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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22일

♧2002년 10월 22일 한·미, 범죄인 첫 상호인도

[ 사진1. 동료 살해혐의의 무죄파경을 받은 미국 여대생 켄지 스나이더 ]

[사진2. 법정에서 눈물을 닦고 있는 켄지 스나이더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한·미, 범죄인 첫 상호인도 사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고유의 사법제도를 포기할 수 없다" 미국을 상대로 대한민국이 사법 주권국임을 선포한 듯(?)한 판결문이 나왔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수사한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FBI의 수사 결과를 거부한 만큼 AP등 외신의 관심도 컸다. AP통신은 "한국의 법률제도는 피의자가 FBI 수사관에게 했던 자백에 대해 증거로 삼기를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 사진3. 미 여대생 살해 용의자로 지목 된 켄지 스나이더(오른쪽)가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어머니인 히스 보조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10월14일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 법정. 피고인으로 7년 징역을 구형받은 미 여대생 켄지 스나이더(22)에게 항소 기각 판정이 내려졌다. 스나이더는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인 히스 보조니를 끌어안았다. FBI는 스나이더가 친구인 제이미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지만 한국 법정은 지난 6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스나이더는 FBI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며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회유와 협박에 의한 자백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법정은 FBI에서 자백한 내용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내렸다.

[ 사진4. 켄지 스나이더가 국내에 체류 당시 아기를 안고 즐거워 하는 모습.
이 사진을 찍고 며칠 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 살인 피의자로 작년 한국으로 인도 -

스나이더는 교환학생으로 대구에서 수학하던 중 2001년 3월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서울 이태원에 갔다. 이날 저녁 이태원의 한 바에서 미군들과 어울렸다. 핀란드,
네덜란드 학생이 먼저 여관으로 돌아간 후 피의자인 스나이더와 피해자인 제이미는 새벽에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스나이더는 술에 취한 제이미를 데려다주고 자신의 방으로 건너왔다. 제이미의 방에는 미리 여관에 온 네덜란드 여학생이 잠자고 있었다.

이튿날 제이미는 목뼈가 부러진 시체로 네덜란드 여학생에게 발견됐다. 네덜란드 여학생은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옆방에 잠든 핀란드 학생들은 새벽에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여관 여주인은 새벽에 한 남자 외국인이 옷에 피를 묻힌 채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관할경찰서인 용산경찰서가 수사에 나섰다. 범인이 미군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수사에 참여했다.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나라로 귀국했다.

피해자인 제이미의 부모는 백악관과 미 의회에 사건의 해결을 청원했다. 미국의 스펙터 상원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재수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FBI 한국지부와 CID는 2002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한 호텔에서 스나이더를 심문한 후 자백을 받아냈다.
동성애를 요구하던 제이미를 우발적으로 밀쳐 살해했다는 것이다. 미국 법정은 1999년 발효된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피의자인 스나이더를 한국으로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인도조약의 최초 사례가 된 만큼 스나이더는 한국 언론의 관심사가 됐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법정은 FBI 수사관처럼 사법경찰관의 지위에 있는 자가
청취한 피고인의 자백행위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같은 판결은 미국의
사법제도와 한국의 사법제도가 다른 데서 기인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FBI와 같은
수사기관의 수사보고서를 피의자 신문조서로 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형사소송법 제312조 2항에 따라 수사 지휘 검사 이외의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그 내용을 부인할 경우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2심 변호를 맡은 오로라법률사무소의 김홍경 변호사는 "사법부의 판단은 옳다"면서 "FBI의 자료만을 토대로 피고인을 한국 법정에 세운 것은 미국의 자료를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며 우리의 사법제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백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미국과 한국의 사법제도는 전혀 다르다. 한양대 법학과 차용석 명예교수는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법정에서 자백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만 하면 유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자백만으로 유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다른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수사 검사에게 한 자백은 증거로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FBI의 수사보고서를 인정하지 않은 판결에 대해 FBI 쪽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대사관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검찰측이 대법원에 상고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한국 사법부에 대한 부적절한 개입으로 비쳐질 수 있어 어떤 입장도 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FBI 한국지부 관계자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는 이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지면 그때 가서야 어떤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한국선 검사에게 한 자백만 인정 -

1심 변호를 맡은 엄상익 변호사는 "미국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될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 이 사건을 한국에 떠넘겨 가해자와 피해자의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측은 1심에서 이 판결이 선례가 된다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미국인이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자국으로 도주할 경우 미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인도된 후 한국 법정에서 번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의 형사법제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법제상 검사가 피의자를 신문하고 그 진술을 조서로 작성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봉쇄돼 있다는 것이 검찰측의 주장이다. 검찰측은 더 나아가 "우리의 법원이 무엇을 위하여 이와 같은 태도를 고집해 우리의 법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미국인에게 피해를 당한 우리 국민의 구제와 보호를 포기해도 좋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법원에 항변했다.
재판부는 "(이런 경우에도) 형사사법 공조조약에 의거해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부합하는 증거를 획득할 수 있다"며 확대 해석을 무시했다.

