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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21일

✿ 1995년 10월 21일백제 27대 왕명
(‘창왕(昌王)’)이 명기된 사리감 발견

가로·세로 각 50cm, 높이 74cm의 크기로
전면 가운데 사리를 넣을 수 있도록 홈을 팠으며 홈 주위에 20개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뒤편에 보이는 것은 앞면에 쓰여진 글자의 탁본.

1995년 10월 21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 고분에서 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 박물관은 능산리 유적의 금당 남쪽 목탑지의 중심에서 높이 80cm, 가로·세로
50cm 정도 크기의 돌로 만든 사리감을 발굴했다.
이 사리감에는 ‘창왕(昌王)’이라는 왕의 이름과 제작경위 등을 밝히는 명문이 적혀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창왕은 서기 554년부터 598년까지 재위
했던 백제말 위덕왕의 원이름이며 백제의 수도를 웅진으로부터 사비성으로 옮긴 성왕의 아들이다.

‘백제창왕’ 명문이 있는 사리감은
학계에서 ‘세기의 발굴’로 평가받고 있다.

잊혀진 역사 백제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결정적 자료가 될 20자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사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2011년 LS그룹 공동경영 기틀 잡은
구두회 명예회장 별세
▶ 2004년 헌법재판소,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수도이전법’ 위헌 결정
▶ 2002년 뇌신경세포 재생기술 첫개발.
연대의대 박국인 교수팀. 뇌성마비 등 치료 길 열림
▶ 1998년 미 상원, 예일대 법대 교수
고홍주씨를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인준
▶ 1996년 서울국제에어쇼96 개막
(~27일, 성남 서울공항)
▶ 1995년 백제 27대 왕명( '창왕(昌王)' )이 명기된
사리감 발견


▶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출근길 차량들로 붐비는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꽝" 소리와 함께 북쪽 상판 이음새가 먼저 끊어지고 이어 남쪽 상판이 떨어져 나갔다. 버스와 승용차 6대가 상판과 함께 강물로 추락하고 북쪽으로 달리던 시내버스는 끊긴 다리 끝부분에 뒷바퀴가 걸리면서 한바퀴 빙글 돌아 떨어졌다.
사고현장은 비바람 속에 휴지처럼 구겨진 추락차량과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들로 뒤범벅돼 있었고 바닥과 천장이 닿을 정도로 찌그러진 버스에서 학생들의 책가방, 안경, 볼펜, 도시락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날 사고로 무학여중고생 9명을 포함, 모두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성수대교 참사는 단순히 콘크리트 건조물 하나가 무너진 붕괴사고가 아니었다. 다리와 함께 온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나라가 함께 무너져 내렸으며 한국적 성장신화의 부끄러운 이면을 드러내는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1997년 7월 3일, 32명의 귀중한 인명을 앗아갔던 성수대교가 붕괴 2년8개월 만에 재개통됐다. “트러스 부재중량 7천4백4t에 지진 강도 5에도 견디고…” 라는 자랑과 함께.




▶ 1992년 전 서울고검장 최대교씨 별세
▶ 1991년 한국-라트비아, 국교 수립
▶ 1990년 한국, 중국과 무역사무소 개설 합의
▶ 1989년 온두라스 항공사 소속
보잉 727여객기 추락. 131명 사망
▶ 1986년 내외통신, 북한이 금강산댐 공사를
시작했다고 평양방송을 인용 보도
▶ 1984년 프랑스 영화감독 트뤼포 사망
▶ 1981년 중공, 대만에 스포츠교류를 제의
▶ 1980년 환경청, 환경영향평가제 실시키로 결정
▶ 1977년 카터 미국대통령, 주한미군 지상군 철군보완 8억달러 한국에 무상공여토록 의회에 승인 요청
▶ 1973년 유엔안보리, 중동전쟁 종식에 관한
미소(美蘇) 공동안 채택
▶ 1969년 덴마크서 사상 첫 성(性)박람회 개막
▶ 1969년 브란트 서독수상 피선. 사민-자민당 연립 성립
▶ 1968년 민복기 5대 대법원장 취임
▶ 1967년 워싱턴서 대규모 반전시위
▶ 1966년 박정희 대통령 마닐라 7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 방문



