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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3일

▪️ 2010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해제


아웅산 수치 여사, 13일 석방.지난 7일
20년 만에 총선을 실시한 미얀마 군사 정권은
일주일 뒤인 13일 수치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 조치를 해제했다.

수치 여사는 군사정권에 의해 1989년 첫 가택연금
조치를 당한 뒤 15년을 연금 상태에서 생활해왔고,
최근 7년 동안은 줄곧 외부와 단절된 상태였다.

이날 오후 자택 주변의 바리케이드가 치
워진 뒤 6시쯤에는 약 5000명의 지지
자들이 담장 밖에 몰려왔다. 전통 의상을 입은
수치 여사는 담장까지 나와 “이제는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시기다. 국민 전체가 화합해
노력해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는 일제히 환영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영웅의 석방을 환영한다.

다른 모든 정치범도 풀려나야 한다”고 말했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및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각국 지도자들도 환영의사를 밝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수치 여사의 존엄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토르비오에른 야글란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의장은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을 위해 오슬로를
방문해 달라”고 초청했다.

수치 여사는 지난 1991년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시상식에는 아들들이 대신 참석했었다.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으로 불만이 많은 중국 지도자들은 논평을
내지 않았다.

미얀마의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이 엇갈린다.

나바네템 필라이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수치 여사의
석방은 미얀마 당국이 미래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이려는 긍정적 신호이고, 수치 여사는 미얀마 변화에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뉴욕 ‘휴먼라이츠 워치’의 아시아 담당 부국장
엘레인 피어슨은 “군사 정부가 국제사회의 이목을 불법 선거로부터 다른 데로 돌리려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미얀마 군사정권이 지원한 통합단결발
전당(USDP)은 지난 7일 총선에서 약 75%의 의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군인들이 수십년간 입었던 군복(軍服)을 ‘신사복’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마친 셈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 2015년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연쇄테러사건 발생하다. 중앙유럽표준시 21시 16분에 프랑스 파리의 1구, 10구,11구, 파리북부의 일드프랑스, 프랑스와 독일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생드니의 스타디드 프랑스 근처 등,
최소 7곳에서 발생한 동시다발
'연쇄테러사건'이다.
최소 3건의 폭발과 6번에 총격이 있었고 바타클랑극장에선 최소 61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리 인질극은 종료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130여명이 사망했다.




▶ 2010년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해제
▶ 2009년 국민연금, 영국 HSBC 건물 구입
▶ 2008년 종부세 '세대별 합산부과' 위헌
▶ 2005년 제1회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서 삼성 라이온즈 준우승(지바롯데 우승)
▶ 2004년 경복궁 경회루 40여년 만에 개방
▶ 2001년 '수지 김 사건', 남편의 자작극으로 밝혀져 파문


▶ 2001년 인기 탤런트 황수정,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드라마 에서 '예진아씨'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었던 '그녀'였기에 많은 팬들이 충격을 받았다.




▶ 1998년 국제통화기금, 브라질에 415억달러의 구제금융지원을 승인
▶ 1997년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와 조순 민주당 총재, 통합당의 대통령후보를 이총재로, 당총재를 조총재로 공식발표


▶ 1996년 오늘, 조선총독부 건물 완전 폭파!

1996년 '조선총독부철거'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철거비용과 일본으로 옮기는 전체비용을 내고 가져가서 다시 짓겠다"는
말을 들은 '김영삼 대통령'은
그 다음날,'폭파'명령을 내려 '깨끗이' 폭파시켜버렸다!




