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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1일

✿ 개인 워크아웃 첫발생 (11월 11일).


일정한 요건 아래 신용불량자의 빚을 탕감하고
신용을 정상화시켜 주는 ‘개인 신용회복(워크아웃)’
제도가 시행 열흘 만인 11일에야 첫 신청자가 나왔다.

이날 오전 10시쯤 신용회복 지원위원회
(위원장 이상룡·李相龍) 창구에 첫 신청
서가 접수되자 그동안 ‘개점 휴업’ 상태로 애를 태워오던 사무국 직원들 얼굴에도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청 1호’ 기록의 주인공은 경기도에서 식당 조리사로 일하는 이모(29)씨. 그는 “6개 은행과 신용카드사에
카드 빚 1700여만원, 1개 할부금융사에 200만원 등
모두 1900여만원의 빚이 있고, 신용불량
자가 된지 15개월이 지났다”고 밝혔다.

현재 개인 워크아웃(1단계)은 ‘5개
이상 금융기관의 총 채무액이 2000만원 이하이면서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지 1년이 지난 사람’이라야
신청자격이 있는데, 위원회 사무국은 “이씨는
신청요건을 갖추었다”고 판정내리고 신청서를 접수했다.

한 달 월급이 130만원 가량인 이씨는 “작년 초 건강
문제로 일시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없어 카드로
생활비와 병원비를 썼다가 작년 8월부터 연체자가 됐다”
면서 “연체 이자가 너무 빠르게 불어나 ‘돌려막기’
(카드를 여러 장 돌려가며 결제하는 것)로도 감당이 안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제 빚 독촉을 받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
후련할 것 같다”면서 “그동안 빚을 갚으라는 전화를 피하거나 갚겠다고 무마하는 것으로 넘겨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는 교통비 등 한 달에 40만원만 쓰고
나머지 수입은 다 빚 갚는 데 쓰겠다”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이씨는 “지난주 사흘간 휴가를 내 각 금융기관을 돌면서 서류를 준비했다”며 “신청서 접수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가 개인 워크아웃 판정을 받으면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 빚 독촉을 받지 않고, 총채무액의 최대
3분의1까지 감면되며, 연체 이자도 최저 연 6%로
줄어들게 된다.



▶2010년대만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 부부 징역 19년 확정


▶2010년서울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개최



▶2010년'킹콩' '라 스트라다' 거물 영화 제작자 로렌티스 별세
▶2008년억대 '인터넷 도박' 130여명 적발
▶2004년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사망
▶2002년개인 워크아웃 국내 첫 신청
▶2000년의약분업, 의사-약사-정부 3자 협상에서 타결


▶1999년최무룡씨 별세

최무룡 김지미 부부




▶1998년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을 반대하는 승려들이 조계사 총무원 건물을 완전점거
▶1998년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KIPA) 설립
▶1995년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공식 출범
▶1994년사랑의 장기은행 발족
▶1994년제1회 서울단편영화제
▶1992년국내 첫 심장이식 수술
▶1992년고려대 한민홍교수, 무인자동차 개발
▶1982년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 발사
▶1980년조선왕조시대의 공산성 동문지 충남공주서 원형대로 발견


