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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4일

✿1990년 11월 14일
새 민방 SBS서울방송 정식 출범


새로운 민영방송인
서울방송(SBS)이 정식출범했다.
새 민방 서울방송이 1990년 11월 14일 정식 출범했다. 새 민방의 탄생은 정부가 공민영경쟁체제로 방송정책을 수정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정부는 같은 해 6월 방송구조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국민 감정을 감안, 새 민방의 재벌참여배제 원칙과 특정인의 민방주식 30%이상 소유 금지 등의 기준을 세웠다.

정부는 이 기준에 따라 민방참여를 신청한 60인중 (주)태영을 지배주주로 하는 31인의 민방주주가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태영의 민방주도와 관련, 재벌 배후설, 청와대 관련설 등 의혹이 터져나오면서 일대 파문이 있었다. 새 민방은 1991년 상반기 라디오방송을 내고, 하반기 에 TV전파를 내보냈다.


▶2009년 부산 실탄사격장 화재 참사
▶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숭모제
(崇慕齊:박 전 대통령 생가)
▶2004년 불교 조계종 원로
석주스님 입적
▶1994년 가톨릭의대,
국내최초로 신장 재이식 수술
▶1994년 현대자동차, 태양광자동차 개발



▶ 1994년 유로스타 개통!
유로스타는 영국과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고속열차이다. '채널터널' 또는 '영불해저터널'을 통과하는 유로스타는 런던에서 출발하여 파리, 브뤼셀 또는 암스테르담까지 몇 시간 내로 도착한다.
또한 칼레, 릴, 파리 디즈니랜드까지 직행으로 운행된다.





▶1993년 전국 6대도시
주유소 설치 거리제한 전면 폐지
▶1993년 한국고고학의
개척자 김원룡 박사 별세
▶1991년 세계일보 사태.
기자 1백30명 집단사직
▶1991년 노로돔 시아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 13년 만에 귀국
▶1984년 대학생 약200명 민정당사
난입.13시간 만에 강제해산, 전원 연행



▶1984년 동작대교 개통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마감
▶1983년 아이슬란드 시인
토마스그뷔드뮌드손 사망
▶1983년 중공군 조종사
미그17기 몰고 대만으로 망명
▶1983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1차분 영국 도착



▶1982년 프로복서 김득구,
권투경기 중 의식불명. 4일 후 사망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호텔 특설링에서 챔피언 '레이 붐붐 맨시니'선수가 wba 세계 라이트급 타이틀매치를 하고 있었다. 13라운드까지는 난타전이었다. 14라운드 19초가 막 지났을 때 관중의 환호성이 터졌다. 김 선수가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로프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심판의 카운터는 끝나 있었고, 그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김득구선수는 급히
데저트 스프링스병원으로 옮겨져 긴급
뇌수술을 받고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99시간 만인 11월 1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ap 통신은 1982년도 '스포츠 10대 뉴스'를 발표하면서 김 선수의 사망을 5위로 올렸다.





▶1981년 정부, 한-우루과이
무역협정 체결



▶1980년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신군부의 압력에 못이겨 임시총회를 열고, 신문-방송-통신의 통폐합과 방송의 공영체제화, 유일한 대형통신사 신설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 통폐합을 결의했다. 이 결의문은 “신문과 방송, 통신을 자율적으로 개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사실은 통폐합 대상 발행인과 경영인을 보안사로 끌고가 통폐합에 이의가 없다는 각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한 전두환 정권의 강압의 결과였다.


   각서에 따라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 등 전국 64개 매체가 14개 신문, 3개 방송, 1개 통신 등 18개 매체로 통합되고 172종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됐다. 언론통폐합 조치는 11월 25일까지 해당사별로 절차를 마무리하고 12월 1일부터 개편체제에 들어갔다. 흡수통합 대상이 된 언론기관은 종합일간지 1개, 경제지 2개, 통신 6개, 방송 6개(중앙3 지방3), 지방지 4개 등 19개사(社)였다.