▶ 1964년 아베베, 도쿄올림픽 우승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주69명 중 무명의 흑인 주자 한명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  2시간 15분 16초 세계 신기록,  아프리카인 최초 마라톤 우승.   4년 뒤 도쿄 올림픽 마라톤 경주  다시 2연패 우승 ​  더구나 6주 전에 맹장수술을 받았다.  두 차례에 걸친 이탈리아의 침공. 고난과 시련의 조국 에티오피아
“나의 조국이 강인하게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더이상 내 다리는 달릴 수 없지만 나에겐 아직 두 팔이 있다.“ 맨발의 아베베 장애인 대회 참가




▶ 1963년 유엔, 중공 가입안 부결
▶ 1963년 미국, 유럽과 태평양에 핵미사일 배치



▶ 1962년 오늘, JFK, 쿠바 봉쇄 선언!
쿠바 미사일위기 고조.
쿠바는 1959년 1월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쿠바혁명정권은 곧바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했으며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하는 획기적인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특히 1959년10월에는 쿠바에서 미국의 이권을 폐기하고 미국자본이 착취하는 것을 제한했으며, 1960년에는 미국계기업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곧 반봉건 토지소유죄와 외국자본을 근절 했으며, 1961년 5월에 쿠바혁명주체는 사회주의혁명을 선언하고 1962년부터 사회주의 건설 4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이러한 쿠바의 움직임은 당연히 미국과의 관계를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1960년의 미국은 쿠바로부터 사탕수수 수입을 대부분 삭감했으며, 중요물자에
수출금지로 쿠바에 경제적인 압력을가했다. 1961년 1월에는 국교가 단절되고
미국내에서 결성된 쿠바혁명의회
의장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동년 4월 반혁명군을 인솔하고 쿠바 동남부에 상륙 '카스트로정권 타도'를 계획하였으나 오히려 진압되었다.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공격의 위협을 느낀 쿠바는 급속도로 소련에 접근하였고 1962년에는 소련과 쿠바의 무기원조협정에 따라 쿠바의 미사일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캐네디정권은 10월 23일 미사일 기지 철거와 핵미사일 반입금지를 요구하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명령을 내려 핵전쟁의 위험으로 전세계를 동요시켰다.
미국과 소련정상이 긴박하게 대응한 결과 소련은 미사일기지를 철거하고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전 세계를 핵전쟁의 제3차 대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26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 하겠다는 뜻을 미국의 전달하고 27일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 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의 상호 철수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27일의 제안을 무시하고 26일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28일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선단의 방향을 소련으로 되돌림으로써 11월 2일 위기는 사라졌다.
소련이 쿠바로부터의 폭격기철수를 동의한 20일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었으며 12월 7일 소련은 공격용무기를 쿠바로부터 철거 하였음을 미국에 통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미소간에'핫 라인(Hot line)'이 개설되었고,
핵전쟁 회피라는 공통의 과제하에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에서 당한 소련의 굴욕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적어도 미국과 대등한 핵능력을 보유하겠다는 소련의 비장한 결의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쿠바에서의 케네디의 승리는 곧바로 흐루시초프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그는 '바보스럽게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했으며 비겁하게 일을 철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61년 미국 마이다스 미사일경보로케트를 발사
▶ 1959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의 날 제정
▶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10.15 구보타(久保田)
망언으로 무기휴회
▶ 1950년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제네바협약 국제적으로 발효
▶ 1950년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 육군특무부대 창설
▶ 1949년 일본, 재일교포학교 폐쇄령 발표
▶ 1945년 국립경찰 창설
(경찰의 날 제1회는 1946,10,21. 1957년부터 제도화)
▶ 1938년 일본군, 중국 광동 점령



▶ 1920년 청산리 대첩                
청산리독립전쟁 승전을 기념하는 독립군(사진=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청산리 대첩

  1920년 일본군이 대거 간도로 출병하자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등 우리 독립군 2800여명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그래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군은 백두산 동북쪽 60여km 지점에 있는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 위쪽 계곡에 포위망을 쳐놓고 전투준비에 돌입했다.
10월 21일 오전9시, 일본군 부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자 매복하고 있던 북로군정서군으로부터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20분 만에 끝난 전투에서 200명의 일본군이 사살됐다. 6일간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3000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의 첫 승리였다.

