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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15일


✿1934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중국 홍군(공산당)이 1만km 대장정을 시작했다.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毛澤東).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탈출은, 장개석이 1년 전부터 70만여명
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
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
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
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주은래와 주덕, 임표, 팽덕회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
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립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혁명
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 2019년 오늘
조국 취임 35일만에 사퇴…“‘검찰개혁’ 불쏘시개 역할, 여기까지”
출처 : 동아일보 | 네이버




▶ 2010년 타잔의 아들 '보이' 조니 셰필드 별세

            1930~40년대 영화 `타잔' 시리즈에서 보이 역할로 출연했던 조니 셰필드가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미 언론이 19일 전했다.
셰필드는 지난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출라 비스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부인 패티가 밝혔다. 패티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와 인터뷰에서 셰필드가 야자수 가지를 치다 사닥다리에서 떨어진 지 4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셰필드는 1939년 영화 `타잔 아들을 찾다'에서 보이 역에 응모한 300여명 가운데 선발돼 데뷔한 후 7편의 타잔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다른 10여편의 영화에서 또다른 정글보이 역을 맡았다가 1955년 영화계를 떠나 다양한 사업을 해왔다.





▶ 2009년 일본 이야마 유타, 최연소 바둑 명인 등극
▶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 2003년  중국 첫 유인우주선 선우저5호 발사
중국이 옛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계 세번째로 사람을 태운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중국 최초의 유인(有人) 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15일 오전 9시(이하 현지 시각, 한국 시각 오전 10시) 정각 발사돼 10분 후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국영 CCTV가 보도했다.

  3개의 모듈로 구성된 선저우 5호는 이날 중국 북서부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기지에서 양리웨이(楊利偉.38) 한 명만을 태우고 창정 2-F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로켓에서 분리돼 고도 200~350㎞의 지구 타원 궤도로 진입했다.

  선저우 5호는 조만간 고도 343㎞ 지점으로 옮겨가 23시간 동안 지구를 14회 선회한 후, 16일 오전 8시쯤 네이멍구 자치구 쓰쯔왕치의 초원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한편, 선저우 5호의 발사 성공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전역은 ‘천년의 꿈을 드디어 이뤘다’며 온통 축제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우주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3년 안에 달 정복, 7년 안에 우주기지 건설을 하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으로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 1999년 오늘,
국경없는 의사회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 1971년 프랑스의 의사와 언론인 12명이 모여 창립.
국경없는 의사회는 1971년 프랑스의사와 언론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전쟁과 기근으로 100여만명이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상황을 직접 겪은 후 이들을 돕기위해 독립된 민간의료단체를 만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 인종등에 구애받지 않고 의료지원이 필요한 어떤 나라이든 차별 없이 원조 하겠다는 이념에 따라 이름도 '국경없는 의사회'로 지었다.
이들은 창설 이듬해인 1972년 니카라과지진 현장에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 ,콩고. 코소보 등
전 세계 거의 모든 재난지역에서 의료구호 활동을 펼쳤다.
지난 1995년에는 대규모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 수해 현장에서 비정부기구 (NGO )로는 유일하게 전염병 예방활동과 의약품 의료장비 지원 활동을 벌여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했다.
현재 '국경없는의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의료지원활동을 펼치는 민간의료 단체로 성장하여 한해 예산이 2억 5천만 달러 에 이르고있다.
세계 20개국에 지부가 설립되어 있고 여기에는 3,000여명의 의사 ,간호사 ,행정요원 등이 상주한다.
또 각국의 1만여명의 자원봉사자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 의료지원이 필요한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언제든지 투입이 가능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 1994년 아리스티드 대통령,
망명지 미국에서 아이티로 귀국
▶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 1973년 소양강땜 준공
1973년 10월 15일, 6년반 동안의 난공사 끝에 동양최대를 자랑하는 소양강댐이 준공됐다. 높이는 수풍댐보다 높은 123m였고 총저수량은 화천ㆍ춘천ㆍ청평 등 한강수계 5개댐 저수용량의 거의 2배에 가까운 29억t이었다. 한국의 총수력 발전용량 62만KW의 3분의1에 해당하는 20만KW의 발전용량은 준공 후 바로 불어닥친 오일쇼크 때 큰 도움이 됐다. 공사과정에서 37명이나 숨졌고 1만8000명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원래 설계는 콘크리트 댐이었으나 이를 생산할 능력이 안돼 진흙과 자갈을 사용해 댐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84년 8월의 대홍수 때는 붕괴위험을 걱정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소양강댐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이었고 여전히 한국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https://youtu.be/ALZXg8nRvKY



