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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 월 17일

✿1980년 11월 17일
KBS, 공영체제로 기구 개편 발표

여의도 KBS 사옥.
한국방송공사(KBS)가 1980년11월17일 언론계
개편에 따른 방송사 통합절차를 협의, 공영체제로
기구를 개편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개편안에 따라 채널 9는 KBS 제1TV로 명명,
종합방송을 방영하며 채널 7(TBC TV)은 KBS 제2TV로 개칭, 사회교육 및 교양방송을 내보내기로 했다.

라디오의 경우 KBS 제1·제2방송 외에 TBC라디오를 제3방송으로 바꿔 방송하고 DBS방송은 제4방송의
성격을 띠면서 지역성을 고려, KBS라디오 서울로 개칭, 수도권 생활정보매체로 전용하기로 했다.

FM은 KBS FM을 제1FM으로 서양의 클래식과 국악을,TBCFM을 제2FM으로 개칭, 경음악과 가요곡을 내보내기로 했다.

▶2007년 방글라데시에서 사이클론
으로 11000여 명이 숨지는 등의 피해
발생
▶2002년 조중훈 한진 회장 별세


▶2002년 반달가슴곰, 지리산에서 20년 만에 첫 공식확인

지난 10월 초 지리산 해발 1120m 고지에서 촬영된
야생 반달가슴곰(점선 안).반달가슴곰은 부근 물웅덩이로 샘물을 먹으러 내려오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치한
열감지 무인카메라에 찍혔다./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2000년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40년 만에 가장 치열했던 미국 대통령선거가 2000년 11월 17일 미 전역에서 실시됐다. 선거전부터 예측할 수 없었던 박빙의 승부는 선거결과로까지 이어졌다. 개표과정 동안에만 10여 차례나 선두가 바뀌는 등 미 선거사상 최대의 숨막히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개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인 이날 밤 세계언론들은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나라의 지도자들도 부시 후보에 축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몇시간 뒤 최대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에서 재개표가 불가피하다는 발표가 나오자 언론들과 지도자들은 당선보도와 축전을 전면 취소하는 등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졌다.
개표결과 고어가 미 전역에서 19만표 차로 부시를 따돌린 것으로 집계됐지만 그가 당선되지 못한 것은 각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538명 중 270명 이상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 대법원과 연방 대법원까지 동원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투표 35일만인 12월 12일 부시 후보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0년 국제 인터넷주소 관리기구
(ICANN) 최상위 도메인 7개 추가


▶2000년 유엔군사령부-북한, 경의선
철도와 군사분계선 내 도로에서
발생하는 군사문제는 남북 당사자가
처리하기로 합의

1998년 판문점 회담장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첫 장성급 대화 장면.



▶1998년 한국-홍콩,
    형사사법공조협정 체결
▶1994년 한국-베네수엘라,
    문화협정 체결



▶1994년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은퇴

사진은 1990년 윔블던 우승(35세),윔블던 여자단식 9회 우승포함 통산타이틀 단식 167회, 복식 177회

    

                


▶1992년 새한국당 창당
    (대표 이종찬 의원)
▶1989년 제1회 이중섭
    미술상에 화가 황용엽씨 선정
▶1983년 버마, 북한 아웅산테러범
    대역죄로 기소
▶1980년 이스라엘, 중국과
    비밀 군장비 판매협정 체결 발표



▶1980년 작곡가 이흥렬 사망

이흥렬(李興烈, 일본식 이름: 直木興烈,직목흥렬 1909 ~ 1980)은 한국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마음〉와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의 〈섬집 아기〉, 군가인 〈진짜 사나이〉 외 가곡 50여 곡과 동요 65곡, 합창곡 등을 다수 작곡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 인명부에도 이름이 올려졌다.]



▶1980년 중국 공산당, 공자 복권 발표

1980년 11월 17일 약 1백명의 중공학자들이 공자탄생지인 산동성곡부에서 문혁 이후 최초의 「공자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 과거 공자에 대한 모든 비판을 무효화시키고 그를 『위대한 철학가·정치사상가·도덕가·교육자』로, 그리고 그의 사상을 『중국의 문화적·정신적 보고(보고)』로 규정함으로써 공자를 완전 복권시켰다. 지난 문화혁명기간(1966~76) 중 비림비공운동의 표적이 되어 그 사상이 말살됐던 공자(BC551∼479)를 완전 복권시킴과 동시에 여타 종교자유를 신장시키면서 앞으로의 종교정책방향을 게시했다.



▶1979년 시인 주요한 사망
▶1978년 소련, 중성자탄 시험 성공 발표
▶1972년 페론 전(前) 아르헨티나
    대통령, 망명 17년 만에 환국
▶1971년 태국 타놈수상 친위 쿠데타
▶1971년 국제노동기구(ILO),
    자유중국 축출하고 중공 가입 가결


▶ 1970년  미국에서 컴퓨터 마우스 특허

특허번호 US3541541.

