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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20일

✿2000년 11월 20일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개통

영종대교.인천 국제공항의 명물,
영종대교가 2000년 11월 20일 개통했다.

영종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하는 총 연장
4천4백20m, 주탑 높이 107m, 교각수 49개의 2층 다리인 영종대교는, 위층은 6차선 도로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복선 철도가 지나는 세계 최대의
통행능력을 자랑한다.

케이블이 다리의 하중을 지탱하는 현수
교 방식으로 건설된 영종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최초로 2000m 이상의 현수
교에 3차원 형상의 케이블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3차원 케이블이란 기존 현수교가 다리 상판 좌우에서 서로 평행한 2개의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과는 달리 평행하던 케이블이 주탑 꼭대기에서는 거의 붙었다가 다시
상판쪽에서는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상판을 지탱하는 별도의 구조물이 없는 만큼 주 케이블에는 지름 5.1㎜의 케이블 6,720가닥이 들어갔고, 케이블과 상판을 지탱하는 180개의 로프는 압력과 각도를 각각 달리 했다.

30m 바닷속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주탑의 기초작업을 위해 국내처음으로 ‘뉴메틱케이슨’이라는 무인굴착방식을 동원했다.

진도 6의 지진과 초속 65m의 강풍에도 100년 이상 견디도록 설계된 영종대교는 주위의 바다경관과 어울리는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다리모양을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와지붕의 처마곡선을 본떠 만들었으며 주탑의 모양을 마름모꼴로 하여 전체적인 외관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영종대교의 또 다른 절경은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변하는 야경이다.


주탑주변과 현수교 구간에 설치된 322개의 색채조명등을 통해 봄에는 녹색, 여름에는 흰색, 가을에는 노란색, 겨울에는 붉은색으로 매일 일몰 직후부터 다음날 일출 직전까지 밤바다를 밝혀준다.




▶2011년 나리타 前 한일축제
한마당 실행위원장 별세
▶2009년 사이판,
관광지에서 총기난사 사건 발생
▶2008년 4조(兆)…
사상 최대 '다단계 사기' 적발
▶2002년 북한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
▶2001년 덴마크 총선,
70여년 만에 우파승리
▶199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북정책 집중 논의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대중 대통령

▶1997년 북한 일본인 처 고향방문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오랫동안 남산의 경관을 가리던 외인아파트가 1994년 11월 20일 폭파공법으로 철거되고 있다


서울시가 1994년 11월 20일 오후 3시 남산의 남쪽 허리를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를 15억원을 들여 폭파해체했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A동이 좌우 양측에서부터 중앙부로,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15초 만에 연달아 무너졌고, 이어 3분쯤후 옆에 있는 B동도 똑같은 과정으로 쓰러지면서 1972년 건축돼 22년동안 남산을 가로막고 있던 외인아파트는 과거의 기억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얏트호텔 주변 등 한남동 일대에 몰려나와 해체과정을 지켜본 수만명의 시민들은 아파트가 예고된 대로 좌우끝에서부터 무너지는 순간, 환호와 함께 탄성을 터뜨리며 모처럼만에 시원함과 뿌듯함을 만끽했다.
남산외인아파트는 국내에서 처음 건축된 고층아파트로, 오늘날의 아파트문화를 선도했으며, 특히 기초공사부터 완공때까지 철저한 감독으로 완벽에 가까울만큼 튼튼하게 지어졌었다. 국민소득이 1백70달러, 연간수출액도 5억달러에 불과했을 때, 우리나라는 수출이 국가적 과제였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바이어 등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정작 이들이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아 남산외인 아파트를 짓게 된 것이었다.



▶1994년 앙골라 19년 간의 내전 종식

앙골라 정부와 반군인 UNITA(앙골라 완전독립민족동맹)가 1994년 11월 20일 19년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년 전인 1974년 시작된 앙골라 내전은 미국이 우익 반군인 UNITA를 지지하고 옛 소련이 당시의 앙골라 좌익정부를 지지함으로써 냉전의 대리전이 됐으며 1991년 유엔 주선으로 평화협정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UNITA가 1992년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에서 패배·인정을 거부함으로써 내전이 재연됐다.