   언론통페합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아일보를 경향신문에, 서울경제는 한국일보에, 내외경제신문은 코리아헤럴드에, 지방지는 1도1지 원칙하에 흡수 통합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은 합병, 연합통신으로 발족하며, 동아방송과 TBC는 KBS에 통합한다는 것 등이다. 또한 지방주재 특파원 제도를 폐지하여 신문이 발행되는 지역 밖의 뉴스는 정부지배하의 통신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KBS와 KBS가 주식의 70%를 소유한 준(準)관영 MBC로 2원화함으로써 방송매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은 한국 언론계를 뒤바꾼 일대 사건으로, 이때 단행된 언론인 해직 조치로 1,238명의 언론인이 강제해직돼 지금도 그 상처를 남기고 있다. 2010년 1월 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언론기관 통페합과 관련하여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언론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며 "피해자 명예 회복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의 권고는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통폐합 이전으로 원상복귀시킬 수는 없다.  


▶1980년 대리모에 의한 첫 신생아 출산
▶1977년 한국-가나 국교 수립
▶1977년 한국-스리랑카, 국교수립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담.
국제곡물은행 설치 합의



▶1973년 호남-남해고속도로 개통

https://youtu.be/7n0u3u1xjEI



▶1972년 소설가 주요섭 사망

주요섭(1902 ~ 1972)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이다. 그는 형 주요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를 마친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졸업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등이 있다. 1984년 주요섭의 이름을 딴 '주요섭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중기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한 예술적 향취를 풍기는 자연주의적 경향, 다시 말기에는 사회고발적인 현실의식을 짙게 풍겼으나 대표작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주요섭의 대표작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3년 아이슬랜드 남쪽바다 화산폭발
▶1961년 서독, 제4차 아데나워
내각 성립
▶1960년 신민당,
국무원 사무처에 신당 접수
▶1958년 유엔총회,
한국통일 부흥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7년 무소속(울산갑)
김수선 의원 제명안 국회상정
▶1956년 김창룡중장사건,
육군특별조사단 조직
▶1955년 미-일, 원자력협정 조인
▶1955년 프랑스 작곡가 셔우드 사망



▶1954년 나세르가 주도하는 이집트
혁명회의, 나기브 대통령 해임

1954년 2월 25일 나기브 이집트 대통령 겸 수상이 가말 아부달 나세르 부통령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나세르가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나기브는 군사정부의 몇몇 위원들이 나세르를 반대해 27일 대통령에 복직했다. 이후 양파의 권력투쟁은 계속됐고 결국 11월 14일 나기브 대통령은 해임됐다. 나기브는 나세르에게 밀려났을 뿐 아니라 체포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1954년 10월 수에즈 운하 철수에 관한 영국과의 협상으로 많은 신임을 받고 있던 나세르는 수상 겸 혁명군사회의의장이 되어 이집트의 정권을 장악했다.

나세르(위)와 나기브(아래)


▶1947년 유엔총회, 한국총선거안 가결
▶1930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치
▶1930년 일본 하마구치수상,
도쿄역에서 우익청년에 피격 부상
▶1922년 BBC 첫 라디오 방송
▶1922년 양정고보생들,
일본인교사 배척 맹휴(盟休)



▶1921년 국내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 제작

《월하의 맹서》는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작품이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 총독부에서 자금을 대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한국인이 손수 만든 최초의 영화이고, 전체가 극영화(劇映畵)로 된 작품이다. 이전에도 십여 편의 영화가 있었는데, 연극 실연과 영화가 반복되는 연쇄극(連鎖劇)이었다. 주연 배우가 있고 줄거리가 있는 최초의 극영화이며, 여자 주인공 역할을 실제 여배우가 맡은 최초의 영화이다(→이월화). 그 전까지는 여자 역할은 남자가 분장해서 하였고, 그 시절에 여배우는 당연히 ‘여자 연극배우’를 가리켰다.


▶ 1917년  전 대통령 박정희 출생

             박정희 [朴正熙, 1917.11.14~1979.10.26]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이다. 경상북도 선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지금의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다가,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8·15해방 이전까지 관동군 중위로 복무했다. 해방 후 귀국해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로 임관했다. 1949년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군내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혐의를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소령으로 복귀했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1년 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2년 7개월 동안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전면적인 사회개혁과 국토 및 경제개발계획 등 조국근대화 정책을 펼쳐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1963년 예편한 뒤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조인했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으며,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는 등 찬반이 엇갈리는 과감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1969년의 3선개헌, 1972년의 10월유신 등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고, 1979년에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18년간에 걸친 집권으로 절대빈곤의 극복이라는 중요한 업적을 달성했으나, 상대적 빈부격차의 심화,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등 부정적인 영향도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1915년 아인슈타인 1915년
`상대성이론` 발표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 상대성이론을 연구하여 1905년 발표하였으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원자폭탄 연구인 '맨해튼계획'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통일장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블랙홀