스나이더 사건의 경우 일반적인 관례와는 정반대로 진행됐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김홍경 변호사는 "이 사건의 경우 한국 경찰에서 수사 자료를 제공하고 상대국에 수사 증거 획득을 요청한 것이 아니다"면서 "반대로 미국이 한국측에 구두로 통보한 후 임의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자백을 받아내 한국에 인도했다"고 말했다. 엄상익 변호사는 "미국에서 범죄인을 인도해도 우리가 판단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14일 내려진 2심 결정은 1심에서 더 나아가 "피고인이 미국에서 한 자백이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자백은 믿기 어렵고 이를 뒷받침할 보강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객관적인 상황을 살펴볼 때 스나이더를 범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함귀용 담당검사는 "대법원에 상고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한 바 없다"며 "최종 시한인 10월 21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함 검사는 "자국민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미국 법원이 범죄인 인도 결정을 내린 만큼 쉽게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2015년 오늘,
대한민국 최초로 남편 성폭행 혐의로
여성 구속.




▶ 2010년 F1(포뮬러원) 한국 그랑프리 개막





▶ 2010년 프랑스 연금개혁법 상원 통과


▶ 2006년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별세

            최규하 [崔圭夏, 1919.7.16~2006.10.22]

  전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사망
  최규하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별세했다.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쯤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7시37분쯤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서울대 병원측은 최 전 대통령의 사인은 급성 심부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서울대 병원측은 “최 전 대통령이 오전 6시40분쯤 응급실에 도착했으나 도착 20분전부터 심장이 멎은 상태였다”며 “병원에 도착한 뒤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  최 전 대통령은 심장질환 등 노환을 앓고 있었으며, 최근 건강이 나빠져 간병인 2명이 교대로 돌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최 전 대통령은 경성 제일고보(현 경기고)와 일본 도쿄사범학교 영문학과, 만주 국립대동학원을 졸업했다.
  19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취임하기도 했으나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임명되면서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맡으면서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최 전 대통령은 주일대표부 총영사와 주일대표부 공사를 거쳐 1959년에는 외무부 차관에 올랐고,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교담당 고문을 맡았다. 1967년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76년부터 4년간 국무총리를 지냈다.

  최 전 대통령은 1979년 10·26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제 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나며 1980년 8월1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최 전 대통령은 이후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활동이나 발언은 자제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대통령의 서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1∼3대·1965년)과 박정희 전 대통령(5∼9대·1979년), 윤보선 전 대통령(4대·90년)에 이어 4번째다.



▶ 2005년  '생명을 위한 물'행동 10개년 시작
세계물의 날

  UN은 1965년부터 국제 수문 10개년 사업을 벌여 세계 수자원의 관리를 위한 종합적인 해결방안을 조사하여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1967년 세계 물 평화회의, 1972년 UN 민간 환경회의, 1977년 UN 수자원 회의를 개최하여 국제 음용수 공급 및 위생설비 10개년 계획 실시 결정 등 세계 물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해왔으며, 그후, 1992년 6월에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UN 환경 개발회의』(UNCED :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를 개최하여 지구의 환경질서 보전을 위한 "리우선언"과 그 실천 계획인 "Agenda 21"을 채택하여 21세기를 향한 지구환경보전 종합계획을 제시하였습니다.

