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반란
토벌군과 반란군을 구분하기 위한 흰 띠
1948년 10월 19일 밤 8시.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25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했다. 이윽고 “경찰을 타도하자”는 구호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자 장병들은 “옳소”라며 호응했고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5개월 전 향토경비대로 창설된 14연대는 이튿날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평소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병들은 이미 침투해 있는 공산당 지하조직의 선동으로 반란 분위기에 휩쓸렸다. 당시의 군은 미군정의 남로당 해산령을 피해 군에 입대한 좌익들에 의해 적화돼 있었고, 남로당은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
무장한 장병들이 여수시내로 뛰쳐나간 시각은 20일 오전 1시20분쯤이었다. 오전에 이미 여수경찰서를 포함, 관공서·은행까지도 이들 손에 넘어갔고 거리는 온통 인공기로 물결쳤다. 오전 8시 반란군은 열차를 타고 순천까지 북상, 그날 밤 순천도 장악했다. 뒤이어 광양, 곡성, 구례, 고흥 등도 반란군이 장악했다. 정부는 22일 계엄령을 선포,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지만 여수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 차례의 진압이 모두 실패하자 26일에는 바닷가 경비정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상륙을 시도했다. 27일에야 9일 동안의 반란사건이 겨우 진압됐으나 2,300여 명이 사망했고, 2.800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주한미군의 철수가 연기됐으며 군내 좌익들도 척결됐다. 도망친 반란군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6.25를 맞았다. 한국전쟁의 서곡이었다.
▶2005년1987년 착공한 `평화의 댐` 준공식
▶2005년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대통령 재판
▶2004년골프여제 애니카 소렌스탐 2004년 ‘올해의 여자 스포츠 선수’ 선정
▶2000년2억5천만년 동안 가사(假死)상태에 있던 미생물이 회생됐다는 논문, `네이처`지에 게재
2억5천만년 동안 가사(假死)상태에 있던 미생물을 미국 웨스트 체스터대 연구팀(D. 벨스키 외 10명)이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이 연구팀은 1998년 10월 뉴멕시코 칼스배드의 쓰레기처리장 터파기 공사중 발견한 암염(岩鹽 소금결정)에서 살아있는 미생물을 추출, 회생시킨 결과를 과학잡지 `네이처`誌 2000년 10월 19일자에 게재했다.
2억5천만년 동안 가사상태에 있던 미생물이 회생됐다
이번에 연구팀이 복원한 미생물은 방사성 분석과 유전자 서열분석 결과 2억5천만년 전 `후기 이첩기(二疊紀)`에 산채로 갇힌 포자(胞子)를 형성하는 바칠루스속(屬) 미생물의 조상으로 나타났다. 이 미생물은 이미 사해의 퇴적층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 `바칠루스 마리스모르투이`와 같은 계열이다. 연구팀은 처음 이 미생물의 이름을 `2-9-3`이라고 명명했으나, 네이처지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969년간 살았다고 기록된 유대인 족장 이름을 따서 `므두셀라`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번 연구결과는 가장 오래된 고대 생물을 회생시킨 것으로 그동안 지구 생명체의 역사가 수억년간 가사 상태로 우주를 떠돌던 `생명의 씨앗`이 지구에 정착하면서 비롯됐다는 과학계의 가설을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할 전망이라고 AFP통신은 전했다. 이번 연구결과가 입증된다면 미생물의 생존 능력이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길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1995년박계동 의원,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을 주장
대정부질의 1995년 국회대정부질의에서 민주당의 박계동의원,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조성을 발표했다.
박의원은 10월19일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에 40개 계좌에 차명계좌형태로 나뉘어 예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박의원은 이날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을 통해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의 일백억원씩 40개 계좌로 분산예치되어 있다"며 이중
3백억원은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
되어있다고 주장했다.