▶1908년 쿠바의 초대 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 사망
▶1908년 중국 황제
광서제(光緖帝) 사망



▶1908년 미국 정치인 조지프 매카시 출생

위스콘신주(州) 그랜드슈트 출생인 조지프 매카시는 위스콘신주 마켓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순회판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해병대원으로 종군하였다. 1946년 위스콘신주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 되었고, 1952년 재선되었다. 1950년 2월 상원의 비미활동(非美活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레드 퍼지(Red Purge:적색분자를 공직·기업 등으로부터 추방하는 일)’에 나서 반공선풍(反共旋風)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일으켰고, 1954년 12월 상원의 비난결의에 의하여 급속히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매카시즘(영어: McCarthyism)이라고 한다.  




▶1900년 작곡가 코플란드 출생
▶1889년 인도 수상 네루 출생
▶1885년 영국, 제3차 버마전쟁 시작



▶1873년 최익현 또 상소…대원군 물러나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1873년 11월 14일. 이미 5년전에 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는 상소를 한차례 올렸던 면암(勉唵) 최익현(崔益鉉)이 또다시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유림의 기반이 송두리째 뿌리뽑힌 데 따른 자구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원군에 대한 반기였고 도전이었다. 대원군의 행태까지 낱낱이 고발한 이 상소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한 고종의 뜻과 일치해 대원군의 10년 세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1840년 프랑스 화가 모네 출생
프랑스 인상파화가 인상파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 에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빛은 곧 색체'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탐색했다.
말년에 '수련' 연작은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게 된다.





▶1831년 헤겔 사망

헤겔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8.27~1831.11.14]

   근대 철학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남긴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자.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환영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사람.
   1831년 11월 14일 숨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처럼 보는 이가 처한 이데올로기 입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 철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가 정립한 변증법은 혁명의 시기에 계급투쟁의 논리를 뒷받침할 모델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이후 21세기 미국의 ‘뉴 헤겔리안’ 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을 분리보다 통합, 상호 인정을 강조하는 상생의 모델로 바라보고 있다.
   177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 헤겔은 어릴 적부터 문학과 철학에 푹 빠져 살았다. 튀빙겐대를 졸업하고 중년이 될 때까지 헤겔은 가정교사 강사 기자 고등학교 교장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헤겔은 ‘이 세상의 위대한 일 중 열정 없이 수행된 것이 없다’는 말을 남겼지만 그 자신은 ‘열정’이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평생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중상류 계층의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체면과 규칙을 중시했으며 유머감각, 임기응변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48세 때 베를린대 교수가 되어 논리학 역사철학 등을 강의하면서 유명해졌고 59세 때 베를린대 총장이 되면서 생의 정점에 도달했다.

   젊은 시절 프랑스대혁명 정신을 환호했던 헤겔의 변증법은 그 자체로도 혁명적이다. 칸트의 이분법에 맞서 헤겔은 모순을 모든 변화의 핵심적 원동력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역사를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던 헤겔은 자신의 철학이 절대정신의 실현을 증언하는 지식이기를 바란 듯, 역사를 관념 안에서 스스로 완성시켜 버리는 함정에 빠져 들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침략 전쟁을 벌이자 베토벤은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교향곡 3번(영웅)의 헌사를 담은 표지를 찢어 버린다.
   반면 헤겔은 나폴레옹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바침으로써 끊임없는 변화를 주장하는 변증법을 스스로 배반하고 말았다.
   ‘나는 말을 탄 절대정신을 보았다!’


▶1412년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부녀외출시 얼굴 가리도록조처(태종12)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 을 편찬했고 성소피아 대성당을 완성시킨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전임 황제들이 잃어버렸던 영토를 회복하고 지중해 및 서양 세계 전역에 걸쳐 제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자 영토팽창 정책을 중시한 황제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치세 초기에 이미 시작된 로마법의 재편찬이었다. 흔히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 으로 알려진 이 법전은 로마법에 규정된 사회생활의 기본 규칙들이 그리스드교 윤리에 따라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그후 수백 년 동안 비잔티움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민법 역할을 했다.




https://youtu.be/8vg4FmuHJZk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