  다시 김좌진 부대가 밤을 새며 이동한 곳은 120리 떨어진 천수평이었다. 22일 새벽에 이곳에서 일본군 1개 중대를 섬멸한 부대는 반격에 대비, 어랑촌으로 장소를 옮겼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속에서도 독립군은 언제나 연전연승이었다. 어랑촌에서는 청산리 대첩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려 일본군 500명을 사살했다. 26일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란한 승전보로 기록된 ‘청산리 대첩’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1919년 3·1운동 당시 이 땅의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독립을 갈망했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만으로 일제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새긴 이들은 무기를 손에 들었다. 1920년 1월 초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안창호가 행한 연설은 이를 웅변한다.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려는 방침을 고쳐 전쟁하려 함이오.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요.”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이 펼친 국내 진공작전, 특히 홍범도가 그해 6월에 거둔 봉오동 승첩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 “중국 땅에서 전사한다면 개죽음과 같다.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 결빙을 기다려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독립군은 홍범도의 증언처럼 물러서기는커녕 조국을 향해 진군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중국 지린(吉林)성 청산리 백두산 기슭 험준한 밀림지대 속 깎아지른 절벽 사이 골짜기로 향하는 오솔길 초입에 펼쳐진 개활지 백운평에 아침이 찾아들 때였다. 산허리와 절벽 위에 숨죽이며 몸을 숨긴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의 총구는 계곡 쪽으로 들어서려는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이날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독립군 연합부대는 완루구·어랑촌·고소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맞붙었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명은 대소 전투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청산리 대첩에서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 우세였던 ‘무적 황군’을 상대로 독립군은 어떻게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오호라, 3일간의 전투에 식량이 다 떨어져 대여섯 개 감자로 고픈 배를 겨우 채우고,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 밀림을 통행하되 터럭 하나만큼도 기운을 잃지 않았으며, 전투 후에도 수천백 리 삼림과 눈밭을 지나며 동상을 입은 사람이 적지 않되 조금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음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

  지형과 지세를 잘 이용한 뛰어난 전술과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군 한 명 한 명이 품고 있던 불굴의 결사항전 의지가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 1918년 체코 공화국 선언



▶ 1913년 오늘,
헝가리계 유태인이며 미국인인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부다페스트에서 출생!

1954년 5월 25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사망.
프랑스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
헝가리계 유태인이자 미국인으로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포토스에 설립자인 동시에 20세기에서 유명한 전쟁 포토 사진작가로 에스파냐내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 제1차 중동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취재하였다.




▶ 1912년 일본 헌정당, 대한(對韓) 정책선언서 발표


▶ 1906년 오늘,
근대 회화의 거장 폴 세잔느 사망.

폴 세잔느는 1839년 남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다가 1906년에 죽었고, 지금도 그곳 묘지에 묻혀 있다.
마르세유에서 기차로 30분정도 가면 닿을수 있는 엑상프로방스에서는 모든 것이 세잔느로 통한다.
그 곳 시가에서 마주치는 거리, 나무, 상점, 사람, 공원, 산, 묘지 등이 모두 세잔느를 추억하고 상기시키기 위해 존재하고있다.




▶ 1904년 일본 헌정당, 대한(對韓) 정책선언서 발표
▶ 1899년 에디슨, 전기 형광램프 발명
▶ 1898년 서강·한강·왕십리에 종두소 설치
▶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 폐쇄



▶ 1883년 오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개장!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개장때 구노의<파우스트> 가 공연됐다. 약10년 뒤 큰 화재로 건물이 불타고 현재 건물은 1965년에 지은 것이다. 5,500명의 수용규모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는 덴마크 건축가 '웃존'이 설계하고 착공 14년만인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1천개가 넘는 파이프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을 비롯 전시실, 도서실,음식점 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이곳은 관광명소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오페라하우스는 수많은 거장이 거처간 곳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오페라와 카루소와 같은 성악가 그리고 번스타인의 시대에는 대중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  1879년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

          ​
  1878년부터 백열전구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에디슨은 1879년 10월 21일, 드디어 40시간 이상이나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합니다. 필라멘트의 재료로는 대나무가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대나무 산지까지 사람을 보내어 재료를 구합니다. 일본 교토[京都] 부근에서 나는 대나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해 약 10년 동안은 이 대나무를 사용합니다.

