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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2일

♧2001년 11월 12일 미국 여객기 뉴욕서 추락, 260명 사망

승객 246명과 승무원 9명등 255명을 태운 아메리칸항공(AA) 소속 A300 여객기가
12일 미국 뉴욕 존 F.케네디국제공항을 이륙한 직후 추락,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아메리칸항공 당국은 정규 승객 외에 5명의 어린이가 보호자와 함께 탑승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이번 사고의 희생자는 26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와 군은 사고직후 경찰과 소방대원, 긴급구조요원 모두에 대해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제1급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추락 현장 상공 등 미국 전역에전투기 편대를 대규모로 발진시켜 놓았다.

뉴욕발 도미니카공화국행 아메리칸항공 소속 587편 항공기는 이날 오전 9시17분
(현지시간)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4분 만에 공항에서 8㎞떨어진 뉴욕시 퀸스지역에 추락하면서 화염에 휩싸였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이 여객기의 추락으로 탑승자 255명 전원이 숨졌으며 퀸스지역 주민 6명이 실종되고 35명이 다쳤으며 이 일대 가옥 4채가 완전 파괴되고 10여채의 주택이 불에 탔다고 말했다.

당시 집 부엌에서 여객기 추락 장면을 목격한 한 여성은 "갑자기 비행기가 뒷집쪽으로 낮게 날아와 재빨리 몸을 엎드렸다"면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아 창문 밖으로뛰어내려 길 건너편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추락 현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자네트 바라소는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거리로 달려나왔다"면서 "폭격을 받은 줄 알고 나도 아들 2명과 함께엉엉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갔다"고 말했다. 여객기 추락 직후 긴급 구조요원들은 사고 현장으로 달려와 비행기 파편 더미등에서 지금까지 모두 161구의 시신을 발견했으며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미국 수사당국은 추락 원인과 관련, 테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으나 추락비행기 조종사가 추락 직전 연료를 버린 점 등으로 미뤄 사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정확한 추락 원인 규명작업에 나서고 있다.




▶ 2009년 제임스 릴리 전 한국대사 별세
▶ 2009년 명래제약 창업주 이용재 여사 별세
▶ 2008년 박춘호 국제해양재판관 별세
▶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개막(2005.11.12~11.19)
▶ 2004년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 MBC라온건설인비테이셔널 스킨스게임 출전위해 제주 방문


▶ 2001년 홈런왕 맥과이어 명예로운 은퇴




▶ 2001년 미국 여객기 뉴욕서 추락, 260명 사망
▶ 1999년 안산 SW 지원센터 설립
▶ 1996년 제1회 국제 CDMA 회의 개최
▶ 1996년 사우디항공 보잉 747-100기와 카자흐스탄 민항기와 인도 뉴델리 상공에서 충돌. 349명 사망
▶ 1994년 영국의 소설가 스튜어트 사망
▶ 1992년 영종도 국제공항 기공식
▶ 1991년 아태지역 경제협력(APEC) 제3차 각료회의 서울서 개최
▶ 1990년 빌게이츠 컴덱스쇼 기조연설에서 `손가락 끝의 정보`라는 문구로 미래 컴퓨팅의 비전 제시
▶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본 제125대 왕에 즉위
▶ 1989년 전교조, 전태일노동상 수상
▶ 1989년 문학평론가 임종국 별세
▶ 1989년 서양화가 하인두 별세


▶ 1989년 최점환 WBC 스트로우급 세계챔피언 획득




▶ 1989년 스페인 노동운동가 파시오나리아 작고
▶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대회(총재 김대중)
▶ 1987년 전화접수 우편환 송금제도 실시
▶ 1984년 미국 디스커버리호 고장위성 사상 처음으로 회수
▶ 1983년 일본, 랭군사건의 제재조치로 북한 과학대표단 입국 불허
▶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방한


▶ 1982년 폴란드 정부, 11개월 만에 바웬사 석방
폴란드의 노동운동가, 정치가인 레흐 바웬사는, 사회주의국가인 폴란드에서 1980년 파업을 주도했으며,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0년~1995년 폴란드 초대 직선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정계은퇴 후에 레닌조선소에 전기기사로 복직하기도 했습니다.




