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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25일

✿2002년 11월 25일

북한, 금강산 관광특구 첫 지정 - 숙박·
오락시설 투자 허용 김윤규 현대아산 사
장이 25일 북한의 금강산 관광특구 지정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금강산 개발 계획을 설명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달 23일 현재 현대아산에 의해 관광이 진행 중인 금강산 지역과 통천군 일부 지역을 포함시켜 금강산 관광지
구로 지정한 데 이어 이달 13일 이 지구에서 남한과 해외동포,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관광과 여행·숙박·오락·편의시설업 투자 허용을 골자로 한 금강산관광지구법을 채택했다고 북한 중앙방송이 25일 보도했다.

북한 내 관광특구가 지정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을 통해 이루어진 이번 조치로 인해 지난 98년 11월 시작된 금강산 관광사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금강산관광지구에는 강원도 고성읍 온정리, 성북리 일부 지역과 삼일포, 해금강 지역, 통천군 일부 지역이 포함되며, 이곳에서는 북한 주권이 행사되지만 관광지구 개발을 위한 법인, 개인과 기타 경제조직들의 자유로운 투자가 허용되고 재산이 법적으로 보호받도록 했다.

관광지구법은 북한의 중앙관광지구 지도기관으로부터 관광지구 개발을 승인받은 개발업자의 개발과 영업활동에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했으며, 개발업자가 북측 중앙관광지구 지도기관과 함께 관광지구 관리를 책임진 관광지구 관리기관 구성원을 추천할 권한을 갖도록 해 남한 사람도 이 기관의 구성원이 될 수 있게 했다.



▶ 2009년 필리핀, 선거테러 발생
▶2009년 한국,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
▶2009년 헌법재판소,
혼인빙자간음죄 위헌 판결


▶ 2007년 오늘,
워싱턴포스트 '세기의 3대 거짓말 꾼'으로히틀러,닉슨,클린턴 선정!


<히틀러, 닉슨, 클린턴(위부터)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25일 엄청난 결과를 부른 희대의 거짓말들을 소개했다.>

WP는 ‘거짓말에 대한 진실’이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인류 역사를 바꾼 최고의 거짓말로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이 1938년 당시 임박한 전쟁을 막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영국의 네빌 챔버레인 총리에게 “체코슬로바키아가 국경을 새로 정하는 것에 대해 협상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꼽았다. 당시 챔버레인 총리는 이에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를 영국 의회에 보고했지만 히틀러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WP는 또 ‘잘못된 큰 거짓말’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꼽았다.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미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대한 도청·무단침입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우겼지만 거짓말로 밝혀져 낙마했다. 세번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당시 백악관 인턴사원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 때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하면서 “나는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꼽혔다. 클린턴의 거짓말이 부른 결과는 작았고 그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WP는 또 자사의 재닛 쿡, 뉴욕타임스의 제이슨 블레어 등 기사를 쓰려고 가공의 이야기를 지어낸 언론인을 희대의 거짓말쟁이로 꼽았다.




▶ 2007년 오늘, 의학자 현봉학(玄鳳學)미국 뉴저지주에서 사망.
( 1922년 6월 23일 함경북도 성진군 욱정 에서 출생~ )
의사이자 교수이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9만 8천여명을 살려내 한국의 쉰들러 로 불린 다/저서《중공의 한인들》(1984)
《나에게 은퇴는 없다》(역사비평사간, 1996년)
《한국의쉰들러, 현봉학과흥남대탈출》(1999)




▶2004년 배용준 일본 방문으로 나리타공항 마비
2004년 11월 25일 오후 영화배우 배용준씨가 일본 나리타 공항에 입국해 마중나온 팬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 단일후보로
확정

단일후보로 선출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오른쪽)가
2002년 11월 25일 국회귀빈식당에서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를 만나 회동하고 있다.