  1883년 그가 전구실험 중에 발견한 ‘에디슨 효과’는 20세기에 들어와 열전자 현상으로 연구되고 진공관에 응용되어 전자공업 발달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회사는 전구의 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그는 회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 때 “나는 전등을 발명하였으나 전혀 이익을 보지 못했다”라고 한 말에는 월가, 즉 독점자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그의 비통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허관리를 잘못한 겁니다. 과학기술에만 매달린 학자들이 적지 않게 겪는 일입니다.  
(에디슨은 1879년 10월 21일 백열전등을 발명하고, 12월 3일 백열전등 발명을 공개했습니다.)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은 1879년 10월21일 진공 유리구 속에 대나무를 태운 탄소 필라멘트를 넣고 전기를 흘린 결과 40시간 이상 빛을 내게 하는 데 성공, 백열등을 발명했다. 독일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는 에디슨의 발명에 대해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인류는 두 번째 불을 발견한 것이다. 인류는 이제 어둠에서 벗어났다”고 칭송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전등을 접한 이들은 1883년 조미(朝美)조약 1주년을 기념해 미국에 파견한 보빙사절단이었다. 미국에서 전기와 전등을 보고 감동한 사절단은 고종에게 보고하고 3개월 후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 일체를 주문한다.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1887년 3월에야 한국 최초의 전등이 불을 밝히게 된다. 고종이 단독출자한 회사인 한성전기는 당시로는 거금인 2만5000달러를 들여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에 발전설비를 갖추고 궁궐의 밤을 낮으로 만들었다. 당시 설비는 16촉광 전등 750개를 밝힐 수준이었지만 동양에서는 가장 훌륭한 설비였다.(한국전력 전기100년사) 그러나 잦은 고장에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아 사람들은 전등불을 ‘건달불’로 불렀고 전등설비 철폐를 주장하는 상소도 빗발쳤다고 한다.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등이 130여년 만에 꺼질 처지에 몰렸다. 미 하원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지난 18일 2012년부터 백열등 사용을 금지하고 형광등이나 발광다이오드(LED)를 사용케 하는 등의 새 에너지법안을 통과시키고 부시 대통령이 다음날 서명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앞서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도 백열등 없는 세상을 이미 선언한 바 있다. 백열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은 낮은 에너지 효율 때문. 전기로 텅스텐 필라멘트를 가열하면 섭씨 3000도의 열이 발생하는데 이중 불과 5%만이 빛으로 전환된다.





▶ 1878년 독일,사회민주당 진압법 공포
▶ 1833년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 출생



▶ 1805년 넬슨 영국 해군제독, 트라팔가르 해전서 나폴레옹 함대 격파

   넬슨 [Nelson, Horatio, 1758.9.29~1805.10.21]

  나일강 해전, 코펜하겐 해전과 함께 세계3대 해전의 하나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호레이쇼 넬슨(Nelson, Horatio, 1758~1805) 제독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과 프랑스의 연합함대를 물리쳤다.

  연합함대는 이베리아반도 남서부 트라팔가곶 앞바다에서 영국함대의 습격을 받아 33척의 배 가운데 5척이 침몰되고 17척은 포획당했으며 8000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반면 27척의 함대로 이루어진 영국측은 침몰함이 한척도 없었고 1600여명만 전사했을 뿐이었다. 전함 빅토리아호에서 승리를 지휘한 넬슨 제독도 전사자 명단에 올라 영국을 침통하게 했다. 영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 해전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 영국본토 침략을 포기해야 했다.

  해전승리의 요인은 넬슨 제독의 뛰어난 전술과 명확한 판단력과 결단력 그리고 영국 해군의 막강함에 있었다. 훗날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런던에 트라팔가 광장을 만들고 그 중앙에 넬슨탑을 세웠다.



▶ 1797년 오늘,
세계 최초로 낙하산 시범 낙하!

패러포일 낙하산을 이용한 스카이다이빙. 1797년 오늘 프랑스의 앙드레 자크
가르느랭 이 파리의 상공 약1,000m 상공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낙하를 선보였다.
낙하산은 사실상 기구와 동시에 발명 되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이 그 원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낙하산의 원리를 행동으로 입증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세바스티앵 르 노르망 이었다. 한 영국인이 15세기에 예술가이자 발명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한 낙하산으로 하늘에서 2,120미터를 낙하 하는데 성공했다.
요하네스버그의 신문 '빌드'는 28일 아드리안 니콜라스가 지난 25일 남아프리카 동부 크루거 국립공원에서 3,030m 높이의 떠있는 열기구에서 피라미드모양의 다빈치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렸다고 보도했다.




▶ 1328년 명나라의 초대 황제 주원장 출생


https://youtu.be/Qgr6cJBtQOw







출처 네이버. 블로그 안젤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