▶1992년 태평양
해저케이블(TPC4) 개통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무역협정
- 투자보장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1년 우편물 차량배달제 시행



▶1991년 마케도니아 독립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남동부 유럽 발칸 반도 한가운데에 있는 내륙국이다. 수도는 스코페이며, 국토 내에는 50개가 넘는 호수가 있으며, 2,000m가 넘는 산도 16곳이 있다. 오늘날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영토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남단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국경 변경 없이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했다.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 공화국 뿐 아니라 그리스, 불가리아에 걸친 역사상의 지방을 이르는 이름으로, 그리스에도 마케도니아로 명명한 행정 구역이 있다. 1993년 유엔에 가입했으나 나라 이름을 "마케도니아"로 쓰는 데 그리스가 반대하여 구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잠정 명칭을 받아들였다.



▶1985년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
현대를 바꾼 'Windows'를 내놓다.

현대인들이 1970년대에 업무를 수행할 때 타자기를 사용했다. 문서를 복사해야 하는 경우에는 등사판이나 카본지를 주로 사용했다.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 두 명의 열정적인 컴퓨터광 Bill Gates와 Paul Allen은 개인용 컴퓨터가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1975년 게이츠Gates와 알렌Allen은 Microsoft라는 '파트너관계'를 형성한다. 대부분의 신생기업과 마찬가지로 Microsoft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모든 사무실과 모든 가정에서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비전만은 대단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Microsoft는 업무 수행 방식을 바꾸어가기 시작한다.

1980년 6월 게이츠Gates의 Harvard 동기생인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를 채용하고, IBM이 "Chess"라는 프로젝트 코드로 Microsoft와 협업을 하게 되면서 Microsoft는 워드 프로세서와 같이 컴퓨터 하드웨어를 관리 또는 실행하고 컴퓨터 하드웨어 및 프로그램 간 격차를 해소해 주는 소프트웨어인 새 운영 체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니 그 운영체제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인 "MS-DOS"였다.  

그리고, 1981년 MS-DOS를 실행하는 IBM PC가 출시되면서 일반 대중들은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된다. “C:” 및 다양한 암호 명령을 입력하는 것이 점점 일상 업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MS-DOS는 효과적이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웠다. 운영 체제 구축을 위한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Microsoft는 새 운영 체제의 첫 번째 버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고,  새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상자 또는 컴퓨팅 "창"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Windows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Windows는 1983년에 발표되었지만, 개발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게 된다. 게이츠 역시도 1983년의 윈도우는 상용화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서 이때 만든 윈도우를 1.01버전이라고 칭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85년 11월 20일 Microsoft는 Windows 1.0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MS‑DOS 명령을 입력하는 대신 화면 또는 "창"에서 마우스만 이동하여 원하는 작업을 가리키고 클릭하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즉, 컴퓨팅 언어를 굳이 배워서 사용하지 않아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1983년 미 ABC-TV,
핵공포 가상영화 `그날 이후` 방영
▶1982년 박상은 살해용의자 정재파,
대법원서 무죄선고
▶1980년 정부, 공직자 재산등록제 및
사기앙양 종합대책 발표



▶1975년 프랑코 스페인 총통 사망

☞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은 알카사르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스페인령 모로코의 리프족 민족운동 진압을 위해 활약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을 일으켜 사상최악의 피의 살육전 끝에 얻어낸 내전의 승리로 1939년 8월에 총통으로 취임한 프랑코는 그 후 40년 가까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프랑코 사망 이틀 뒤인 11월 22일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함으로 스페인은 44년 만에 왕정이 부활됐고 서서히 민주적 체제로 변해갔다




▶1975년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천팔백여 점포 전소
▶1970년 유엔총회, 중국대표권 문제
중요사항으로 채택