▶ 1995년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 사임. `일본은 식민통치기간중 한국에 좋은 일을 했다`고 망언



▶ 1995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한국방문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오른쪽)이 특별기편으로 서울공항에 도착, 공노명 외무장관과 함께 환영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내외가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5년 11월 13일, 4박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첫 방한이었다.
양 정상은 14일 청와대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및 국제정세와 경제협력 증진방안을 비롯한 쌍무현안에 관해 폭넓게 논의했다. 또한 한반도 주변정세에 대해서도 협의,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 한중 양국에 긴요할 뿐 아니라 아ㆍ태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면서 한반도문제는 주변국의 이해와 협력하에 남북당사자간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강 주석은 이어 경제 4단체장이 주최하는 오찬에 참석한 뒤 국회 본회의에서 연설했다.
15~16일 양일간에는 삼성반도체, 현대자동차 등 지방산업 시설을 시찰한 후,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7일 일본으로 떠났다. 강 주석의 이번 방한은 그동안 경제분야에만 치중해온 한중관계가 점차 정치ㆍ외교 분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1993년 파루크 레가리,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선출
▶ 1992년 육군사조직 `알자회` 파문



▶ 1985년 콜롬비아 루이스화산 폭발로 2만5000여명 사망
오랫동안 휴면상태로 있었던 남미 콜롬비아 서부의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5399m)이 1985년 11월 13일 폭발해 2만5천명의 사망자와 1만4천여 명의 이재민을 냈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화산폭발 이후 금세기 최대의 화산참사로 기록된 이 폭발사고는 사고가 나기 전 폭발조짐이 보였으나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만년설이 녹아 홍수로 변함에 따라 그 피해가 더 컸다.




▶ 1984년 중국 산서성 당서기 선거, 중국사상 처음 비밀투표 실시
▶ 1982년 레이건, 대(對)소련금수조치 해제발표. 새 동서무역정책 선언
▶ 1981년 미국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 2차 발사
▶ 1980년 건설부, 동서고속도로(171.5km) 건설계획 확정
▶ 1980년 제15차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대회 개최



▶ 1974년 아라파트 PLO의장 유엔총회서 첫 연설




▶ 1974년 유엔총회, 남아공화국 축출안 가결
▶ 1971년 미국 유인 화성위성 마리너9호 화성궤도 진입



▶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


청년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하다. 전태일은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 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위생환경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뉴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연락하고 위험한 노동환경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 당했고, 박정희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 과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친구 김계남 (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방치되다가 쓰러졌으며 이후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되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노동문제가 사회 이슈화되어 민주노동에 시금석이 되었다.




▶ 1966년 일본, 밀월여객기 추락. 신혼부부 11쌍 등 51명 몰살
▶ 1962년 한국-독일 차관협정 조인
▶ 1961년 쿠알라룸프르에서 콜롬보계획 각료회의 개막



▶ 1960년 3.15부정선거로 기소된 장경근 전 내무장관이 입원중인 서울대병원에서 일본으로 탈주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36년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이던 1935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38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 1941년 경성복심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1948년 서울지방법원장, 1949년 내무부차관, 1950년에 국방부차관, 1953년 한일회담 대표를 지냈다. 1957년에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1959년에는 자유당 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60년 5월 3·15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일본으로 밀항했다. 1974년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1977년에 귀국했다. 1978년 7월 25일 사망했다.





▶ 1956년 미국, 공공버스 인종차별 위헌 판결

미국 연방대법원이 '공공버스 인종차별 위헌 판결'!
1955년 12월 1일 미국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의 흑인
로사파크 부인이 공공버스의 '백인전용석'에 앉았다가 체포가 된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마틴 루터 킹목사를 대표로 한 흑인들이 투쟁에 참가했다. 결국 공공 버스에서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 냈다.






▶ 1946년 영등포역 구내서 열차충돌 41명 사망
▶ 1945년 군정청에 국방사령부 설치, 모병실시
▶ 1945년 남북한, 바터제 교역 채택
▶ 1940년 소형군용차 지프 개발



▶ 1940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환타지아' 첫 공개  
https://youtu.be/bmpt-s-zYLI

  ‘클래식 뮤직비디오’ 흥행엔 실패
   디즈니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 회사다. 1940년 오늘 처음 공개된 장편 애니메이션 <환타지아>는 디즈니 초창기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비록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환타지아>에는 이후 디즈니의 성공을 이끈 예술적 활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환타지아>는 일종의 클래식 뮤직비디오다. 유명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그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대부분 음악을 연주했다.