▶ 1971년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 1966년 효봉 스님 입적
▶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 1961년 오늘,
소련 니키타 흐루시쵸프 제1서기장 실각.
후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후루시쵸프는 제20차 공산당대회 1956년 2월 비밀연설에서 스탈린식 전제정치를 부인하고 레닌시대 당내 민주화도입 및 생산성향상을 위한 정치,경제 개혁을 추진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스탈린식의 자본주의 포위론과 전쟁 불가피론 에서 탈피 평화공존 노선을 추구하여 대외적으로 해빙기가 도래하였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에 반소 분위기 확산과 함께 농업,
공업생산 저하 등의 경제적실책,
쿠바에서의 미사일철수 사건.
당내 민주화등에 정치개혁에 대한
보수관료의 반발 누적 등으로 1964년 10월 15일 긴급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실각 된다. 이후 집단지도체제를 출범시킨 브레즈네프는
제23차 공산당대회 (1966년 3월)에서
서기국을 장악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브레즈네프는 정치적으로 이념을 중시하는 보수정책을 주창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리베르만의 이윤개념 도입에
의한 경제개혁을 추진(1965)하는 한편, 군비 강화에 주력한다.




▶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 1949년 육군포병학교 창설
▶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롬멜장군이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

   편지는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침공이 있은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음모에 가담한 군인들에 대한 숙청을 하게 된다.  그 과정속에 롬멜 원수의 최측근이며 항상 전선에서 롬멜 원수를 보좌했던 슈파이델 장군이 친위대에 체포되어 행방불명된다.  이런 과정속에서 롬멜은 슈파이델 장군에 대한 체포에 대해 히틀러에게 마지막으로 석방해 줄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물론 롬멜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조사가 진행중인 상황속에서 롬멜은 암살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잔인한 보복을 하는등 거의 폭군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히틀러 총통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게 된다.  롬멜원수도 이 편지를 보낸후 그해 10월 14일 히틀러가 보낸 친위대에게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된다.
   2차대전중 연합군과 독일국민들로부터 군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은 롬멜원수는 마지막까지 조국독일을 위해 충성을 다한 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롬멜이 전투중에 썼다는 롬멜전사록에는 히틀러의 제3제국과 군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한 군인들에 대한 비난을 볼 수 있다.  특히 친위대의 유대인과 러시아인에 대한 학살과 잔학행위에 대해 독일의 전통적인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을 비겁한 군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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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統閣下                                                                                                      1944. 10. 1

불행히도 소관의 건강회복이 여의치 않습니다.  두개골의 四重骨折(사중골절)로 인한 고통과 부상 이래 서부전선의 악화 등으로 번민해 왔습니다.  오늘 우연히도 소관의 전참모장 슈파이델 장군의 해임과 체포 소식을 듣고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에 빠져 있습니다.  소관에게 이 이상의 시련은 없을 것입니다.

슈파이델 중장은 1944년 4월, 가우제 중장 후임으로 소관의 참모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자이쯜러 Zeitzler 상급대장이나 그의 군사령관이던 뵐러장군 들로부터 신뢰받던 인물이며, 집단군참모장으로 임명되기 직전 각하로부터 마사십자동장을 수여받아 중장으로 승진되었습니다.  슈파이델은 남부전선에 처음 부임하자  그 탁월한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군무에 정진함으로써 명참모장으로서 상하의 신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모부를 잘 장악하였고 각 부대의 실정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파악하는 동시에 가용한 모든 수단을 다하여 대서양 방벽의 완성에 있어서 성심 성의껏 소관을 보좌해 주었습니다.  소관이 연일 제일선부대를 시찰하는 동안, 슈파이델은 사전에 지시된 소관의 명령을 각군에게 하달함과 동시에 소관의 지침에 따라 상급사령부 및 隣接軍(인접군)과의 훌륭한 조정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전투가 개시되자 슈파이델은 우세한 공군력, 강력한 해군의 함포 사격 및 기타 물량에 의존하는 적에 대해 극히 곤란한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승리를 얻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소관이 부상당할 때까지 그는 충실하게 소관을 보좌했습니다.  클루우게원수 역시 그를 크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소관은 슈파이델중장이 왜 해임되고 체포되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친위대 제프 디트리히 Sepp Dietrich중장과 슈파이델은 서로 교분이 두터운 사이이며 서로 왕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르망디 전투시, 적이 해상에 있을 때, 아니면 상륙하는 순간에 격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소관이 앞서 제출한 보고서를 쉬문트 장군이 각하를 보좌할 당시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클루우게 원수가 서부전선에 도착하여 지휘권을 인수한 다음, 소관의 참모장과 작전 참모의 면전에서 소관에게 매우 불유쾌한 언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관은 동원수의 비난을 듣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소관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으며, 더 나아가 다음 날 그 비난의근거에 대해 클루우게원수의 해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클루우게원수는 소관과의 회담에서 구두로 자신의 비난을 철회했읍니다마는 이 때 소관은 클루우게 원수에게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제일선상황을 명확하게 보고할 것과 불유쾌한 사실이 있더라도 이를 숨기지 말고 보고하도록 강조했습니다.  각하께서 이와 같이 솔직하고 명확한 보고를 받으심으로써 모든 실정을 소상히 알게 되어 올바른 결심을 내리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관의 마지막 전황 보고는 소관이 부상당하기 하루 전에, 서부방위군총사령관에게 제출했습니다.  클루우게원수로부터 후일 들은 바로는 동원수가 이를 보완하여 제출했다고 합니다.