박의원은 특히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300억원 가운데 일백억원은 당시 은행 관계자들로부터 의뢰를 받은 하종욱씨의 부친인 하범수씨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후배인 하종욱씨로부터 차명계좌개설 당시 은행 관계자들이 1백억원 차명계좌에 의뢰인이
노 전대통령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박의원은 이날 노 전대통령 퇴임직전인 지난 93년 1월말까지 4,000억원 비자금이 상업은행 효자동지점에 예치되어 있었다. 당시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이원조 전의원은 시중은행에
영업담당상무를 소집해 차명계좌 확보를 지시했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이어 같은 해 2월 1일 "4,000억원은 1백억원짜리 수표40장으로 인출되 동화은행, 신한은행등 시중은행에 40개계좌에 분산 예치됐다"고 주장했다. 신한은행의 경우 모두 600억원이 배당되어 이중 서소문지점에 300억원이 예치됐다고 주장했다.
박의원은 서소문지점에 300억원은 당시 지점장이었던 이우근씨의 동서와 지점 차장이 었던 이화구씨에 처남명의로 각각
100억원씩 예치됐으며 나머지 100억원은
(주) 우일양행 하범수씨 앞으로 예치됐다고 말했다.
박의원은 이날 우일양행의 하씨 명의로
128억원이 예치된 신한은행의 예금조회표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박의원은 이와 관련해 시중은행에 예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4천억원의 예금도 하씨 명의계좌를 역추적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 이라며,
검찰은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수사에 즉각 착수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박의원은 또 "지난 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를 맡았던 황승희 전 검사가 이 계좌의 일부를 확인했으나 당시 청와대민정수석이 었던 김영수씨의 지시로 수사가 중단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개혁성향의 박계동의원은 선거법 위반2심 선고공판에서 벌금 600만 원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될 경우 박계동전의원은 오는 16대 총선에서도 출마 할 수 없다.
박계동의원의 혐의는 지난 96년 4.11총선 때 민주당 유세위원장으로서 사전선거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1심에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1991년소설가 정비석 사망
원로작가 정비석씨가 숙환으로 1991년 10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80세였다. 작가 정비석씨는 `자유부인` `소설 손자병법` 등 22편의 장편소설을 신문에 연재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을 추구해온 전문 대중작가였다. 정씨는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대담하게 묘사하는 등 `읽히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55년 동안 소설쓰기에만 몰두해온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소설가 정비석
1936년 단편 `졸곡제`와 이듬해 단편 `성황당`이 각각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 작품활동을 시작한 정씨는 해방 전까지 1백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초기의 작품들이 보여준 토속세계에 바탕을 둔 건강한 원시주의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정씨는 1941년 발표한 장편 `청춘의 윤리`에서부터 애정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태소설을 쓰기 시작, 본격적인 대중작가로 변신했다.
특히 빈약한 독서시장에도 불구, 7만권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부수가 팔린 `자유부인`은 사회적인 `성도덕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정씨를 인기 있는 대중작가로 확고히 자리잡게 해주었다. 이후 각 일간지에 연재한 `비정의 곡` `여성의 적` `여인백경`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성의 문제를 주로 다뤄 대중 연애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뉴욕주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폭락(블랙먼데이)
▶1981년소련, 중국에 중소국경회담 재개를 제의
▶1980년송요찬 전 내각 수반 사망
▶1980년그리이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복귀
▶1977년서양화가 도상봉 사망
▶1973년최종길 교수 의문사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인권 탄압이 극에 달했던 유신 초기에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던 중 1973년 10월 19일 사망했다.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당시 42세).
최종길 교수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스위스 취리히 대학,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2년부터 서울대 법대에서 가르쳤다.
최 교수를 조사한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수사 받던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 혐의를 자백하고 7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고인을 보며 유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고문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속에 소리소문없이 장례식을 가졌다.
유족들은 “투신자살했다는 시간은 중앙정보부의 모든 창문이 잠겨져 있을 시간이며, 투신현장이 공개되지 않았고, 부검조차 거부됐으며, 거듭된 협박에 급히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으로 유신정권의 고문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주장했다.
유신반대가 한창 심할때 서울법대 학생과장을 지냈던 고인은 ‘신성한 캠퍼스가 경찰에 짓밟힌다’며 학생들을 감쌌고 결국 정권의 눈 밖에 났었다. 최 교수의 죽음은 유신체제가 빚어낸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이었다.