▶1977년이리역 폭발사고 발생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발생! 이리 시민 대부분이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축구 예선전을 시청하고 있던,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 경, '이리'(현재 익산)역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리역에 들어와 광주로 가기 위해 입환작업 중이었던
제1605호 임시화물열차 15량 가운데 다이너마이트 900상자, 초산암모니아 200개, 초육폭약 700상자, 도화선 50개 등
1천250개 폭발물상자를 실은 11번째 화차가 폭밠새 순식간에 이리 시내를 덮친 것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폭발사고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으로 그해 국내 10대 뉴스에 꼽힐만큼 한국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폭발사고로 이리역
직경16km 이내의 집과 건물이 완전 파괴되었다. 또 이리 시내는 순식간에 '원자폭탄투하'를 방불케하는 폭발에 따른 정전으로 인해 온 시가지가 암흑에 휩싸였다. 당시 깜짝 놀란 이리 시민들은 북한의 공습이다! 원자탄이 터졌다! 지진이 일어났다! 는등, 아우성을 쳤다! 이런 사실이 시사하듯이 당시 이리 시내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 자체였다. 당시 폭음이 이리 근처인 김제와 옥구는 물론이고 전주까지 들렸다는 증언이 있을만큼 대형폭발사고였기 때문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철도공무원 16명을 포함해 58명이 죽고, 1,4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도 11100억원이 넘었다.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폭발사고 후 이리 시내 다방과 음식점에는 반창고로 얼굴이나 손등을 허옇게 바르고 나온 사람들로 넘쳐났다는 이야기 마저 있었다. 폭발사고현장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경향신문 1977년 11월 12일 자에 따르면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초토로 변한 이리 시내는 온통 화약 냄새로 가득찼으며, 12만명의 이리 시민들은 한밤을 공포속에서 새웠다", 시가는 온통 깨어진 유리파편과 초연으로 뒤덮여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사고가 난 이리역 근처는 육중한 철마가 마치 부서진 성냥갑처럼 쭈그러들어 자빠져있었고, 폭발 현장은 깊이15m, 직경 2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패어, 마치 분화구처럼 보였다. 역 구내 대합실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부서진 집 앞에서 가족을 잃고 추위속에 밤새 통곡하는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처절하기 만했다.

폭발의 원인은 호송원 '신무일'의
'안전 불감증'이었다!
호성원 신무일은, 저녁 식사때 역 앞 술집에서 막걸리 한되와 소주 한 병을 마시고, 화차로 돌아와 폭약을 실은 화차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닭털침낭 속에서 잠을 잤다.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일어나보니, 촛불이 침낭에 떨어져 불이 붙어 있었다.
이에 깜짝 놀라 덥고 자던 침낭을 버리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는 맨발로 화차 밖으로 뛰쳐 나와 "불이났다", "화차에 불이났다"고 외치고 달아 났다. 그 순간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이리역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호송원 신무일의 직접적인 책임이 컷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건이었다. 폭발사고 후 '한국화약'측이 '철도운송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과 '안전대책에 미비, 호송의 소홀' 등이 밝혀졌다. 또 폭발물을 가득 실은 화차를
목재와 신문용지 등 일반화물열차와 연결해 특별한 경비 없이 많은 객화차들이 무수히 드나들고 사람의 왕래가 많은 역구내에 대기시켜 놓았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동안 한국사회에 만연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이른바 '급행료'도 폭발사고와 관련이 깊었다.
화약류 열차는 직통운행이 원칙이었지만,
이 규정을 어기고 이리역에서
무려 22시간이나 정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무일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인천에서 화약을 싣고 이리역에 오기까지 7개 역을 거치는 동안 이른바 급행료 명목으로 30여명의 역무원들에게 1인당 300에서 500 원씩 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화약을 실은 화차는 10일 밤 10시 30분 경 이리역에 도착해 무려 22시간이나 이리역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화차 호송원의 '안전불감증'과 '각종규정 및 원칙무시'는 조국근대화와 경제개발에 매진하던 70년대 한국사회가 잉태한 부조리와 잘못된관행의 결과였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박혀 작동하고 있는 이른바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의 산물이다. 돌이켜보건대, 한국사회 경제성장과 근대화는 '화약을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루어낸 과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폭발의 충격도 컸지만 정부의 구호대책도 늑장이었다. 정부는 재해대책본부를 꾸리고 사고수습과 복구에 나서 폭발사고 발생 후 일주일 후부터 피해보상을 전제로 한 정밀조사를 시작했지만 건물과 가재도구의 피해정도를 싸고 주민과 조사반원 사이에 큰 혼선과 대립이 발생했다. 11월 27일 정부는 의연금 7억 7천 10만원과 국고 2억원 등
우선 9억 7천여만원의 보상금을
피해주민에게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보상금액수가 너무 적어서 논란이 되었다. 예컨대 당시 셋방에 살던 172가구 중, 3인 이상은 30만원, 2인는 20만원, 독신자는10만 원씩 주도록 했는데, 대부분이 50만원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사실상 보상금은 보상금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폭발사고 발생 한 달 후에도 정확한 피해액마져 집계되지 않았으며, 약 1만여명의 이재민이 1년여동안 텐트를 치고 지내며, 혹한은 물론 혹서와 싸워야 했다.
폭발 사고 후 새 이리 건설붐이 조성됐지만 이리시민은 부동산 브로커의 농간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외지에서 들어온 토지브로커들이 자기들끼리 땅을 사고 파는 방식을 통해 땅값을 크게 올려놓으면서 그 피해가 고스란히
이리 시민들에게 돌아갔으니 말이다!