▶2002년 애니카 소렌스탐, 미 LPGA
투어 사상 한 시즌 11승 대기록 수립




▶2002년 미국 `국내안보부 신설` 법안에 부시 대통령 서명


▶2001년 미국 ACT사, 인간배아 첫 복제했다고 공식인정

인간복제` 시험 과정 중 핵이 제거된 난자 속에 체세포의 핵을 넣은 뒤 4세포기까지 세포분열된 상태



▶1996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국내영주를 위해 귀국


▶1991년 국산 `창공91호` 시험비행 성공


▶1990년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직선 대통령 선거 실시
▶1988년 한국-폴란드
무역사무소개설협정 체결
▶1984년 윌리엄 시로더(52),
사상 두번째 인공심장 이식수술
▶1982년 일본 나카소네
제11대 자민당 총재에 취임
▶1982년 제일제당 식품연구소,
항암제 인터페론 생산 성공
▶1981년 86아시안게임 서울을 개최지로
결정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 뉴델리)
▶1980년 경남일보 종간(1909.10.15창간)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신아일보 등 폐간

1980년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사진)가 임시총회를 열고 언론통폐합을 결의했다.



▶1975년 수리남,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974년 우 탄트 전유엔사무총장 사망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법 공포
▶1970년 미시마 유키오 할복자살



▶ 1969년 오늘,
영국가수 존 레논(John Lennon) 영국이 비아프라(Biafra)에 개입하는 것과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지원한 것에 항의하는 뜻에서 영국왕실훈장(MBE :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반납함.
<1940년 10월 9일 영국 리버풀에서 출생~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 주 뉴욕 더 다코타에서 사망.




▶1966년 제1회 아시아 가네포 개막
▶1965년 콩고에 군부쿠데타.
모부투장군 집권
▶1964년 월남 사이공서 대규모
학생데모 폭동화. 계엄선포
▶1961년 소련-알바니아 국교 단절
▶1959년 강원도 명주군 일가족
몰살사건 발생
▶1956년 미국 샌디애고
근교에 산불. 4만에이커 소실
▶1950년 중공군-북한군 반격개시


▶ 1948년 오늘,
국회 반민특위,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을 제정.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친일 행위를 한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마련한 법이었으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5ㆍ10 총선거를 통해 출범한 제헌 국회는 우리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1948년 9월 22일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ㆍ공포하였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 제101조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하여 반민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 주요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ㆍ일 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 이상을 몰수한다. 제2조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또는 일본제국 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 이상을 몰수한다.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ㆍ박해한 자나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몰수한다......."

즉, 이 법의 핵심 내용은 일제 강점기 때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공민권을 제한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 법의 집행을 위해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 등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고, 친일혐의를 받았던 주요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조사가 이루어졌다. 반민특위는 반민족 행위자 제1호로 화신 재벌의 총수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한 화신산업 사장 박흥식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내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ㆍ고문한 악질 경찰 노덕술과 김태석ㆍ이종형,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 행세를 하며 밀정 노릇을 한 배정자, 친일행위를 한 최남선과 이광수, 문명기, 이성근 등을 구속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조금씩 불만을 표시하던 중 국회프락치사건(1949),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1950년 6월로 규정된 반민법의 시효 기간을 단축시키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반공 정책을 우선시한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되고 말았다.





▶1947년 동 .서독 교역협정.
동서독은 분단에도 불구하고 상호 적대감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져 왔고 특히 1973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양적, 질적 측면에서 교류가 대폭 발전했다.


이렇게 양독 간에 교류·협력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것은 우선 1970년대 초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가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의 완화, 민족의 동질성 유지 및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동독과의 관계개선과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동독 측은 당초에는 서독과의 교류·협력이 체제부담 요인이 된다는 점을 감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독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한 소련이 동독에게 서독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하게 종용하는 데다 동독에 주둔 중인 56만여 명의 소련군이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고 서독과의 공식적인 관계발전이 국제법상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승인확보와 경제적 실리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 서독 측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응했기 때문에 양독관계가 대폭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류에 임하는 양측의 입장차이가 많아 장애요인이 되었다. 서독 측은 분단의 고통 완화와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목적을 두었던 반면, 동독은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국제법상의 승인 확보와 실리추구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교류방법에 있어서도 서독 측은 정부의 직접 개입을 줄이고 민간단체나 개인 차원의 교류가 활성화되기를 원했으나 동독은 각종 교류를 정부통제 하에 두고 정부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이렇게 양측 간의 입장이 달라 일부 교류가 제약을 받기는 했으나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은 상호관계의 개선, 분단에 따른 고통완화,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정치관계의 발전