▶ 1982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유리 안드로포프 선출
▶ 1981년 전두환대통령, 김일성 서울방문 제의
▶ 1981년 한국방송사업단 창립


▶ 1980년 미국 보이저 1호, 토성 근접 촬영

보이저1호가 보내온 토성의 사진

3년 2개월 간 태양계 여행을 계속해 온 무인혹성탐사선 `보이저1호`가 1980년 11월 12일 토성에 12만4천2백km까지 접근, 근접촬영에 성공했다.
1977년 미항공우주국이 `보이저2호`와 함께 발사한 이 탐사선에 의해 과학자들은 토성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우주개발의 지평을 더욱 넓혀준 2대의 탐사선(2호는 1981년 8월 토성에 도달)은 지구로부터는 도저히 탐지할 수 없었던 토성의 8개 위성을 새롭게 발견했고 이제까지 `빛의 점`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었던 위성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전달해 주었다. 특히 극적인 발견은 토성의 트레이드 마크인 3중의 띠로 실제는 수많은 가는 띠가 모여 생긴 것이다.
보이저호는 토성에 접근하여 놀랄 만큼 상세한 구조를 보여주는 고리의 화상을 보냈다. 토성의 고리는 구름의 정상으로부터 약 7000km에서 30만km 이상의 높이까지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틈이 있고, 밝기의 정도가 다른 띠가 동심원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겉모양으로부터 고리는 A, B, C, D, E, F, G의 일곱 가지로 분류된다. 지구에서 똑똑히 보이는 것은 A고리와 B고리이다.
보이저는 이들 고리가 더욱 가느다란 무수히 많은 고리로 되어 있다는 것과 완전한 간극으로 생각되었던 곳에서도 가느다란 고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고리의 형태는 원형뿐만 아니라 타원형의 것과 비틀어져 있는 것도 있다. 또 고리위를 방사상으로 가로지르는 어두운 줄인 `스포크`를 관측했다. 고리의 두께는 최대 20m라는 데이터가 나왔다. 고리의 너비를 생각하면 이것은 굉장히 얇은 것이다.




▶ 1980년 정치쇄신위원회, 정치활동규제 대상자 811명 발표
▶ 1979년 공화당총재 김종필 선출
▶ 1977년 자이레서 화산폭발, 2천여명 사망
▶ 1974년 동아일보, 천주교도 인권회복기도회 기사로 경영진과 기자들의 의견충돌 12일자 휴간


▶ 1969년 중국 전 국가주석 유소기 사망

류사오치 [劉少奇(유소기), 1898.11.24~1969.11.12]

  유소기 전 중국 국가 주석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의 학대에 시달리다 1969년 11월 12일 후난성(湖南省)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유소기의 시신은 '유위황'이라는 가명에 '무직'의 노인으로 화장됐다.

