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4일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고
1994년 10월 24일 오후4시 승객 134
명이 탄 충주호 유람선에서 화재가 발생
해 29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24일 유람선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모습.
24일 오후 4시15분쯤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앞 충주호를 지나던 54t
급 충주호 유람선에서 엔진과열로 추정
되는 화재가 발생, 10여명이 익사하거나
불에 타 숨지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단체관광을
나온 노약자들로서 화재를 피해
급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화를 당했다.
승객과 승무원 등 1백34명을
태우고 이날 오후 4시쯤 신단양 선착장
을 출발한 유람선에 처음으로 이상이 발생한 것은 출발 직후 5분이 지나서였다.
정상적으로 운행하는 듯하던
유람선이 갑자기 멈춰선 것.
그러나 잠시 후 유람선이
다시 출발했으며, 15분쯤 지나
기관실 쪽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면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사고 유람선이 10여분 만에
불길에 휩싸인 후 유독성 연기가선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승객들이 우왕
좌왕하자 승무원과 남자승객 일부가
“의자밑에 있는 구명조끼를 입으라”
고 소리쳐 대부분 조끼를 착용했다.
승객들은 이어 비좁은 선실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일부는 남자 승객들이 깨뜨려준
객실 유리창을 통해 탈출했다.
그러나 일부 승객들은 “불이 나자 선원
들이 승객들을 객실안으로 들어가도록 유도해 더욱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사고 직후 신단양 선착장에 대기중이던 쾌속정이 사고현장으로 긴급 이동해 로프
와 튜브 등을 던져 구조작업을 벌였고, 사고지점 인근에 있던 낚싯배 등 유도선 3~4척도 구조작업을 도왔다.
목격자들은 “어선이 구한 승객수가 30~
4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충북지방경찰청은 이날 사고가
난 지 1시간이 넘도록 유람선 정원과 승선인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허둥대 사고수습에 허점을 드러냈다.
또 이같은 법석에도 불구하고 정작 경찰
측 구조정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고가
난 뒤 1시간30여분만인 오후 6시쯤으로 이미 낚싯배 등에 의한 구조작업이 거의 끝난 뒤였다.
승객들은 대부분 친목모임차 충주호 및 단양 고수동굴 관광에 나선 단체관광객
들로 경기도 부천 동일관광(30명), 의정
부시 동아관광(63명), 강원도 홍천 보람
관광(27명) 등 관광회사를 통해 침목모임
차 충주호 및 단양 고수동굴 관광에 나섰다
가 사고를 당했다.
불이 나자 경찰과 공무원 소방대원 등 1백
여명이 출동, 오후5시쯤 불길을 잡았으나
유람선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전소됐다.
사고를 낸 충주호관광선 소속 유람선 충주 제5호는 54t급으로 전장 26.35m, 폭 5m, 높이 2 1m로 최고속도는 29노트이다.
승무원 7명을 포함해 승선 정원이 1백27
명인 이 배는 86년 7월 13일 건조된 후 같은 해 9월 10일부터 충주호에서 운항해 왔다.
▶ 2009년 프로야구 KIA, 12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 2008년 미국 뉴욕발 금융위기,
▶ 2005년 천재소년 송유근(8), 국내 최연소
대학생으로 인하대 2학기 수시모집에 합격
천재 소년 송유근(8)군이 24일 인하대에 합격해 대학생이 됐다. 국내 최연소 대학생이다.
정부는 이와 관련, 송군을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우기 위해 대학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24일 송군이 인하대로부터 수시2학기 자연과학계열 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국내 최연소 대학생이 되자마자 ‘송유근 팀’ 을 결성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천재 소년을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선 것은 송군이 처음이다.
이날 송군의 대입 최종 합격을 발표한 인하대도 송군을 위한 ‘천재 과학자 육성 프로젝트’ 를 전격 가동했다. 송군은 앞으로 일반 강의 대신 교수와 1대1 토론식으로 수업을 받으며, 원어민으로부터 영어 개인 수업을 받게 된다.
송군의 대학생활을 도울 ‘도우미 대학생’ 이 송군과 함께 지내도록 하고 체육, 음악, 미술 과목은 인근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맞춤식 학습’ 을 하게 된다. 의대와 심리학 전공 교수들이 청소년 정신 과학과 상담 심리에 대한 조언도 할 예정이라고 인하대측은 밝혔다.