  1992년 11월, 제47차 UN 총회에서 매년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제정·선포하고 점차 심각해지는 물 부족과 수질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각종 회의, 전시회, 홍보물 제작 등 여러 가지 수자원 관련 행사에 세계 각국의 동참을 요청하였으며 세계 물포럼(World Water Forum)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UN은 2003년 ‘세계 물의 해’를 마감하면서 2003년 12월 23일 제58차 유엔총회에서 2005~2015년을 ‘생명을 위한 물’ 행동 10개년(International Decade for Action, 'Water for Life', 2005~2015)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생명을 위한 물’ 행동 10개년은 ‘제13회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인 2005년 3월 22일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모든 차원에서 물 관련 이슈와 프로그램 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고 물 관련 개발 활동에 여성을 적극 참여시키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제21(Agenda 21)’, ‘유엔새천년선언(UN Millenium Declaration)' 등에 포함된 국제적 물관련 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 2002년 호적 등.초본 온라인 발급, 대법 '온라인 사법부' 출범
▶ 2002년 한·미, 범죄인 첫 상호인도


▶ 2000년 10월 22일 오늘,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_신이치교수
고대유적 조작행위가 폭로되다!
1981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4만 년 전에 구석기유물을 발견하여 일본 고고학계를 흥분시킨다.
당시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유물이 3만년 전 이었기에 일본의 구석기연대를 1만년 끌어올린 셈이었고 이후 계속된 발굴을 통해 70만년 전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일약 일본 고고학계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2000년에 들어서 익명의 제보자를 통한 마이니치신문에 추적조사를 통해 스스로 조작한 가짜 유물을 파 묻은 뒤 발굴하는 방식으로 #유물발굴을_조작 했던 것이 드러났다.

#고대유적조작행위


#아베와_일부_극우보수주의자들 의
주장에 근거하면,결론은,
지금의 일본인들은'일본 원숭이가 급속히 진화한(즉, 덜 진화한!) 반 원숭이'라는 것!

일본 #극우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 극우일본_사학자들 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야요인이 중국에서 일본을 향해 다이렉트로 왔으며,
한반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주장은 유전적 유사성에관한 학계발표만으로도 깔끔이 반박되지만 더 디테일하게 반박하려면 중국계 야요이인의 주요 이동경로 3가지인, 첫번째,중국 화남지방에서 전파!
두번째, 화중지방에서 전파!
세번째, 산둥반도에서 전파! 지도를 보시면
이 세가지 모두 현재 학계에선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선 전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학계 주류이다.특히, 산둥반도에서 전파된 경우는 지리상으로 한국에 황해와 바로 맞닿아 있고 육로로도 한반도북부가 직접 연결되어있기에 한반도를 절대적으로 거칠 수 밖게없는 구조입니다! 야요이시대가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경에 시작한 일본 역사시대 이전에 청동기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이 당대 기술력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하여 한반도를 수백년간 황해~남해~동해안을 쭉 거치며 절묘하게 계속 피해갔다는 지나치게 비약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를 경유했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맞는 이론이다!.('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는 주장과같다)
참고로 일본이 그런 선박기술을 그 옛날 청동기시대에 갖고 있었다는 사료는 전무하다. 즉 한반도 토착민이 '도래인'으로서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는 명확한 경로를 유전적 유사성을 넘어서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확실히 입증해 준다.
그런데 이를 부인하고 있으니
결론은 위 제목과같이,
지금의 일본인(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인+일본원숭이의 결합체?)들은'일본 원숭이가 급속히 진화한(즉, 덜 진화한!) 반 원숭이'라는 것!

왜,이들이 #역사왜곡에 정성을 들이고 고대역사에 관해 이토록 집착하는지!
그 이유는 한번 잘못된 역사왜곡을
고집하려 함이고,한반도에서 받아드려진
문화를 부정하려 함이고,
임나일본부설을 살리려 함이다!
#일본원숭이 #일본극우




▶ 1996년 정부, 경제협력개발기구 협약 가입안 의결



▶ 1995년 최용수 WBA 주니어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획득


- 우리나라의 역대 세계 챔피언들 - 김기수, 유제두, 홍수환, 박찬희, 염동균, 김성준, 김상현, 김태식, 김철호, 김환진, 장정구, 박종팔, 유명우, 박찬영, 김용강, 문성길, 이열우, 김봉준, 백인철, 최희용, 박영균, 변정일, 최용수, 조인주, 최요삼, 지인진


▶ 1995년 유엔창설 50주년기념 특별정상회의 개막
▶ 1991년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 1991년 유럽공동체(EC),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유럽경제지역(EEA)창설
▶ 1991년 정부, 북한 위성TV 시청 허용
▶ 1990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사망


▶ 1986년 오늘,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 구단버스 방화사건'이 발생하다. 광주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덕아웃에 앉아있던 삼성투수 진동한 선수가 관중이 내려친 소주병에 머리를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 경기는 결국 삼성 라이온즈의 패배로 끝이 난다.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서 홈팀 삼성 라이온즈가 패하자 광주에서의 사건으로 이미 흥분한 대구팬들이 결국 #해태타이거스 구단 버스를 불 지르는 사건으로 비화하게 된다.