  유소기의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유소기는 '4인방'이 체포되고 부활한 등소평이 최고지도자가 된 1980년 2월 명예회복이 되었다. 사후 12년이 지나 수습된 유골은 부인 왕광미에 의해 1980년 5월 19일 북해함대에 실려 보슬비 속을 헤치고 청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등소평과 함께 모택동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1차 표적이었다. 유소기는 모택동이 뒤에서 사주하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야만적인 언어적-신체적 모욕을 당했다. 급기야 1969년 10월 제8기 중앙위원회 확대 제12차 총회에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어 축출됐다.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을 지고 국가 주석직을 유소기에 물려주고 당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던 73세의 모택동은 농업의 기계화, 물질적인 유인, 자본투자 등을 지지하는 실무파들이 주도권을 쥐자 중국이 개인주의, 자본주의 경향인 우경으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공산혁명을 일으킨 모택동 자신의 몰락을 의미했다. 모택동은 먼저 군대를 자기편으로 만든 뒤 학생들로 홍위병을 조직, 지식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1969년 미국 후생성, DDT 사용금지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는 잘 알려진 살충제중 하나이다. DDT는 1874년 처음으로 합성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때 말라리아, 티푸스를 일으키는 모기의 구제와, 군대와 민간에서 여러 곤충으로 인해 일어나는 질병의 구제에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DDT는 농업분야에서 살충제로 쓰이게 되었고, 곧 생산과 사용이 급한 상승세를 보이게 된다. 1962년 미국의 해양 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펴내 미국내에서의 무분별한 DDT 사용에 대한 환경적인 영향과, 환경에 풀어진 화학물질이 생태계나 사람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책은 환경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침묵의 봄"이 불러온 대규모 항의로 인해서 미국에서 1969년 사용금지 판단이 내려졌고, 1972년도에 DDT 사용을 전면 중단하였다.




▶ 1965년 한일협정 비준안 일본중의원 통과
▶ 1964년 미국, 원자력잠수함 시 드래건호 일본 사세보항에 처음 기항
▶ 1964년 최초 대일 여객선 아리랑호 취항
▶ 1963년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 검거


▶ 1962년 '6억달러'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

5·16 후 산업 재건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1961년 6월 20일 6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양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정희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조기 타결을 지시했다. 박정희는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고, 6억달러 이하는 양보할 수 없다”는 긴급훈령을 내렸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를 다시 만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타결지었다. 금액은 6억달러로 매듭지었으나 ‘청구권’이란 문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독도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독도 파괴를 일본 측에 제안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일본 측의 의견에도 합의해줬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충격을 주었다.




▶ 1962년 학사고시 실시
▶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본 방문해 이케다 수상과 한일국교정상화에 합의
▶ 1960년 민주당 구파, 신당 발기인대회를 통해 당명을 신민당으로 결정



▶ 1957년 미국 트리뷴지 여기자, 기사소스 증언거부로 금고형

마리 토레(Marrie Torre)는 뉴욕 트리뷴지의 전직 기자로 명예훼손 행위에 관한 기사 소스를 밝히기를 거부함으로써 10일간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유형의 사건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브루클린 출신의 토레는 1955년에 입사해서 1957년에 라디오와 TV 칼럼니스트로 활약도중 CBS 간부의 말을 빌어 ‘주디 갈란드(‘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로 유명한 1940~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미국의 배우 겸 가수)가 살이 터질 듯이 쪄서(terribly fat) CBS 스페셜 프로 출연을 망설이고 있다’라는 말을 전한 것이 발단이 됐다. 주디는 방송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토레는 기자의 기사소스 보호 의무를 이유로 들어 심지어 가족들에게마저도 입을 꼭 다물었다. 금고형에 처해질 수 있음을 경고 받은 후에도 토레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언론의 자유권을 주장하는 CBS 측의 호소에도 법원은 10일간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 1955년 서독군 발족
▶ 1953년 닉슨 미국부통령 내한


▶ 1948년 도쿄 군사재판, 전범 7명에게 교수형 선고

1948년 11월 12일 흔히 동경재판이라 불리는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전범 7명이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군사재판에는 도조를 포함한 28명이 A급 전범자로 기소됐으나 재판부는 심리 도중에 사망한 마쓰오카 요스케와 나가노 오사미, 그리고 정신병증세를 보인 오카와 슈메이를 빼고 나머지 25명에 대해 전원 유죄를 인정했다. 도조를 포함한 7명에게는 교수형을, 16명에게는 종신형을, 한명에게는 금고 20년을, 또 다른 한 명에게는 금고 7년의 형을 선고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다.