   1970년 11월 17일 미국 스탠퍼드연구소(SRI)는 더글러스 엥겔바트 연구원이 발명한 ‘디스플레이 시스템용 X-Y 위치 표시기’의 특허를 취득했다.   이 ‘표시기’의 첫 발명은 이보다 7년 앞서 1963년 이미 이루어졌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연구하던 엥겔바트 씨는 나무상자에 작은 바퀴 2개를 집어넣어 각각 위아래와 좌우방향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했다. 상자 윗면에는 소형버튼을 달아 모니터에 표시를 하거나 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엥겔바트 씨는 컴퓨터 이용자가 한 손에 이 기계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키보드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IBM이 ‘개인용 컴퓨터(PC)’를 출시했을 때가 18년 뒤인 1981년이니 그의 예지는 놀랍기만 하다.   엥겔바트 연구팀은 이 기계를 ‘버그(bug)’라고 불렀다가 훗날 본체와 기계를 연결하는 선이 꼬리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마우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마우스는 연구실에서 시제품으로 운명이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1984년 마우스를 보조 입력 장치로 사용한 애플사의 매킨토시 PC가 출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도스(DOS) 운영체제의 막을 내리고 1995년 ‘윈도95’ 시대를 열면서 마우스는 필수품이 됐다. 특히 1991년 월드와이드웹(www)의 탄생 이후 인터넷이 널리 사용되면서 마우스는 핵심 주변기기로 등극했다.
   그러나 정작 ‘마우스의 아버지’는 한 푼의 특허권 사용료도 받지 못했다.

   마우스 특허는 1987년 기간이 만료됐는데, PC와 마우스 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전인 데다 이후에 개발된 마우스들이 ‘오리지널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엥겔바트 씨는 한 인터뷰에서 “마우스 특허가 쓸모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특허를 얻은 몇 년 뒤 연구소가 애플사에 약 4만 달러를 받고 사용허가를 내줬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우스 발명 외에 한 번의 클릭으로 다른 정보로 이동하는 ‘하이퍼텍스트’ 기술을 개발했고, 인터넷의 전신인 미 국방부 산하 국가방위네트워크 ‘아르파넷(ARPANET)’의 구축도 주도했다.

   엥겔바트 씨는 1988년 딸과 함께 컨설팅 연구소 ‘부트스트랩’을 차렸다. 사무실은 마우스 제조업체로 잘 알려진 ‘로지텍’이 무상임대 형식으로 마련해 줬다.




▶1969년 전략무기제한협정
    (SALT Ⅰ) 협상 시작
▶1967년 UN총회, 통한(統韓)
    결의안 가결



▶1965년 UN총회, 중공가입안을 찬반동수(47:47)로 부결

UN총회는 17일 자유중국(대만)을 축출하고 중공(중국)을 UN에 가입시키자는 결의안을 47대47, 기권20이라는 동수로 부결했다. 중공은 이로써 1949년 정국 수립 이래 15번째로 UN 가입을 저지당했다. 중공가입안은 표결에서 3분의2 선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처음으로 자유중국 지지에 다수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음을 드러냄으로써 중공 지지 국가들에게는 정치·심리적으로 일대승리(一大勝利)를 기록하였다.



▶1955년 군 당국, 평화선 침범
    일본어선에 대한 발포방침 발표
▶1952년 UN총회,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 비난 결의안 채


▶1942년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생

1942년 11월 17일,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마틴 스콜세지의 초기작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란 점인데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소시민이며, 사실상 미국 사회에 잘 동화된 듯 하면서 겉도는 캐릭터이다. 그는 아카데미상과 인연이 없기로 유명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며,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작품인 <디파티드>로 작품상을 받았다. 연기에도 관심이 많아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부모를 카메오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순수의 시대>, <카지노>, <갱스 오브 뉴욕>, <에비에이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등을 연출했다.



▶1933년 미국, 소련연방 승인



▶1932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순국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선생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우당을 비롯해 일곱 형제 중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17년 조각가 로댕 사망

로댕 [Rodin, Auguste, 1840.11.12~1917.11.17]

   현대 서양 조각의 문을 연 오귀스트 르네 로댕.
   근대 조각은 그를 만나 비로소 전통적 형식주의의 옷을 벗었고 20세기의 새로운 조형언어를 부여받았다. 그는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현대 미술사에서 오직 피카소만이 그의 명성과 거장의 면모에 필적할 뿐이다.

   화가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며 “신(神)이여! 왜 나는 당신처럼 될 수 없는가”라고 절규했지만 로댕은 스스로를 ‘신의 손’이라고 칭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신을 자처한 천재적 예술가의 오만(傲慢)과 에고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리 로즈 뵈레와 카미유 클로델.