이날 합격 발표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송군은 “대학에 입학해서 기쁘다. 앞으로 물리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 고 말했다. 송군의 아버지 송수진(46)씨는 “유근이에게 두 가지 바람이 있다” 며 “개인적으로 물리학을 좋아하므로 공부를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고, 또 세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겨루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 ‘특목고 정상화 방안’ 발표
▶ 2002년 美 연쇄자격 용의자2명 체포
▶ 1999년 전문경영인으로 재계 첫 그룹회장 역임한 정수창씨 별세
▶ 1999년 델 라 루아,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 1999년 모로코의 할리드 하누치, 시카고 마라톤서 세계신기록 (2시간 5분 42초) 수립
▶ 1994년 안기부 6.25당시 참전했다 포로로 잡혀
납북된 조창호씨가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 해상에서
표류중 수산청에 의해 구출됐다고 발표
6 25전쟁중 포로로 끌려가 전사한 것으로 처리됐던 국군 소위가 43년만에 북한을 탈출, 고국의 품에 돌아왔다. 국가안전기획부는 24일 6 25전쟁 포로로 납북된 조창호(64)씨가 북한을 탈출, 해상에서 표류하다 23일 새벽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됐다고 24일 발표했다. 안기부는 조씨가 최근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 대연(다롄)에서 밀항선을 타고 전북 군산 서남방 약80마일 해상에서 떠돌다 23일 새벽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으며 조씨를 인계받아 귀환경위 등을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북한 생활중 장기간 탄광노동으로 인해 진폐증(2기)을 앓아온 조씨는 오랜 항해와 긴장 등으로 극도로 쇠약해져 현재 서울 중앙병원에서 치료중이다.
안기부 조사결과 조씨는 지난 50년 연세대 1학년 재학중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 소위로 6 25에 참전, 51년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에 끌려가 억류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씨가 실종된 뒤 소식이 끊기자 군에서는 조씨가 1951년 9월10일 중부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처리, 현재 국립묘지 현충탑 지하 위패실에 육군 중위로 위패카드가 봉안돼 있다.
▶ 1994년 충주호에서 충주호관광선 소속 충주제5호 화재(29명 사망 및 실종)
https://youtu.be/ps_X6kqkP7k
▶ 1981년 싱가포르 대통령에 챙가라 비틸 나이르 취임
▶ 1980년 공주사대, 백제토성 발굴
▶ 1979년 미국, 북한 여행제한 철폐 확인
▶ 1977년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 1974년 미국 공군,
사상최초로 ICBM의 기상(機上)발사 성공
▶ 1974년 동아일보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
▶ 1974년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사망
▶ 1973년 이집트-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10월 전쟁 종결
▶ 1973년 오늘, 미국 중성자탄 개발!
원자폭탄 수소폭탄처럼 폭풍이나 열복사선에 의하지 않고, 주로 중성자의 방사에 의해서 사람을 살상하는 핵폭탄.
1966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개발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81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이 폭탄의 생산 결정을 언명함으로써 실용단계에 돌입했음을 시사하였다.
중성자는 다른 방사선의 비해 비교적 투과력이 강하여 어느 정도의 두께를 가진 흙,콘크리트,강철 등은 그대로 투과한다.
이 폭탄을 사용하면 근거리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 구조물, 전차 등을 파괴함없이 상당한 거리에 있는 사람, 동물에게 치명적인 살상 효과를 미친다. 1kt 보통 핵폭탄을 900m 상공에서 폭발시키면 반지름 500m 이내 지역 안에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그 피해가 1,500m까지 미치나 건물 탱크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제한 살상 효과를 준다 그러나 중성자폭탄을 사용하면 반지름 420m이내 건물 등의 완전히 파괴하되 750m 이상 거리에 있는 건물에는 전혀 파괴효과를 미치지 않는 대신 1,200m 거리에 있는 사람이 탱크 속에 있어도 중성자가 그 속에까지 투과되어 승무원을 살상하는 효과가 있다.
이폭탄의 원리는 수소폭탄과 비슷하나 수소폭탄이 핵융합반응을 얻기 위해 원자폭탄을 기폭장치도 사용하는 것에 비해 중성자폭탄은 질량이 무겁고 폭발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플루토늄과 같은 원소 또는 기타의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융합반응에 필요한 고열을 얻는다.