존경하옵는 총통 각하,1940년의 서부진공작전,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의 아프리카전투, 그리고 1943년 이탈리아와 1944년의 서부방위작전에 있어서 소관이 미력하나마 전심 전력을 한 것에 대해 각하께서는 통촉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소관의 염두에는 새로운 독일을 위해 싸워, 최후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일념뿐입니다.
  총통만세 !
                롬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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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보낸 후에도 슈파이델 장군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리고 10월 7일 한통의 전문이 롬멜원수에게 도착했다. 카이텔 원수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10월 10일 중요한 회의가 있기 때문에 베를린에 출두하라는 내용이었다.  롬멜은 전문의 내용--베를린에서 7월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음모와 관련하여 체포할 것이라는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회의 참석을 거부한 롬멜은 10월 14일 히틀러가 직접보낸 나치 친위대 장교로 부터 총통의 뜻을 전해듣고 롬멜은 약을 먹고 자살하게 된다.  히틀러는 롬멜에게 만약 자살한다면 가족은 무사할뿐 아니라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뤄주겠다고 약속했다....2차 세계대전동안 독일과 유럽, 그리고 연합군에 이름을 날렸던 한 장군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1934년 10월 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탈출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1년 전부터 70만여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주더(朱德, 1886~1976), 린뱌오(林彪, 1907~1971),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립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장제스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도처에 전파했던 것이다.



▶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 1925년 서울역사 운수영업 개시
▶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 1920년 오늘,
미국의 작가 마리오 푸조 출생.
소설 대부 (The Godfather),의 원작자이다. 영화 대부의 각본을 썼으며 슈퍼맨의 스토리와 각본도 담당했다.






▶ 1917년 마타 하리 총살

이중간첩 '마타하리처형'!
세기의 여간첩으로 유명한 마타하리 그러나 영국 정보기관 mi5는 1차대전 이후에 각종 첩보활동등이 기록된 비밀문서를 공개하면서 "마타하리는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마타하리는 체포된 후 자신은 절대 전문적인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않았다. 이전까지 프랑스측 주장은 마타하리가 'h21'이라는 암호명으로 프랑스 정,관계를
암약해 입수가능한 모든 정보를 독일측에 팔아넘겼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마타하리를 프랑스정보부에 넘기기 전까지 3차례에 걸쳐 심문했었다.
마타하리는 인도네시아어로는'낮의 눈동자' 즉 태양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마타하리의 인생은 결국 어둠의 세계로 이어지고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세상 잘 된 일에는 남자가 우선시 된다.
나라를 건국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라의 번영과 영광은 모든 남자들이 우선순위로 취득한다.
그러나 나라의 멸망, 전쟁에 패배, 등의 이유에는 남자의 잘못이 아니라, 여자에게 그 원인을 떠넘긴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그러하다! 동탁의 멸망은 초선이며, 당나라 멸망은 양귀비이며, 대한제국의 멸망은 명성황후에게 있다고 덮어씌운다.
프랑스는 국민통합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 마타하리라는 여성을 이용한것에 불과하였다.




▶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 1844년 독일 철학자 니체 출생

  니체 [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旗手)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 die》(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悲劇)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再興)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 Unzeitgem sse Betrachtungen》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天才)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偶像)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黎明) Morgenr te》(1881) 《환희의 지혜 Die fr hiliche Wissenschaft》(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成熟期)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地上)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永劫回歸)에 의해 삶의 긍정(肯定)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超人)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彼岸) Jenseits von Gut und B se》(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生肯定)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系譜學)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弱者)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强者)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意志)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至高)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矮小化)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彼岸的)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此岸的)·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 1815년 오늘, 프랑스의 나폴레옹1세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다. 6년 동안의 유배생활 끝에 생을 마치다!




▶ 1582년 그레고리력 사용 시작
▶ 1581년 기록상 최초의 발레 공연
▶ 1407년 경상도 개령, 지진 발생


https://youtu.be/r2ZNc5bHsF8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