   50여년간 내연의 처였으며 한시도 로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외도까지를 인내했던 뵈레. 그녀는 로댕의 무명시절 작업실로 개조한 마구간에서 함께 지내며 삯바느질로 그를 봉양했다. 로댕은 그녀에 대해 “나를 향해 동물적인 충성심을 지닌 여자”라고 말하곤 했다.

   44세의 로댕이 만난 클로델은 갓 스물을 넘기고 있었다. 로댕은 깊고 푸른 눈의 그녀에게 한순간에 빠져든다.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조각가와 모델로, 그리고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나 그들이 함께 한 10년은 벼린 칼날처럼 애증(愛憎)으로 점철된다.
  
   그녀의 자전적 작품 ‘성숙한 시대’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비극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나체로 무릎을 꿇은 채 로댕에게 애원하고 있고 그는 뵈레의 팔에 안겨 끌려가고 있다. 클로델은 로댕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였다.

   이후 그녀는 로댕이 영광의 정점을 향해 비상하는 동안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결국 정신착란으로 병원에서 생을 마치게 되는 클로델.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로댕을 저주했다.

   “나는 그에게 영감을 제공해야 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나는 양육(養育)되었다. 그것은 한 여성에 대한 철저한 착취였다. 나는 예술가로서 재능을 도둑맞았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1905년 11월 29일, 을사조약 후 서울거리를 활보하는
이토 히로부미(뒷자리 왼쪽에 앉은 이)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그 오른쪽)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목적이었다. 11월 17일 일본공사 하야시도 한국 정부의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승인을 종용했다. 남산에는 대포가 설치돼 서울을 겨누고 있었고, 궁 밖은 무장한 일본병이 포위하고 있어 공포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자 이토는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들어와 대신들 각각에 찬부를 물었다. 한규설·민영기·이하영이 반대하고, 이완용·박제순·이근택·이지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 5적’이 찬성으로 기울자 이토는 다수결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하야시로 하여금 ‘한·일협상조약’에 날인케 했다. 그러나 조약은 최고통수권자인 고종의 날인이 없어 국제법상 무효였다.

            1993년 신문기사



▶1902년 의학교장 지석영, 황성신문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



▶1887년 2차대전의 영웅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출생

몽고메리(1887 ~ 1976) 장군은 1910∼1914년에는 인도 근무,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일랜드, 팔레스타인에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940년 6월 당케르크 철수 후에는 1942년에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아프리카 작전을 맡아 롬멜 휘하의 독일군을 엘 알라멩에서 격파, 전국(戰局)에 승기를 마련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영국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 원수가 되었다. 1946년에 백작이 되어 가터 훈장을 받았다.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루이 14세도 토목기술상의 문제로 단념하고, 나폴레옹도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를 10m로 너무 높게 측정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가 이토록 수에즈 운하에 집착한 이유는 막강 해운대국으로 대서양에서 누리는 영국의 절대적 우위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1854년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다시 운하 뚫기를 시도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돼 150만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이집트 노동자 12만5000명의 목숨이 희생된 끝에 1869년 11월 17일 개통됐다.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이 마침내 무너진 것이다.

수에즈운하 개통 전(왼쪽)과 개통 후(오른쪽) 항로 변화




▶1717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르롱 달랑베르 출생



▶1558년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메리1세 사망

메리 1세(Mary I, 1516 ~ 1558)는 영국 튜더 왕조의 왕(재위 1553~1558)이자 열렬한 가톨릭 구교도로서, 에스파냐의 펠리프 2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구교 부활에 주력하였다.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본명은 메리 튜더(Mary Tudor)이다. 재위기간 동안 로마 가톨릭 복고정책으로 개신교와 성공회를 탄압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448년 세종대왕, 동국정운 반포

동국정운은 조선 전기 세종(世宗) 때 엮은 음운서(音韻書)로서 활자본으로 6권 6책이다. 국보 제71호(간송문고본, 권1·6)와 국보 제142호(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가 있다. 왕명으로 집현전 학사 신숙주·최항·성삼문·박팽년·이개·강희안·이현로·조변안·김증 등 9명이 편찬에 착수하여 1447년(세종 29) 완성, 이듬해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산실되었으나,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그리고, 1972년 강원도 강릉에서 6권 6책의 전질이 발견되었다. 글자마다 국어음을 먼저 표기한 다음 그 밑에 한자를 달았는데, 엄선한 이 23자모는 그대로 훈민정음의 초성체계와 일치한다. 조선 초기의 한자음과 훈민정음 연구에 절대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888년 신라,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사망



https://youtu.be/AadeMYASJx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행디의 행복 불러그 ,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