출처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



▶1976년모빌 창시자 콜더 사망
▶1975년앙골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972년24년 만에 남북 비방방송 중지
▶1971년한국천주교 주교단,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 시정요구한 공동교서 발표
▶1970년사하로프 박사 등 3인이 참여한 `인권위원회` 소련내에 발족
▶1966년롱갈리트 파동. 검찰, 유독성 롱갈리트 사용 제과업자 입건
▶1965년로디지아 독립선언
▶1964년`통일론` 필화사건
▶1964년월남 중부지방에 대홍수. 천여명 사망, 10만이상 이재민
▶1963년프랑스, 중국과 수교
▶1961년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미국 방문에 올라
▶1961년생리용품 `안네 냅킨` 발매
▶1960년월남에 쿠데타 발생
▶1959년유엔총회, 완전군축에 관한 82개국 공동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
▶1958년유엔정치위, 참전 13개국 통한(統韓) 결의안 채택
▶1956년국제시계밀수사건 적발
▶1950년부역자 처벌 특별조치령 공포
▶1946년국립박물관 개관
▶1945년조선인민당 결성. 당수 여운형


▶ 1945년 해방병단 창단(해군 전신)

손원일 해군제독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 제독은 서울 관훈동 옛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립했다. 미 군정청에서 '해안경비대(Coast Guard)'라고 불렸던 해방병단은 바로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이다. 이듬해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한 해방병단은 1948년 9월 5일에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했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해방병단의 창립일인 1945년 11월 11일을 해군창설일로 삼고 있다.
해군 초대참모총장이자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살다가 광복 직후 재산까지 포기하며 급하게 귀국한 손원일 제독이 서두른 일은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이다. 1945년 8월 21일 서울 안국동에서 정긍모, 한갑수 등과 해사대를 결성한 손원일 제독은 이후 해사대를 조선해사보국단과 통합해 '조선해사협회'로 개칭한 뒤, 11월 11일 해방병단을 창립했다.
손원일 제독은 해군은 신사라는 점과 신사도를 강조해서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선비 사)'자가 된다는 점에 착안해 해군창설일을 11월 11일로 정했다.
창설 당시 70명에 불과했던 해방병단은 초기에는 군함 한 척도 없었지만 이후 손원일 제독이 미국과 협상을 통해 1948년까지 총 37척의 비전투함을 인수했으며, 전투함을 구입할 자금이 없었던 손원일 제독은 모금운동을 통해 1949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구입했다.
1993년 6월 209급(1,200t급) 잠수함 '장보고함'을 취역해 잠수함 시대를 연 한국해군은 1995년부터 세계 16번째 해상초계기 보유국이 됐고, 1998년 중어뢰 '백상어'를 개발해 세계 8번째 어뢰 독자 개발국이 됐다. 2007년 5월에는 한국 최초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을 진수해 세계 3번째 7,000t급 이지스함 보유국이 됐다.


▶1942년조선소년심판소 개청(開廳)
▶1939년일본의 화가 무라카미 가가쿠 사망


▶193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골든게이트 브릿지) 개통.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북쪽 마린반도를 잇는 금문교의 길이는 2825m, 2만톤 철강으로 된 2층에 케이블이 지탱하는 두 탑의 높이는 226m나 되는 이 다리는 밑으로 배나
경비행기가 지나가는 세계적인 명물이다.