▶1969년 펠레 909경기 만에 1,000골 달성

축구황제 펠레(Pele, 당시 29세)가 909경기 만인 1969년 11월 20일 마침내 1,000골을 달성했다. 이날 경기는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의 산토스와 아르헨티나의 바스코다가마의 경기로 후반전 22분 펠레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909경기 1,000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빈더와 브라질의 아르투르 프리댄라이히에 이어 역사상 세번째 1000골 보유자가 되었다. 펠레의 통산 1000골 기록달성을 축하하며 기록달성 다음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정당국은 우표2백만장을 발행했으며, 브라질 정부는 이 날을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축구황제 펠레(Pele, 본명: Edison Arantes do Nascimento 당시 29세)가 브라질 북쪽 살바도르에서 열린 경기서 909경기 만인 1969년 11월 20일 마침내 1,000골을 달성했다. 며칠 전 말라카낭 경기장에서는 1,000골을 기대했던 17만명이 경기를 구경했으나 펠레는 무득점에 그쳐 팬들의 기대를 저버린 바 있다. 말라카낭 경기장에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외신기자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모여든 기자들이 무려 1,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날 경기는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의 산토스와 아르헨티나의 바스코다가마의 경기로 바스코다가마의 골키퍼 로베르토 아드라다는 전반전에 펠레의 슛 5개를 잘 막았으나, 후반전 22분 펠레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909경기 1,000골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당시까지 1,000골이상 보유자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빈더(Franz Binder)와 브라질의 아르투르 프리댄라이히(Art(h)ur Friedenreich)로 펠레는 역사상 세번째 1000골 보유자가 되었다. 펠레의 통산 1000골 기록달성을 축하하며 기록달성 다음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우정당국은 우표2백만장을 발행했으며, 브라질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펠레는 은퇴할 때까지 선수시절을 통해 총1,364게임에 출전해 무려 1,281골을 성공시켰다(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2011년 1월 20일 발표기준 통산 560경기 618골). 1974년 은퇴후 미국에 축구 붐을 일으키겠다고 코스모스에 입단,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1981년 재은퇴한 펠레였다. 1998년 초 카르도스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투가 거북하다고 체육부 장관직을 던져버리고 축구해설가로 마이크를 잡은 펠레, 그는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1967년 여야전권회담 성공,
합의의정서 발표
▶1966년 충남선
(논산-부여 간 24km) 기공
▶1963년 유엔총회,
인종차별철폐 선언을 채택
▶1962년 미국 케네디
. 쿠바 해상봉쇄 해제 선언
▶1961년 케네디-
아데나워 서독수상 회담
▶1959년 서구7개국
자유무역연합(EFTA) 결성 가조인
▶1958년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발족
▶1954년 미 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2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 사망



▶1948년 국가보안법 통과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이 연합한 결과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됐다. '한국현대사산책'의 저자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어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됐다"고 말한다.

  탄생하자마자 국보법은 괴력은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 통계에 따르면, 이듬해 4월까지 국보법으로 체포된 사람이 8만9천700여 명에 이르렀다. 1949년 한 해엔 11만여 명이 붙잡혔다. 체포자로는 남로당에 연루된 박정희 소령도 포함돼 있었다.

  국보법 태동의 계기는 여순사건이다. 1948년 10월 15일 발생한 여순사건은 10여 일 만인 10월 26일 완전히 진압됐다. 이승만 정부는 이후 대대적 검거 선풍을 일으키며 좌익 척결과 정권 강화의 호기로 삼았다. 그런 가운데 애먼 희생자도 속출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구였다.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한다. 이에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여순사건은 군에도 큰 회오리를 몰고왔다. 빨갱이를 솎아내 처단한다는 이른바 숙군(肅軍)작업이었다.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숙군 대상이 된 군인은 4천700여 명으로, 전체 군의 약 5%에 달했다. 이 가운데 총살형을 당한 군인은 2천여 명에 이른다. 11월 11일 체포됐던 박정희 소령은 구명운동으로 기사회생해 후일 대통령이 된다.