1949년 동서독이 각각 독립적 주권국가로 출발한 이후 보수정당인 기민당(CDU) 집권 시 서독정부는 동독이 자유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부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서독의 ‘유일대표권’을 주장하면서 동독에 대해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상호 간에 긴장과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9년 9월 집권한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1970년 2차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 되었으며 정치관계도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부터 1989년 동독혁명 직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네 차례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정당교류와 군사·안보 분야로도 교류가 확대되었다. 1970년 4월 우편협력에 합의한 이후 양측은 분단기간 중 총 16개의 협정 및 합의를 체결하여 상호관계를 제도화해 나갔다.

경제 교류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취급하도록 합의했기 때문에 분단 후에도 동서독 간의 경제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으며, 경제교류는 동서독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왔다. 양측 간의 경제교류 규모는 연평균 2219억 마르크(약 75억 달러)에 달했으며, 동독은 공식거래 수지와 서독 측의 비공식 지원을 합쳐 연평균 52억 마르크(23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서독 입장에서는 동독과의 경제교류가 갖는 경제적 의미는 보잘것 없었으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동서독 관계의 연결고리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동독의 입장에서는 서독과의 교류가 동독 국민총생산(GNP)의 3%,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체제유지에 부담요인이 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상세사항은 별도 항목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우편·통신 교류

우편·통신 분야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지 간에 협정이 없었지만 1948년 베를린 봉쇄 시 잠깐 영향을 받았던 것 외에는 계속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그러나 동독의 제한조치로 우편·통신 교류가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으며, 통신회선도 1949년부터 1969년까지는 34개의 전화회선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6년 3월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연간 서신 2억 통, 소포 3600만 건이 교환되었고 1529개의 전화회선이 유지되어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다.

방송·언론 교류

방송·언론 교류는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 시작되었다. 동독정부는 1973년부터 서독 특파원의 상주와 단기 취재여행을 허가, 1976년에는 680명의 서독 언론인이 동독 취재여행 허가를 받았고 1988년의 경우 서독인 19명과 동독인 6명이 상대지역에 교환 상주했다.

1986년 5월 동서독 간에 문화협정이 체결된 후 다음 해인 1987년 5월 ‘방송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어 방송 프로그램 및 자료의 교환, 프로그램 공동제작 등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로 관심분야가 다른 데다 민감한 문제가 많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학술·과학·기술 분야 교류

1949년 분단 이후에도 ‘괴테사전’ 편찬 등 학술·문화 분야에서 교류가 지속되었으나 동독 정부의 통제로 간헐적 접촉에 그쳤으며, 1973년 시작된 회담이 결실을 맺어 1986년 5월과 1987년 9월 각각 문화협정과 과학기술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상호교류가 대폭 활성화되었다.

학술분야 교류는 학술회의 참석, 연구여행, 학자·교수·학생·자료의 교환, 공동연구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각종 비용은 서독 내독성, 공공재단인 독일학술교류재단(DAAD) 및 독일연구공동재단(DFC), 민간재단인 폴크스바겐 재단, 쾨어버 재단(Köerber Stiftung) 등이 부담했다. 1988년의 경우 약 400명의 동독방문 서독학자들과 250명의 서독방문 동독학자들이 혜택을 받았다.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는 과학기술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27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가운데는 석탄분석, 원자로 안전, 핵물리학, 산업심리학, 생명공학, 폐수처리, 전염병, 유적보존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류방법은 학술분야 교류와 비슷했다. 문화 및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가 1986년 이후 본격화된 것은 동독이 서독문화의 유입을 경계했기 때문이며 특히 1986년 7월 22일 서독과 소련 간의 과학기술협정 체결이 교류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서독 측은 동독과의 과학기술 교류 시 서방의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ordinating Committee for Multilateral Export Controls : COCOM) 규정을 위반하지 않고, 교류내용이 ‘상호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환경 및 보건 분야 교류