▶1972년서울 자유시장에 화재. 120점포 소실
▶1970년멕시코의 대통령(1934-40) 카르데나스 사망
▶ 1970년 영국 북해 석유시추 성공
1970년 10월19일, 영국이 경사를 맞았다. 북해 포티지역에서 유전을 찾아낸 것. 노르웨이와 덴마크 지역에서 원유가 발견된 적은 있어도 영국 해역에서 기름이 솟은 것은 사상 최초. 본격 발굴에 나선 지 15년 동안 33번째 시추에서 얻은 결과여서 기쁨이 더욱 컸다. 북해에 원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온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32년 만의 결실이다.
횡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브렌트 유전을 비롯한 거대 유전이 속속 터졌다. 유전 규모도 ‘경제성 있음(economic)’과 ‘큰(big)’ ‘대형(large)’ ‘초대형(giant)’을 넘어 거대급(elephant)이었다. 영국이 유전을 찾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끈기와 과학기술. 북해의 거친 강풍과 파도를 견디며 해저 수백미터를 시추할 수 있는 신기술과 첨단 장비 덕분에 유전이 뚫렸다.
북해유전은 영국 언론의 표현대로 ‘신의 축복’이었다. 해마다 30억~40억 파운드 적자를 기록하던 재정이 원유가 본격 생산된 후 60억 파운드 흑자로 돌아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1976년)도 석유 수출 덕분에 재빨리 갚을 수 있었다. 대처 수상의 개혁도 북해산 원유 덕분에 힘을 얻었다. 새로운 산유국 영국의 등장은 국제유가를 크게 떨어뜨려 배럴당 34달러였던 유가가 1980년대에는 10달러선까지 내려갔다. 요즘도 북해에서는 영국과 노르웨이 등 7개국이 운영하는 131개 유정이 원유와 가스를 뽑아내고 있다.
문제는 고갈이 머지 않았다는 점. 2020년이면 바닥을 보일 전망이다. 생산도 1990년 이미 정점을 지났다. 영국조차 원유 순수입국으로 돌아섰다. 북해유전이 선사한 축복은 이제 재앙이다. 나날이 치솟는 유가에는 자원고갈이라는 저주가 담겨 있다. 파티는 끝났다.
▶1963년한국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에 조선일보사 방일영 대표 선임
▶1963년고재봉 도끼살인사건 발생
▶1962년한국-세네갈 국교 수립
▶1962년예멘 왕당파, 바드르공을 왕으로 핫산공을 수상으로 임시정부 조직
▶1961년 자유당의 비호를 받던
#정치깡패 #이정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1960년대한일보 창간
▶1959년유엔 사회인도문화위원회, 아동복리에 관한 선언문 채택(어린이인권선언)
▶1957년서독, 유고와의 국교단절 선언
▶1956년일본-소련, 국교회복공동선언 및 통상항해의정서 조인
▶1955년중국-북한, 무역협정 체결
▶1954년영국-이집트, 수에즈운하협정 조인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기사의 계산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공사가 재개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총연장 161km의 운하가 개통되었다.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이집트대통령 압델 나세르에 의해 1956년 7월 수에즈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불란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수에즈운하를
강제점령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6일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에 폐쇄 8년만인 1975년
재개통되었다.
하루 평균 100여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 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시간은 약15시간이 걸린다. 운하의 폭은 200m, 평균수심은 20m, 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준설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km에 달한다.
이 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들어가는 연결 지점은 네 곳의 나루터와 한 개의 해저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km이다.
현재, 전세계 3대 해상루트는?
1.수에즈운하(동,서양 연결루트)>>>
>>>호르므즈해협(이란이 눈 부릅뜨고 있음)
*이래서 미국은 이란을 가만둘 수 없음.
2.파나마운하('노리에가' 파나마대통령
까불다가 미해병대에 박살나고 미국으로
끌려감).
3.말레카해협-말레이시아반도끝(싱가포르)과
인도네시아 사이 항로.
위3개 해상루트를 6개함대,10대의 항모전단이 전세계를 커버하고있다.
물론, 영국의 꼽사리도 무시할 수 없음!