▶1947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결혼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
▶1942년 일본, 조선징병제도
실험요강 결정
▶1922년 연합국-터키 간의
제1차 로잔회의 개최
▶1918년 미주교포단체, 미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요망진정서 제출



▶1910년 톨스토이 사망


☞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1828 ~ 1910)는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1952년 처녀작 ‘유년시대’를 익명으로 발표해 격찬 받았으며, 1962년에는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 4,000여명의 미국이주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899년에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부활’이다.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82세로 사망했다. 구소련에서 1958년 완간된 톨스토이 저작전집은 모두 90권. <전쟁과 평화>나 <부활>을 ‘오늘의 책’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저작이다. 1884년 ‘1년 365일을 위한 세계 모든 민족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빛나는 지혜’를 한 권의 책에 담을 구상을 한 그는 사망하던 해에도 이 책의 개정3판을 내는 등 만년의 열정을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쏟았다.

   매일 일기 쓰듯 한 가지 주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을 적고, 노자 부처 파스칼 칸트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성서에서 당대 무명 저널리스트의 글까지 인용한 다음,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한 형식이다. 톨스토이가 고른 인류의 지혜라 할 만한데, 솔제니친은 “세상에서 단 한 권의 책만 가지라 하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월 1일, 톨스토이는 무엇을 주제로 인생론을 시작했을까? ‘책’이다. “그리 중요치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고 쓴 그는 책에 대한 에머슨, 로크, 세네카, 소로의 글을 소개한 뒤 쇼펜하우어를 마지막으로 인용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자가 언제나 가장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는 법이다. 악서는 아무리 적게 읽어도 지나치지 않고, 양서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과하다고 할 수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톨스토이는 ‘시간’을 묵상했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접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 그 시간이 없는 한 점에서, 인간의 진정한 생활이 영위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신력을 그 현재에 집중시켜야 한다.”



▶1905년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3일이 지난 1905년 11월 20일. 위암 장지연(張志淵)이 쓴 을사조약을 통렬히 비판하는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이 날짜 황성신문에 실렸다. 황성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5적’을 개ㆍ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힐책한 논설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평소 발행부수 3000부보다 훨씬 더 많은 1만부를 발행했다. 이날 새벽, 일본 경찰이 한양골 신문사를 급습해 위암은 체포되고 신문은 무기한 정간을 당했다.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했다는 것이 위암에게 씌어진 죄목이었다.

본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으로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 사설란에 실린 장지연의 논설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1월 17일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대신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황성신문》의 사장이자 주필로 있던 장지연은 이 글에서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로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조약의 불성립함”이라며 고종(高宗)이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 돼지와 개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익만을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두려움에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다며 조정 대신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특히 “저들 돼지와 개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각 대신들이야 족히 깊이 꾸짖을 것이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參政大臣)이란 자는 정부의 으뜸 벼슬임에도 단지 부(否)자로 책임을 면하여 명예를 구할 기회를 꾀하였던가”라며 박제순(朴齊純) 등 조약 체결에 찬동해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린 다섯 대신뿐 아니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등 조약에 반대한 대신들도 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고 함께 비판했다. 그러나 조약 체결을 압박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대해서는 “후작은 평소 동양 3국의 정족안녕(鼎足安寧)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이라 …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 3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내는데, 이토[伊藤] 후작의 처음의 주의(主意)는 어디에 있는고”라며 완곡한 비판의 뜻을 표하는 데 그쳤다.

당일자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과 함께 ‘오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3,000부를 찍던 발행부수를 1만부로 늘려 조약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려 했다. 그러나 일제는 오전 5시 신문사를 급습해 미처 배포되지 않고 남아 있던 신문들을 몰수하고 장지연을 비롯해 직원 10여명을 경무청으로 압송해 구금한 후 《황성신문》에 무기한 정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1월 21일 “‘시일야방성대곡’이야말로 모든 대한제국 신민의 통곡”이라며 그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해서 1면에는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고, 2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옮겨 실었다. 장지연은 구속되어 태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인 1906년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황성신문》에 대한 정간 명령도 1906년 2월에 해제되어 《황성신문》은 2월 28일(음력 2월 7일)부터 복간되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조약 후 남산연회 개최 광경
한일협약 후 이토 히로부미가 개최한 남산 연회의 모습. 1905년 11월 25일.