▶ 1945년 동양척식회사, 신한공사로 개칭



▶ 1942년 과달카날 해전서 일본 대패

태평양전쟁 개전 초부터 1942년 여름까지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태평양의 섬들을 잠식해 들어갔고 솔로몬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과달카날섬 역시 그중 하나였다. 1942년 8월 7일, 섬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 함대에 야습을 감행,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나 미 해병대의 상륙을 막지 못했다. 결국 제공권과 제해권이 미군에 넘어가자 일본군은 증원부대를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저지당했다. 11월 12일, 섬을 탈환하기 위한 일본군의 총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최고 3만6000명에 달했던 병력 중 2만4000명이 목숨을 잃은 일본은 태평양전쟁 개전 이래 최초의 대패를 기록했다.




▶ 1930년 런던에서 제1회 영국-인도 원탁회의


▶ 1929년 영화배우 겸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출생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모나코의 왕비. 《다이얼 M을 돌려라》《이창》《갈채》 등에서 기품 있고 우아한 미모와 연기로 인기를 끌었으며, 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56년 모나코 왕 레니에 3세와 결혼하였으며,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개막
▶ 1920년 조선징발령 공포
▶ 1918년 독일 사회민주당, 민주공화국 선포
▶ 1915년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출생


▶ 1866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출생

쑨원[孫文, 1866.11.12~1925.3.12]

  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외과에 능하였는데, 병원은 날로 번성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北京]에서 객사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1857년 우루과이의 제2대 대통령(1835~38) 오리베 사망
▶ 1848년 그리스 언어학자 하드지다키스 출생


▶ 1840년 프랑스 조각가 로댕 출생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1840 ~ 1917)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 1880-1900년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의 최대의 거장으로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이로써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여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 1746년 프랑스 물리학자 샤를 출생

샤를(1746 ~1823)은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1783년 로베르트와 더불어 처음으로 수소를 이용해 사람이 제어하는 기구를 제작하고 시승했다. 1787년 일정 압력 기체의 부피와 온도와의 관계에 관한 샤를의 법칙(⇀ 게이 뤼삭의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 1463년 동국지도 제작

사진출처 http://naver.me/5mY53RH4

조선 세조 9년(1463)에 정척과 양성지가 만든 전국지도.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지도로 조선 전기 조선팔도전국지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현재 모사본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임금인 세조는 대군시절부터 직접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발명하여 토지를 측량하러 다니고, 단종시기에는 정척, 강희안, 양성지 등과 함께 서울지도와 조선팔도지도를 함께 제작하는 등 우리나라의 지도제작에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에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이 조선전도, 팔도도, 각 주현도(州縣圖) 등을 만들라는 명령을 정척, 양성지에게 내렸고, 세조 원년(1455)에는 세조가 집현전직제학에게 지리지와 지도를 같이 작성하라고 명했다.

이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붙여놓은 한반도의 형세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그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였고, 특히 섬과 해안지방의 모습을 굉장히 세밀하게 그렸다. 하계망과 산계(山系)가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고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부분, 그리고 각종 산맥들을 상세히 표시했다고 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묘사된 한반도는 고려 시대 만들어진 한국의 지도 중 가장 정교한 지도를 붙여넣었다고 추정한다. 동국지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차이가 있음은 혼일강리역대국지도를 만든 태종 시기 이후로 조선의 토지측량기술과 지도 제작기술이 매우 크게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의 지도들과는 달리 도로, 부, 군현, 병영, 수영 등 인문현상이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특히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흑룡강 유역 지역까지 상세히 그렸음이 가장 큰 특징이다.

동국지도의 형태와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은 동일계통의 지도로 국보 제248호 조선방역지도와 아래의 보물 제1538호인 동국대지도가 존재한다. 이와는 별개로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와 일본에 소장된 조선국회도(朝鮮國繪圖)가 동국지도의 한 유형이라고 추정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https://youtu.be/sw154a5K8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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