수소폭탄의 기폭제인 원자폭탄을 보통의 화학 폭탄으로 대치하고 주위를 감싸고 있는 238u로 없앤 형태로 더러운 방사선의 방출을 극소화하고 단지 투과성이 아주 좋은 중성자 만을 방출하게 하여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건물 속에 들어있는 인명만 살상하도록 만들어진 폭탄이다.
이는 1960년부터 연구되어 1981년 생산에 돌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72년 남북적십자 3차 본회담 (~26일 평양)
▶ 1972년 미국의 프로야구 선수 로빈슨 사망
첫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는 등번호 42가 없다.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이다. 그 등번호는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1919~1972)에게 헌정돼 있다.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서 10년간 2루수로 뛰면서 통산 3할1푼1리, 홈런 137개, 도루 197개를 기록했다. 뛰어난 성적이지만 123년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발군의 선수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뛴 것만으로도 미국 민권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흑백차별 철폐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기 때문이다.
1947년 28세의 늦은 나이에 데뷔했으나 지독한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타석에 설 때마다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고 상대편 선수들은 ‘목화밭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가 늘 웃으며 따돌림을 견뎌내자, 처음에는 함께 뛰길 거부했던 팀 동료들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서는 강인한 투지와 집념을 보여줘 첫해 내셔널리그 신인왕, 1949년 MVP를 차지했다.
은퇴 후 흑인을 위한 재단 설립, 정치활동에 전념하다 1972년 오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매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의 날’에는 전 메이저리그 선수가 등번호 42를 달고 경기를 한다.
▶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에 선출
▶ 1968년 서울 광장시장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조세 저항 데모
▶ 1966년 마닐라에서 월남참전7개국 정상회담 개막
▶ 1964년 함태영 前 부통령 별세
▶ 1964년 잠비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2년 케네디, 흐루시초프로부터
세계평화보장에 관한 서한 접수
▶ 1962년 미국에 의한 쿠바봉쇄 시작
▶ 1962년 한국-과테말라, 국교 수립
▶ 1957년 크리스찬 디오르 사망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가시화시켜 세계를 놀라게 한 옷 : 뉴 룩 (New Look)
1905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유럽 사회가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전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벨 에포크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크리스찬 디올, Christian Dior, 1905~1957)은 다소 늦은 나이에 패션에 입문하여 로버트 피케(Robert Piquet)와 뤼시앵 를롱(LeLong)의 쿠튀르에서 보조 디자이너로 약 8년간 근무한 후, 1946년 39세의 나이로 자신의 이름을 건 매장을 열었다. 1947년 사업가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의 출자를 받아서 본격적인 형태의 쿠튀르 하우스를 시작하여 그 해 선보인 자신의 첫 번째 컬렉션으로파리는 물론 전 세계를 단숨에 들썩거리게 하였고, 1957년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화려한 작품 세계를 남기며 20세기 패션 역사에 확실한 이름을 남겼다.
디오르는 첫 봄/여름 컬렉션에서 Corolle(꽃부리)과 Huit(숫자 8), 두 개의 라인에 총 90개의 디자인을 발표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1920~30년대 복식은 각진 어깨와 짧고 좁은 치마로 다소 남성적인 모습이었으나, 디오르는 여성의 경사진 어깨 라인을 살리고, 잘록한 허리,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풍성한 스커트로 파격적인 실루엣을 제시했다. 이 디오르의 컬렉션은 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끝내며 좋았던 옛 시절, 즉 벨 에포크(영국에서는 에드워디안 시대)를 향수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이 스타일은 꽃부리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1950년경까지 전 유럽과 미국의 하이패션 고객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스타일은 원래의 이름보다는 뉴 룩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참으로 새로운 룩이다.(It’s such a new look)"이라고 말한 데서 기인하였다. 뉴 룩의 성공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압박으로 피폐해진 파리 패션의 자존심을 살려주었다. 뉴 룩의 성공으로 1949년 디오르는 뉴욕에 기성복 부티크를 열었고, 그 해 파리 패션에서 대미 수출액의 75%, 1951년 프랑스 전체 수익의 5%를 차지했다고 한다. 디오르가 거둔판매 수익의 절반은 미국에의 수출에서 나왔을 만큼 미국에서 뉴 룩의 인기는 지대했다.
디오르에 의해 처음으로 스타킹이 패션의 일부로서 강조되었다.
