬다. 1980년대에 이르러 재계순위 7위까지 등극한 국제그룹의 명성은 1985년 전두환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와 함께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국제그룹의 표면적인 해체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의 이유가 있으나, 그룹의 해체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비화가 있으며 정치자금이 타 기업들에 비해 적다는 등의 이유로 당시 전두환 정권에게 미움을 사 해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부의 강제 그룹해체 이후 양정모 회장은 그룹복원을 위해 소송을 내는 등 각고의 노력을 펼쳤으나, 1993년 7월 정부에 의한 국제그룹의 강제해체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통해 명예회복으로 위안을 삼았을 뿐,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모든 주식 지분과 계열사가 대부분 정리되어 여러 타 회사들에게 합병 및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룹복원은 현실적으로 힘들게 되었다.
이후로도 이 그룹 회장 양정모는 1997년 국제그룹 재창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같은해 발생한 IMF 경제 위기와 다시 불거진 정관계 로비 의혹사건으로 인해 좌절했고 2002년 다시 국제그룹의 재창건을 위해 움직였으나, 이듬 해 발생한 신용불량자 100만명 절정사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2007년 또 다시 창건하려고 하였으나 이듬해인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그룹은 끝내 재건하지 못한 채 결국 2009년 봄 세상을 뜨고 만다.
▶2009년김연아,
최초 200점 돌파하며 세계선수권 정상
금메달을 들고 있는 김연아 선수.
▶2004년아일랜드 `금연법` 공포,
술집 등 공공장소서 금연 위반시 벌금 최고 440만원
▶2003년조계종 전(前) 종정 서암스님 입적
▶2003년사스(SARS) 첫 확인한 우르바니 박사,
사스로 사망
사스(S A R S) 첫 확인한 WHO 소속 전염병 전문가 카를로 우르바니(Carlo Urbani) 박사 태국 방콕에서 사스로 사망
(1956년 10월 19일 이탈리아 Castelplanio 에서 출생~)하노이에서
미국 국적의 중국인을 검사하던 중 괴질에 감염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탈리아 국적을 지닌 그는 1998년 WHO에 합류해 하노이를 근거지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공공위생 분야에서 일해 왔다.
▶2003년‘제주 4·3사건’ 정부 보고서 55년 만에 채택
2003년 3월 29일 고건 국무총리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전체회의를 주재하기 전 민간인들과
차를 마시고 있다.
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을 ‘남로당의 무장봉기와 이에 대한 공권력의 무자비한 과잉 진압에 따른 주민 피해’ 로 규정한 정부 차원의 보고서가 사건 발생 55년 만에 조건부로 채택됐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 는 29일 정부중앙청사에서 회의를 열고 내부 기구인 ‘진상조사보고서 기획단’ 에서 제출한 4·3 보고서를 수정, 채택했다. 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4·3사건 원인에 대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고 4·3사건을 규정하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고 김한욱(金漢昱) 4·3사건처리지원단장이 밝혔다. 또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하고,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명예회복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위원회는 기획단에서 건의한 4·3사건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 4·3사건 추모기념일 제정 4·3사건 관련 유가족들에 생계비 지원 등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 을 접수하고 정부차원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한편 지난 21일 ‘보고서 초안이 피해자 사례에 치우쳐 있다’ 며 사퇴 의사를 밝힌 김점곤 경희대 교수는 회의에 불참했다. 또 회의에 참석했던 한광덕, 이황우 위원 등 군(軍)과 경찰을 대표하는 위원들이 보고서 동의를 거부해 논란이 예상되었다.
▶2001년한국계 미국인인 전신애씨,
차관보급인 미국 노동부 여성실장에 지명
▶1999년미국 뉴욕증권거래소 다우존스
사상 처음으로 1만포인트 기록
▶1999년제4차 북미 미사일 회담(평양. -30일)
▶1995년한국, OECD 가입 신청
▶1994년조계사 폭력사태
조계사 승려들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1991년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촉구하는
반정부시위 발생(5만여명)
▶1988년맥도널드 서울 압구정동에 1호점 개점,
첫 한국 진출
▶1983년미국 미사일요격(ABM)체제 집행위 설치
▶1980년루마니아 신내각 발족
1980년 오늘,
영국 출신 미국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사망
▶1975년이집트대통령 수에즈 운하 통행재개 발표
▶1974년진시황릉 첫 발견
병마용으로 가득한 진시황릉.
▶1973년닉슨 미대통령, 베트남 전쟁종결을 선언
▶1967년프랑스 최초 핵잠수함 진수
▶1966년프랑스, 나토 탈퇴
▶1963년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1963년서울대생 자유수호궐기대회
▶1957년일본, 대한청구권 포기 및
을사보호조약 무효선언
▶1951년국회, 국민방위군의혹사건 폭로
국민방위군 지게부대에 지원한 사람들이
대구훈련소에 도착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1946년걸스카우트 발족
▶1937년소설가 김유정 사망
▶1929년항공우편규칙 공포(4.1 시행)
▶1927년월남 이상재 사망
▶1923년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1912년탐험가 스코트 남극서 동사
남극점에 선 스코트 대장(뒷줄 중앙)과 4명의 대원들.
스콧 [Scott, Robert Falcon, 1868.6.6~1912.3.29] 탐험가 스코트 남극서 동사
한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 그 남극점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도전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20세기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이 치열한 경쟁에 아문센(Amundsen, Roald, 1872~1928)과 스코트(Scott, Robert Falcon, 1868~1912)라는 걸출한 두 탐험가가 달려들었다.
출발은 영국의 스코트가 빨랐다. 1910년 6월 1일 영국을 출항한 스코트는 탐험선 ‘테라 노바’의 뱃머리를 남극으로 돌렸다. 1904년에 남위 82도 17분에서 발길을 되돌린 적이 있어 스코트로서는 이번 탐험이 두 번째였다. 그의 조국 영국도 첫 북극점 정복을 미국에 빼앗겼던 터였다.
스코트가 호주의 멜버른항에 도착했을 때 한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람호가 남극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문센. ”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프람호’를 이끌고 2개월 늦게 탐험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아문센 역시 남극탐험은 두 번째.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를 최초로 성공했던 베테랑 탐험가 아문센의 돌연한 등장은 스코트에게는 충격이었고 위협이었다.
탐험의 성패와 생사까지 갈라놓은 것은 스코트의 준비소홀과 아문센의 치밀성이었다. 1911년 10월 20일, 기지를 출발한 아문센의 탐험대 5명이 남극점을 향해 썰매를 몰았다. 52마리의 썰매견이 썰매 4대를 끌었다. 12월 14일, 마침내 관측기 바늘이 90도에서 멈춰섰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출발한 스코트는 중도에 판단착오로 설매를 끄는 말들과 개들을 돌려보내고 사람 넷이서 썰매 하나씩을 끌었다.
1912년 1월 18일, 마침내 스코트도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노르웨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귀로에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1명은 미쳐 죽었고 동상에 걸린 1명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스코트를 포함한 세 사람은 기지를 18km 남겨두고 부둥켜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 1912년 3월 29일이었다.
https://youtu.be/GnmAA0sSmHA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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