▶ 1984년 경기도 성남시 제2공단에 화재, 피해 16억원
▶ 1983년 광주 MBC FM 개국



▶ 1983년 제32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김진호 세계신기록 수립
세계 #양궁선수권대회 김진호, 세계 신기록 달성!
#김진호는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중학교때 양궁시작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선수권대회 우승을 거쳐, 1983년 세계대회 5관왕. 서울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올랐다.




▶ 1981년 남북경제정상회담 (멕시코 칸툰)
▶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확정
▶ 1978년 등소평 중공부수상 일본 방문
▶ 1976년 중국, 문혁파(文革派) 4인방 음모 발표
▶ 1975년 소련 비너스9호, 금성 연착륙에 성공
▶ 1975년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사망
▶ 1973년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사망
▶ 1973년 유엔안보리, 중동 정전(停戰)결의문 채택
▶ 1965년 화가 고희동 별세
▶ 1965년 맹호부대 월남 퀴논항 도착
▶ 1962년 인도, 대(對)중국 국경분쟁 대비 퇴역장교 전원을 현역으로 소집
▶ 1962년 미국, 쿠바 해상봉쇄 선언
▶ 19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
▶ 1954년 서독, 나토 가입
▶ 1953년 프랑스-라오스 우호연합협정 조인 (라오스 실질적 독립 달성)
▶ 1952년 이란, 대영(對英) 단교 선언
▶ 1951년 순천-여수간 열차가 탈선, 120명 사망
▶ 1950년 서울-동경 민간항공기 취항
▶ 1950년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 국경선까지 진격 명령
▶ 1948년 반민특위 국회에 설치
▶ 1945년 몽고인민공화국 성립



▶ 1945년  경성여자전문대학교에서 원래 이름인
#이화여전으로 바꿨다.




▶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 1938년 세계 최초의 건조식 복사기 탄생

               발명가 체스터 칼슨과 최초의 건조식 복사기

1938년 10월 22일 뉴욕 퀸스거리 아스토리아의 허름한 작업실. 복사기 발명의 꿈을 품은 체스터 칼슨은 조수와 함께 금속판에 유황을 칠했다. 그들은 잉크로 `10-22-38 Astoria`라고 써서 유리 슬라이드에 인쇄했다. 그리곤 유황칠이 된 금속판을 면 섬유로 닦은 뒤 충전했다. 유리 슬라이드를 다시 그 판 위에 포개 놓고 강렬한 빛에 노출시켰다. 몇초 후 그들은 슬라이드를 치우고 검은 파우더를 금속판 표면에 뿌렸다. `10-22-38 Astoria`란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왁스 칠을 한 종이를 금속판에 지긋이 눌렀다가 살며시 떼어냈다. 그 종이에 열을 가하자 왁스가 녹아내리면서 `10-22-38 Astoria`가 고스란히 복사됐다. 세계 최초로 전기를 이용한 건조식 복사기 실험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복사기의 기원은 1837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은판(銀版) 위에 물체의 모습을 고정시키는 사진술을 발명한 때부터 시작한다. 은판사진법(銀板寫眞法)이라고도 하는데, 연마한 은판의 표면에 요오드화은의 감광막을 만들어 30여 분 동안 노출한 후 수은증기로 현상해서 양화를 만드는 방법으로, 최초의 성공적인 사진술이었다. 여기에서 발전한 것이 칼슨의 건조식 복사기이다.
1930년대 칼슨은 뉴욕의 멜로리사 특허부에서 특허권 대리인으로 일하던 중 특허 도안과 설명서의 사본을 얻는데 늘 골머리를 앓았다. 그후 칼슨은 원본을 놓고, 단추만 누르면 복사본을 내놓는 기계를 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칼슨은 어렵게 발명한 복사기를 상품화하기 위해 무려 20여개 회사를 전전하면서 설명회를 가져야 했다.
1940년 11월에 전자사진(electrophotography)이란 제품명으로 특허를 획득한 칼슨은 1944년이 돼서야 특허권 사용료를 배분하는 조건으로 바텔기념연구소와 제휴하고, 1947년에 제록스의 전신인 할로이드사를 공동연구에 참여시킨 뒤 2년 만에 첫 복사기, 제록스A를 생산했다. 제록스는 라틴어로 '마른'과 쓰기'를 뜻하는 '제로그라픽(xerographic)'에서 따온 제품명이다.
칼슨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 1959년 훨씬 더 실용적인 복사기 `제록스 914`를 시장에 내놓았고, 이때부터 복사기의 대중화를 이루게 됐다. 복사전문점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칼슨의 건조식 복사기는 당초 설계했던 것보다 덩치는 컸지만, 어린이도 사용할 정도로 간편했다.
칼슨은 특허권 사용료와 제록스사의 주식으로 억만장자가 돼 죽을 때까지 1억 달러 이상을 자선사업에 쏟아 붓고는 1968년 9월 19일 62세로 뉴욕에서 숨졌다. 1999년, AP는 종이클립, 지퍼, 일회용 반창고, 볼펜 등과 함께 복사기를 20세기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했다.