을사오적'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5조약·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의 묵인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총력을 집중하였다.

먼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설이 유포되어 한국의 조야가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1905년 10월 포츠머스회담의 일본대표이며 외무대신인 고무라[小村壽太郎],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郎] 등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하였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되었다.

이 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를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을사조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 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국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을사5적을 규탄하며 조약 반대투쟁에 나섰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1897년 독립문 준공

1897년 11월 20일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협회가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협회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80m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독립문이다.

독립협회는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영은문(왼쪽)의 석조기둥을 제외한 나머지를 헐어버리고 바로 그 뒤에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 Old Chinese Embassy Arch

   독립문을 세우기 전까지 이곳에 서 있었던 영은문(迎恩門)은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 모화관은 1407년(태종 7년)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개칭하였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1537년(중종 32년)에 김안로 등 3정승이 권하여 모화관의 홍살문을 개축하여 청기와를 입히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액자를 걸었습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칙사가 올 때에는 조(詔)·칙(勅)과 상사(賞賜)를 가지고 오는데 영조문이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영은문(迎恩門)이라 써서 걸도록 하여 이에 따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인 1606년(선조 39년)에 영은문을 재건한 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와서 액자를 다시 써서 걸었는데, 그 액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에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이때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대신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독립문이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중국이 더는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점이 컸습니다. 물론 청나라의 영향력이 사라진 곳을 일본이 차지하였지요. 독립문을 세우고 조선이 자주독립국으로 홀로 서보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운명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런 독립문의 역사에서 배우게 되는 것은 자유나 독립은 남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얻을 때에만이 진정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894년 러시아의 작곡가 루빈스타인 사망

러시아의 세계적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루빈스타인(1829 ~ 1894)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워 피아노의 신동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유럽에서 리스트와 더불어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하였다. 1862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조직적인 음악교육기관인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설립, 그 원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차이코프스키가 첫 제자의 한 사람으로 배출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오페라 《악마》 《네로》 외에, 6곡의 교향곡, 5곡의 피아노협주곡과 실내악곡, 피아노독주곡 《천사의 꿈》 《f조의 선율》 《페테르부르크의 야회》, 가곡 《그대는 꽃과 같이》 《페르시아의 노래》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89년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출생

☞ 에드윈 파월 허블(1889 ~ 1953)은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그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는 1921년 경 세페이드 변광성을 이용하여 우주의 크기를 재었다. 이 발견은 후에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의 대논쟁을 종결하는 데 근거로 쓰였다. 또한, 그는 1929년 경 은하를 관측하여 스펙트럼의 선에 나타나는 적색 편이를 시선 속도라고 해석하고, 후퇴하는 속도가 은하 간 거리에 비례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여 이후 대폭발 이론의 기초가 된다. 허블 우주 망원경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1878년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제2차 아프간전쟁 시작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대영제국과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이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벌인 전쟁으로, 이 전쟁은 영국령 인도 제국이 두번째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이었다. 1878년 당시 세계 상황은 러시아 제국이 적극적으로 남하 정책을 펼쳐서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을 정복하여 인도와 중국 일대를 위협하는 형세가 되어 있었고, 미국 또한 내전을 끝내고 주변 태평양 일대로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 독일 제국 등과 동맹을 맺고 영국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을 선점하고자 했고, 1차 전쟁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2차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패배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은 자치권을 확보했지만 영국령 인도 제국의 한 주로 전락하게 된다.



▶1873년프랑스군, 하노이 점령
▶1815년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
러시아가 4국동맹 맺음
▶1737년영국 왕비 캐롤라인 사망
▶1602년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출생

https://youtu.be/CCPX-Ip1jEo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행디의행복블러그 ,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