   시작은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교향시 ‘마법사의 도제’였다.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첫 창조물인 미키 마우스의 인기가 도널드 덕에 밀려 떨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의 인기를 되찾아주고 싶었고, ‘마법사의 도제’를 주제곡으로 삼은 단편 애니메이션에 미키 마우스를 출연시켰다. 단편 애니메이션 <마법사의 도제>를 만드는 데는 당시 여느 디즈니 단편 제작비(4만달러)의 3배 이상인 12만5000달러가 투입됐다. 디즈니는 이 제작비를 들여서는 이익을 남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계획을 밀어붙였다. 위대한 마법사의 어수룩한 도제 미키 마우스가 스승의 마법 모자를 이용해 청소를 하다가 사고를 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 등 7편의 고전음악을 주제로 삼은 단편 애니메이션이 더해져 장편 <환타지아>가 완성됐다. 디즈니는 음악의 느낌을 살리고자 여러 개의 스피커에서 다른 악기 소리가 나는 ‘판타사운드’도 개발했는데, 이는 오늘날 스테레오 시스템의 효시가 됐다.

   애초 월트 디즈니는 <환타지아>를 시리즈물로 기획했으나, 개봉 당시의 흥행 실패 때문에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환타지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인정받는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등을 들을 수 있는 속편 <환타지아 2000>이 개봉됐다. 생전 디즈니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마법사의 도제>는 속편에도 다시 포함됐다.



▶ 1939년  캐나다 출신의 외과의사 노먼 베쑨 사망

베쑨 [Bethune, (Henry) Norman, 1890.3.3~1939.11.13]

   1939년 11월13일 중국 허베이성 오지 마을. 백인 한 사람이 숨졌다. 캐나다인 의사 노먼 베순(Norman Bethune, 중국 이름 白求恩). 중국에서는 슈바이처보다 더 존경 받는 인물이다.

   온타리오주에서 1890년에 태어난 그는 순탄하게 자라났다. 토론토에 첫번째 의과대학을 세운 할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의대를 졸업했을 때까지는. 인생의 전환점은 전쟁. 군의관으로 참전한 1차 대전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뒤로는 남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사회봉사에 전력하면서도 북미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라는 명성을 쌓은 그는 1935년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민주선거로 선출된 좌파정권을 무력으로 뒤엎으려는 파시스트 쿠데타로 야기된 스페인내란에 뛰어든 것.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등 지성인들도 참전한 스페인 내란에서 그가 운영한 응급의료팀은 현대 야전병원의 시초로 꼽힌다. 응급채혈과 이동수혈을 처음 선보였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군의 승리로 내란이 끝난 뒤 행선지는 일본과 싸우던 중국. 홍군(공산군)에 뛰어든 그는 전력을 다해 부상자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69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본군 포로를 포함해 100여명을 수술한 적도 있다.

   수술 도중 패혈증에 감염돼 죽어가면서도 포탄이 터지는 전선을 찾아 다녔던 베순은 캐나다와 중국에서 성자로 추앙 받는다. 1990년에는 양국 공동으로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도 찍었다. 양국에는 베순의과대학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다. 1991년에야 전기 출판이 허용된 탓이다. 베순을 기리며 우리를 본다. 의대를 정점으로 하는 입시구조에 막대한 돈이 쓰여도 베순 같은 의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약자를 껴안으려는 이땅의 몇 안 되는 의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 1933년 독일 총선거에서 나치스 대승
▶ 1921년 안창남, 한국 비행사 최초로 저공 비행에 성공
▶ 1921년 미국-영국-프랑스-일본, 태평양방면 영토권보장조약 조인
▶ 1918년 여준 등 중광단인사 39명 만주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 1918년 오스트리아 공화국 선포



▶ 1908년 나비연구가 석주명 출생

나비연구가로 유명한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은 생물학자로서, 한국을 연구하는 국학자로서 불꽃같은 삶을 산 인물이다. 한국 나비의 종류를 정하고, 그 이름을 지은 나비분류학자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일찍이 외국인들이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한 오류를 바로잡은 일이었다.