▶1920년동아일보 장덕준기자, 훈춘사건 취재중 일본경찰에 피살


▶1918년독일 휴전협정 서명… 1차대전 끝나다

독일은 연합국들의 침공이 눈앞에 닥치자 이날 새벽 5시 프랑스 파리 교외 '콩피에뉴숲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에 전격서명했다. 이로써 연합국과 동맹국간의 모든 전투행위는 이날 오전 11시를 기해 끝이났다.
1914년에 시작된 1차 대전으로 양측은
군인 900만명이 사망하고, 2,20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간인 5백만명 이상이 질병과 기아 등으로 죽었다. 그때까지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외형상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이 싸운 전쟁이었지만, 내부 사정은 훨씬 복잡했다.
영국 식민지 확대정책인 '3c 정책' (캘커타, 카이로, 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정책)과 식민지 후발주자인 독일의 '3B 정책'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정책),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범슬라브주의'와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범게르만주의'가 맞물려 있었다.
전쟁은 참호전으로 이어지면서 교착상태가 계속되었다. 분수령은 미국의 참전!
독일이 1917년 무제한잠수함작전을 전개하고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자 동부전선의 부담을 벗어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실패했다. 7월부터 미군이 속속 서부전선에 상륙하면서 연합군은 전면공세로 전환했다. 동맹국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도 무너졌다.
독일도 전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일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무너졌다. 1918년 11월 9일
황제 빌헬름2세가 망명한 이틀 뒤,
독일은 항복했다.
1차 세계대전은 끔찍한 대량학살과 파괴로 인해 앞으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전쟁으로 기억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종전협상'(베르사유조약)과정에서
향후 '항구적 평화를 이루기위한' 조약이 아니라 복수와 독일의 자존심 파괴로 일관되어 패전국 독일이 부담해야하는 가혹하고,어마어마한 배상금이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히틀러나치당'의 생성과 성장에 영향을 주는 결과로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불씨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프랑스점령 후,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항복서명했던 '그 기차'를
그대로 가져와서 프랑스의 항복서명을
받아냈다.



▶1918년폴란드 독립
▶1918년합스부르크 왕가 몰락
▶1909년미국, 진주만을 해군근거지로 지정
▶1908년최초의 신극 이인직의 ‘은세계’ 원각사 공연
▶1908년어업령 공포. 일본인 독점 시작
▶1898년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르 출생
▶1891년청나라 금단교도 봉기, 기독교도와 충돌
▶1886년프랑스 리옹서 제1회 전국노동조합대회 개최
▶1880년미국의 선구적 개혁운동가 모트 사망
▶1869년이탈리아의 마지막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출생



▶1855년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 사망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Søren (Aabye), 1813.5.5~1855.11.11]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행복론을 펼친다. 행복이 본래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일종의 염세주의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 때문에 낙심한 젊은이가 사랑의 본래 계획에 행복이 절대 없었다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가장 염세적인 사상가들이야말로 가장 쾌활할 수 있는 것이다.’

좌절, 불안, 절망,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 역시 욕망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생의 에너지라고 한 원조(元祖)는 따로 있으니 바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1813∼1855)다.

그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 더 유명해졌다. 20세기 전반에 유럽인들이 두 차례의 가공할 전쟁을 겪으면서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정의’니 ‘진보’니 하는 장밋빛 이념이 아니라 개개인의 주관적 의지와 자유, 즉 실존임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키르케고르는 30대 초반에 쓴 논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인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눴다. 1단계에서는 쾌락만을 좇는데 이것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권태’ 때문이다. 따라서 남을 생각하며 가치와 윤리에 따르는 두 번째 ‘윤리적 단계’로 넘어가는데 이 역시 삶의 유한성 때문에 근본적인 ‘생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삶의 완전한 단계인 세 번째는 ‘종교적 단계’이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적 결심’에 따라 진정 신을 믿고 따를 때 삶에 대한 무력감과 허망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가 사상사에 미친 공로는 신을 절대화하여 무조건 따를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 내면의 본질에 천착해, 신을 보는 관점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는 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삶의 완성을 위해 불안과 절망은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닌 순전히 ‘자기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이어서 매 순간 반성하고 노력하는 인간이라면 ‘불안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습과 제도로 굳어버린 당시 교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결국 교회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그 싸움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한 요인이 됐다. 1855년 10월 어느 날, 거리에서 졸도한 뒤 한 달 만인 11월 11일 병원에서 42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1833년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 출생


▶1821년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출생
1821년11월11일~ 1881년 2월 9일, (음력 1월 28일) 러시아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대표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분신' , '백야' , '죄와벌' (1866년), '백치'(1868년) , '악령' 등.




https://youtu.be/6APmhVg33dw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