(참고,1개 항공모함전단의 화력은
웬만한 국가전체의 전력을 능가한다)
▶1953년공산측, 한국통일문제의 판문점 정치회담 예비회담 동의
▶1950년유엔군 평양 탈환
▶1949년정부, 남로당 등 133개 정당-사회단체 등록 취소
▶1948년여수 14연대 반란
▶1948년일본, 제2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 성립
▶1948년대한식량공사 발족
▶1948년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1939년터키, 영국 프랑스와 상호원조조약에 조인
▶1938년비운의 혁명가 김산, 중국공산당에게 처형
비운의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반혁명 간첩 혐의로 몰려 1938년 10월 19일 처형됐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실 10월 19일은 그의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지만, 이날은 김산의 경력을 심사한 중국 공산당 측에서 "완전히 조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간첩`으로 처형한다"는 결정이 난 날이다. 그리고 그는 전선으로 가는 도중 갑작스럽게 처형됐다.
김산이 27살때 중국 천진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되어 있을 당시 촬영한 사진
김산은 혁명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사상가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1905년 평양 근교 용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일제의 만행을 확인하고 1921년 만주의 군사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와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에 영향을 받으며 지하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25년 말 그는 광주에 있는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한편, 후에 손문대학으로 바뀐 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발전 역사를 공부했다. 1927년 12월 김산은 광동코뮌에 참가했으며, 공산당이 패배한 뒤에는 테러가 난무하는 와중에서 빠져나왔다. 1928년 9월 천신만고 끝에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온 김산은 곧 북경(베이징)으로 가 북경의 북평시 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 11월 장제스의 비밀경찰에 체포돼 일본 영사관으로 압송됐다가 이듬해 4월 풀려나 북경으로 돌아왔고, 1933년 다시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다가 역시 이듬해 석방됐다. 그러나 구금기간이 예상보다 짧아 공산당 간부들은 그를 일본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당적복권은 보류됐다. 결국 김산은 트로츠키파 축출을 위한 이른바 '서간공작'에 연류돼 죽임을 당해야했다.
그 후 1983년 중국공산당이 "김산에게 덮어씌운 누명을 벗기고 명예와 당적을 회복시킨다"고 선포함으로써 45년 만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잊혀질 뻔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산의 행적은 김산이 1937년에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으로 신문기자였던 님 웨일즈를 만나 3개월 간 20회의 구술을 통해 신비와 고뇌에 찬 자신의 짧은 생애를 밝혔기 때문이다. 이후 님 웨일즈는 당시의 구술 내용을 1941년 `아리랑 Song of Arirang`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뉴욕에서 출간했다.
▶1937년원자 물리학의 기초 확립자 어니스트 러더퍼드 사망
▶1936년중국 작가 루쉰(魯迅) 사망
1936년 10월 19일 유교적 봉건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문화 창출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소설가 루쉰(魯迅)이 사망했다. 그는 중국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문예운동가였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며 혁명적 지식인의 본보기를 보여준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1918년 발표한 `광인일기`는 중국 현대문학의 문을 처음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아큐정전(阿Q正傳)`은 중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맞먹는 명작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집 `외침`은 1999년 홍콩의 `아주주간`지가 의뢰하고 문학평론가가 선정한 20세기 중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힐 정도로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다.
루쉰이 살았던 188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는 그의 조국 중국이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그리고 국내 파시즘의 발톱에 할퀴어 만신창이가 된 시기였다. 이 암울한 중국의 현실에서 루쉰의 선택은 싸움뿐이었다. 파시즘과 국민당 정권 그리고 패배주의와의 싸움이었다. 정치적 목적에의 복무를 표방하며 발표한 작품은 단편소설, 역사소설, 산문, 시 등 여려 형태로 표현됐지만 그의 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잡문`이라는 독특한 장르였다.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인 잡문은 루쉰 이전부터 현대 중국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지만 루쉰의 등장으로 잡문은 비로소 문학의 성격을 띠었으며 갈고 닦여졌다. 잡문을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언제나 `진보에의 열망`이었다.