환경분야는 가장 협력을 필요로 했던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서독은 지형상 동독의 환경오염 영향을 직접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고 동독은 관심, 기술, 재원의 부족으로 독자적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동·서독 간의 기본조약 체결 이전의 환경분야 협상은 다국적 기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 베를린의 하수 문제, 스프레 강과 하베 강의 오염 방지 문제, 동독-서베를린 간의 쓰레기 처리계약 등 개별 환경문제에 대한 협상이 타결되었으며, 1987년 9월 환경협정 체결을 계기로 본격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 특히 서독 측은 하천보호와 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동독 측에 기술과 예산을 지원했으며 동독과 서베를린은 1974년 20년 기한의 쓰레기처리 협정을 체결하여 매년 3300만 마르크(약 200억 원)를 동독에 지불했다.

보건 분야에서는 기본조약 체결 이전에도 양측 간에 국제보건기구(WHO)를 통한 정보교환과 상호 간의 의약품 거래가 있었으나 1974년 4월 보건협정 체결, 1979년 12월 수의학 분야 협정체결 등을 계기로 교류가 대폭 확대되었다. 양측은 전염병, 중독성 약품 오·남용 및 장애인 재활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동서독 주민의 상대지역 방문시 의료지원도 가능해졌으나 의약품 오·남용 방지를 위해 서독 약품의 동독반입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문화 교류

기본조약 체결 후 1973년 11월부터 문화협정 체결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3년이 지난 1986년 5월에야 문화협정이 체결되어 문화분야 교류는 타 분야에 비해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경제교류나 인도적 교류와는 달리 문화교류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서독 측은 민족의 동질성 유지를 위해 민족문화 차원에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나 동독 측은 서독의 문화침투를 경계하면서 ‘공동의 민족문화’를 거부하고 ‘사회주의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려 했기 때문에 양측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화협정 체결 후 문화교류가 대폭 확대되어 연극·연주회·전시회의 교환개최, 학생·학자·예술인의 교환방문, 문학과 서적의 교류,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교환, 자료의 대출 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출처 DailyNK





▶1939년 나환자 요양을 위한 소록도
갱생원 완공
▶1936년 일본ㆍ독일 방공협정 체결



▶1933년 금강철교 준공



▶1931년 중외일보 해산, 중앙일보 창간
▶1922년 터키공화국 수립
▶1915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출생
▶1914년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출생
▶1911년 화가 남관 출생
▶1908년`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지
창간


▶1894년 근대올림픽 개최 결정(IOC 창설).



▶ 1892년 오늘,
프랑스의 교육자 쿠베르탕(프랑스어: 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올림픽 부활제창/1863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1937년 9월 2일 스위스 제네바 에서 사망.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명문 출신 남작이며, 조상은 로마의 귀족이었다. 처음 군인이 되기 위하여 생시르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독일을 공공연한 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에 반대하여 16세에 중퇴하고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 영국 청소년교육의 중심이 스포츠에 있다는 데 공명(共鳴)하였다. 그 이념을 모국에 이식하고자 1886년 문교상(文敎相)에게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건의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조국 프랑스의 이단자로 일생을 냉대받게 되었다.

1892년부터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였으나, 이에 협력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타국의 정치가 ·학자 ·스포츠맨이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하고, 그후 IOC 회장으로 올림픽의 발전과 운동 추진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IOC 외에도 국제 교육학회를 창설하여 스포츠와 교육의 연관성을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로잔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명예시민으로 살았다.


▶1881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출생
▶1878년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
출생
▶1875년 영국,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 매수



▶1844년 독일 자동차 기술자 벤츠 출생


▶1835년 미국 철강왕 카네기 출생
▶1501년 퇴계 이황 출생
▶1024년 상주에서 지진 발생



https://youtu.be/Uu0Se7O8dYc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