▶ 1951년 미국, 대(對)독일 전쟁상태 종결 선언
▶ 1949년 유엔극동경제위원회 한국가입 결의
▶ 1945년 군정청, 일본인 철퇴령 발표
▶ 1945년 유엔창설
국제연합< UN >탄생.
국제연합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이다. 1946년 붕괴된 국제연맹을 계승한 것으로< UN>이라고도 한다.
이 명칭은 미국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고안한 것이며, 제1차 세계대전 중 26개국 대표가 모여 추축국에 대항하여 계속 싸울 것을 결의하였던 1942년에 연합국선언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에 참석한 50개국 대표는 1944년 덤바턴 오스크에서 회합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대표가 합의한 초안을 기초로 국제연합현장을 작성하였다. 50개국 대표는 1945년 6월 26일 국제연합헌장에 서명했으며 폴란드가 추후 서명하였다.
국제연합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과 여타 서명국 과반수가 국제연합헌장을 비준한 1945년 10월 24일 공식 출범하였으며 이후 매년 10월 24일을 로 기념하고 있다.
본부는 미국 뉴욕시에 있다.
유엔 로고 초기 모습(좌), 현재 모습(우)
올리버 링컨 룬더퀘이스트(Oliver Lincoln Lundquist)는 유엔의 초기 로고 프로토타입을 만든 팀을 이끌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중위였던 Lundquist는 전략정보국에 복무했었다. CIA 선임자가 된 1946년까지 Alger Hiss와 건축가 Eero Saarinen 함께 일했다. 합동 참모 본부의 영상프리젠 테이션을 준비하는 일뿐만 아니라 워싱턴 기자단까지.
이후 해군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헌장에 서명할 때 Lundquist도 참석했다. 그의 팀이 유엔회의 로고에 대한 프로토 타입이 된 모든 그래픽과 공식 대표들 배지 설계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연구팀은 유엔 로고 디자인을 했고 그것이 외부로 설정되지 않은 배지의 원형이 되었다. 이것은 Donald McLaughlin에 의해 최초로 디자인되었고 Lundquist와 더불어 유엔회의를 위한 그래픽 기술이사로 근무했다.
위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좌측은 초기 유엔 로고 이며, 우측은 현재의 유엔 로고 모습으로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뉴욕타임즈 보도를 인용하면 유엔 로고의 디자인 비하인드 스토리와 컬러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디자인에서 가장 특색있는 파란색, Lundquist의 설명에 따르면 "붉은 색의 반대였고, 전쟁 색상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것은 회색 파랑, 현대 유엔 깃발보다 조금 다르다"고 설명했다
"세계의 상징도 원래의 디자인이 약간 다르다"고 그는 말했다 : "우리는 본래 기반을 해결하기 위해 북극 방위각에 세계를 투영했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국가를 동심원안에 돌려가며 배치했다.
우리는 남부 분야에서 아르헨티나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렬로 아르헨티나가 잘렸다. 우리는 심벌에서 미국을 주최국의 중심에 놓았었다. 그후, 영국에 있는 개정된 공식 유엔 상징 디자인은 유럽을 더 진원지의 중심으로 놓았다. 나의 추측으로 동.서방 세계와 남극 대륙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물론 아르헨티나가 회원국이 되어 있었다
▶ 1939년 나일론 스타킹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발매 시작
나일론양말 첫 판매개시.
미국 듀폰사가 1938년 10월 27일 나일론의 공업화를 발표하고, 이듬해 10월 24일, 델라웨어 월링턴사에서 '나일론양말'을 시판했다. 1939년에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나일론는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고,
1940년 5월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스타킹을 사고서 치마를 걷어붙이고 즉석에서 신어보았다고 한다. 값싸고 질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에 개발자 캐러더스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돋친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스박사는 듀폰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표하기 전 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캐러더스박사,왜 자살했을까?
무기회사는 왜 스타킹 만들었을까?
http://naver.me/GzQw2k80
▶ 1931년 국제연맹,
일본군의 만주 철병(哲兵)권고안 가결
▶ 1929년 주가 대폭락...대공항 신호탄
▶ 1912년 은행령 공포
▶ 1856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출생
▶ 1632년 세균과 원생동물을 최초로 관찰한
미생물학자 레벤후크 출생
https://youtu.be/wT9lhL32Fng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블로거 안젤라,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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