▶ 1907년 프랑스 자동차 제작자 폴 코르뉘, 헬리콥터를 설계, 최초 시험비행에 성공

15세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헬리콥터의 간단한 스케치를 남겼으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여러 가지 모형이 고안, 실험되었다. 조종사가 탑승하여 실제로 이륙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선 직후이다. 1907년 프랑스의 폴 코르뉴는 약 2m 높이에서 20.25초간 공중정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비행이 가능한 헬리콥터가 최초로 이륙하는데 성공한 것은 1937년 하인리히 포케가 개발한 포케 울프 Fw 61기였다. 1939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이골 시콜스키는 단식 로터에 꼬리 회전익을 갖춘 오늘날의 반토크 테일로터 형식의 기초가 된 VS-300을 개발했다.




▶ 1903년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 사망

카미유 피사로(1830 ~ 1903)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감정은 섬세하고, 초기의 농원(農園)의 연작(連作)도 또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 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하여금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다.




▶ 1893년 비타민 K의 연구로 유명한 미국 생화학자 에드워드 도이지 출생
▶ 1887년 주미공사 박정양 일행 향미(向美)



▶ 1868년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 사망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의 피사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 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라캄비알레 디 마트리모니오(약혼 어음)」는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이들 가극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서 마침내는 빈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베토벤은 46세로, 제9교향곡 작곡에 착수하려 하던 시대로서, 그 명성은 빈은 물론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빈 사람들이 열광하는 로시니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토벤의 연주회가 로시니의 가극에 압도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얼마나 로시니의 음악이 당시의 빈 사교계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서 런던에 갔으며, 이듬해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갔는데, 런던에서는 17만 5천 프랑의 큰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상연했으며, 왕궁과 시민이 통틀어 열광했던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빈에서의 성공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슬픔의 성모(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에 완성, 이듬해 1월 7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로시니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1855년 파리로 옮기고부터는 차츰 나빠지더니 1868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타계했다. 가극 38개, 칸타타 15개 등 성악곡이 대부분이고, 기악곡은 적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윌리엄 텔 서곡」은 교향곡으로서도 훌륭하다.



▶ 1851년 영국-프랑스간 최초의 통신케이블 설치



▶ 1850년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출생

스티븐슨 [Stevenson, Robert Louis (Balfour), 1850.11.13~1894.12.3]

   스티븐슨은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수필과 모험담, 심리소설 등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작품을 발표한 스코틀랜드의 작가이다. 소설 <보물섬 Treasure Island>(1881)·<납치 Kidnapped>(1886)·<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 등으로 유명하다. 1884년 9월부터 1887년 7월까지 영국의 본머스에 살면서 <어린이의 시동산 A Child's Garden of Verses>(1885)을 개작하고, <마크하임 Markheim>·<납치>·<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썼다. 건강상의 이유로 1888년 6월부터는 남태평양에서 지내며 그곳의 경치와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알려고 애를 썼다.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펴는 등 남태평양의 좋은 자연환경 덕에 건강이 호전되는 듯했으나 뇌출혈로 갑자기 숨졌다. 그가 죽은 직후 틀에 박힌 모방 작가라느니 동화작가밖에 될 수 없다느니 하는 혹평을 받았으나, 1950년대에 와서 독창성과 힘을 가진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 1460년 포르투갈 항해왕자 엔리케 사망

포르투갈의 왕자. 주앙 1세(João)의 셋째 아들. 1415년 북아프리카의 회교도(回敎徒)를 쳐서 위훈을 세웠다. 궁정을 나와 항해 학교를 세워 세계 제 1의 항해 기술자를 양성하고 그가 파견한 탐험 항해가들은 마두라ㆍ보자도르 곶ㆍ볼랑르 곶ㆍ베르데 곶 등에 차례차례 도달하였다. 또 아라비아인과 유대인의 수학자를 리스본에 초청, 천문학ㆍ지리학ㆍ의학 등의 학술을 진흥, 지도ㆍ항해 용구의 제작을 하는 등 문화의 발달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뒤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아프리카 항해와 식민지를 이루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 354년 기독교 사상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출생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354년 ~ 430년)는 4세기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주교로, 개신교, 로마 가톨릭교회 등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하였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룬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항상 반성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고, 신에 의지하지 않고는 완전해지지 못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했다.



https://youtu.be/o0jBiEGU6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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