루쉰 [魯迅(노신), 1881.9.25~1936.10.19]
1936년 10월 19일 유교적 봉건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문화 창출을 위해 일생을 바친 소설가 루쉰(魯迅)이 사망했다. 그는 중국 신문학의 선구자이자 문예운동가였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며 혁명적 지식인의 본보기를 보여준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1918년 발표한 '광인일기'는 중국 현대문학의 문을 처음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아큐정전(阿Q正傳)'은 중국인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맞먹는 명작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작품집 '외침'은 1999년 홍콩의 '아주주간'지가 의뢰하고 문학평론가가 선정한 20세기 중국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힐 정도로 그의 작품은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았다.
루쉰이 살았던 188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는 그의 조국 중국이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그리고 국내 파시즘의 발톱에 할퀴어 만신창이가 된 시기였다. 이 암울한 중국의 현실에서 루쉰의 선택은 싸움뿐이었다. 파시즘과 국민당 정권 그리고 패배주의와의 싸움이었다. 정치적 목적에의 복무를 표방하며 발표한 작품은 단편소설, 역사소설, 산문, 시 등 여려 형태로 표현됐지만 그의 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잡문'이라는 독특한 장르였다.
짧은 에세이 형식의 글인 잡문은 루쉰 이전부터 현대 중국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지만 루쉰의 등장으로 잡문은 비로소 문학의 성격을 띠었으며 갈고 닦여졌다. 잡문을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언제나 '진보에의 열망'이었다.
▶ 1933년 오늘, 한글 맞춤법 통일안 마련.
분단 직후 남북한에서 공통으로 실시되던 맞춤법은 주시경선생의 맞춤법이론이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손을 거쳐 1933년에 공포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었다.
이 통일안은 1937년, 1940년, 두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개정에 손길이 미쳤으며
광복 이듬해 1946년에 수정을 가하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원칙과 뼈대는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남북한의 맞춤법은 1948년 7월 북쪽의 조선어신철자법공포가 계기가 되어 분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3년역둔토(驛屯土)특별처분령 공포(일본이민의 토지대여에 우선권 부여)
▶1909년이탈리아의 정신의학자 체자레 롬브로조 사망
▶1906년경향신문 창간
▶1894년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출생
▶1859년프랑스의 장교 드레퓌스 출생
▶1812년나폴레옹1세의 러시아 원정 실패
▶1781년미국 독립전쟁 종식
▶1745년`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스위프트 사망
'소인국의 걸리버', '거인국의 걸리버', '하늘나라의 걸리버'...
기상천외한 모험기로 어린이들에게 인기있는 걸리버 여행기 그러나 이 책은 사실은 아동용 동화가 아니라 통렬한 사회풍자소설이다. 정치인들을 지켜보는게 구역질나고 정치뉴스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는데 신물이 날 때면 걸리버 여행기를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독일의 어느 평론가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평하기도했다. 1745년 오늘 사망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 제국주의의 불합리와 모순 나아가 문명세계의 허위와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야유했다.
가령 '소인국'에서는 공직에 오르려면
왕 앞에서 줄타는 실력을 보여야 한다든가 계란을 위쪽으로 깰 것인가 아래쪽으로 깰 것인가가 원인이 되어 이웃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얘기는 당시 영국사회 부조리와
꽉 막힌 형식주의에 대한 풍자였다.
'대인국'사람들의 입을 빌려서는 세계를 호령한다고 자부하는 대영제국이 실은 결코 거인이 될 수 없는 소인배의 나라임을 시사한다.'라퓨타'라는 날아다니는 섬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이 전도되고, 학자들은 전혀 비현실적인 연구에 몰두하느라 허송세월한다.
스위프트의 풍자는, '인간'과 '말'의 처지가 뒤바뀐 마지막 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말'은 고도의 이성과 맑은심성을 지닌 현자로 그려지는 반면, 인간의 형상을 한 '야후' (인터넷 포털인 야후는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라는 족속은 더럽고 포악한 동물로 묘사된다.
▶1739년영국, 에스파냐와 식민지 전쟁 시작
▶1405년창덕궁 준공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로거 안젤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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