▶ 1930년 서울, 강릉간 시험비행 실시
▶ 1924년 풍옥상 쿠데타 일으킴 (북경정변)
▶ 1913년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출생



▶ 1906년 프랑소 화가 세잔 사망

세잔 [Cézanne, Paul, 1839.1.19~1906.10.22]

  만약 피카소(1881∼1973)가 없었다면 현대미술사에 관한 책들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폴 세잔(1839∼1906)이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을 것이라고 미술사가들은 말한다. 그만큼 세잔이 현대미술에 끼친 공이 크다.

  1870년대 이후 30년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인상파 운동의 화가들은 자연을 색채 현상으로 파악해 순간순간 달라지는 색의 미묘한 변화를 묘사하려 했다. 해 뜨는 바다의 풍경을 그리면서도 해, 바다, 산 등 어느 하나의 대상도 선명하게 그리지 않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 같은 작품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잔은 인상파 화가들이 순간적인 감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회화의 기본 요소인 형태와 구성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부족한 뭔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며 견고한 형태와 명료한 조형 공간을 탐구했다. 순간적 인상보다 실제로 지속하는 실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 결과 그는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뿔, 구, 원통 등 세 가지의 기하학적 틀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형태의 단순화라는 세잔의 이 같은 시도는 그 뒤 피카소, 브라크 등 20세기 입체파 화가들의 탄생을 불러 왔다.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세잔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향의 빛나는 태양과 풍경을 그리는 데 매달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법대에 들어갔던 그는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미술 세계로 돌아왔다.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해 실의에 빠지기도 했고, 평생 꿈꾸었던 살롱전에는 단 한 번도 입선하지 못했다.

  1896년 인상파와 결별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와 작품에만 몰두했다. 사람들과 떨어져 깊은 명상에 잠긴 덕분인지 그는 위대한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한 감정에 이르렀다. 그는 “풍경은 나의 마음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되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했다. 1901년 엑상프로방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세우고 여기서 그림을 그리다가 뇌우(雷雨)로 졸도했으며 1주일 뒤 사망했다. 1906년 10월 22일의 일이다.

  세잔은 생전 후배들에게 “예술가의 목표는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할 수 있게 굳센 정신을 지니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정신은 오늘날에도 빛나는 것이어서 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1996년 파리, 런던,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순회 전시됐으며 매회 입장권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이 세계 경매시장에 나오면 수백 억 원에 거래된다.




▶ 1903년 노산 이은상 출생

이은상 [李殷相, 1903.10.22~1982.9.18]

  호 노산(鷺山). 경상남도 마산(馬山) 출생. 1923년 연희전문학교 중퇴,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청강하였다.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7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45년 호남신문사의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이후 청구대학(靑丘大學)·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영남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9년 충무공 이순신장군 기념사업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 민족문화회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등을 맡아 다년간 민족적 위인에 대한 현창사업을 전개하였다.

  1967년 시조작가협회장,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고 1966년 문화재 위원에 추대되었다. 1969년 한국산악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하고 1972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재단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74년 노산시조문학상을 제정하고, 그 해 한국·네팔 협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6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역시 그 해 총력안보국민협의회의장, 시조작가협회 종신회장이 되고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예술원 공로상, 5 ·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 등을 수상하였다.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고 있는 《가고파》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많은 시조가 있다. 저서로는 《노산사화집》 《노산시조집》 《노산시문집》 《이충무공 일대기》 《난중일기해의(亂中日記解義)》 《나의 인생관》 《민족의 향기》 등이 있다. 일생을 통하여 시조(時調)와 민족의식 앙양이라는 두 길을 위해 진력하였다.



▶ 1882년 헝가리 최고 서사시인 오로니 사망
▶ 1811년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출생
▶ 1797년 최초의 낙하산 시범낙하
https://youtu.be/VjYhAs-x8RQ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