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15일
백낙청, ‘창작과 비평’ 창간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창비)은 ‘문학과 지성’(문지)
와 더불어 1970년대 국내 지성계에 끊임
없이 자양분을 공급해 준 ‘지성의 산실’이
었다. ‘창비’가 실천적 이론에 비중을 두고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했다면 ‘문지’는
이론적 지성으로 현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
을 시도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창비’는 1960~1970년대의 지성인
들에게는 ‘저항의식의 저수지’이자 ‘문학
비평의 호수’였으며 다양한 진보 담론의
발상지였다.
이 ‘창비’를 창간한 주역은 백낙청(1938~)
이다. 백낙청은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9년 브라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0년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돌아와 군에 입대
했다. 1963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가 된 백낙청은 순수문학이든
관변문학이든 기성문단에 도전하겠다며
1966년 1월 15일 132쪽 분량의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다.
창간호(1966년 겨울호)에는 편집인
백낙청의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비롯 장 폴 사르트르와 찰스 라이트
밀즈의 번역글, 김승옥과 이호철의 단편소설
등이 실렸다.
한자 표기를 줄이고 가로쓰기를 도입한
창간호 2,000부는 지식인 독자들에게 깊
은 인상을 심어주어 그런대로 팔려나갔으
나 2호부터는 실적이 좋지 않았다.
창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백낙청
이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의 잡지사를 설립한
1969년이었다.
이문구, 황석영, 신경림, 김남주, 현기영,
강만길, 리영희 등 스타 글쟁이들이 창비와
인연을 맺었다.
1974년 1월 창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
하기 위해 도서출판 ‘창비’를 설립해 단행
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1975년 1월 신경림의 ‘농무’, 조태일의
‘국토’로 시작한 ‘창비 시선’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잇달아 내면서
토속적이고 저항성 강한 시인들의 활동
공간 구실을 했다.
창비는 유신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호철, 송기원, 윤흥길,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등 창비 문인들이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1974.1)에 대거 참여하
고 1974년 11월 결성된 ‘자유실천문인
협의회’(자실) 설립을 주도하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2009년 뉴욕 허드슨강에 여객기 불시착

미국 허드슨강의 비행기 불시착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0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중국 방문(~20일)

중국 개혁-개방의 현장 상하이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가운데)이 주룽지
총리와 함께 연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1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6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종래와 달리 베이징은 경유만 하고 일정의 대부분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심지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상하이를 방문해 김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질 정도로 그의 상하이방문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정치적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고 철저한 ‘시장경제 탐구’ 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하이 도착 다음날인 17일 창장 하이테크 단지내의 일본 NEC반도체 공장을 시찰했으며, 푸동 개발구 정부와 진차오 수출가공단지도 방문했다. 18일에는 자본주의 꽃이라는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방문, ‘자본의 힘’ 을 실감했으며, ‘제국주의’ 로 비난해왔던 미 GM자동차 공장도 방문했다. 이같은 그의 행적은 그동안 중국식 개혁 개방 노선을 사회주의 정통노선에서 이탈했다면서 내심 비판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친후 북한이 중국식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 방송들도 김위원장의 중국 방문 소식을 20여분 간에 걸쳐 상세히 보도하면서 과거의 보도 태도와 달리 김위원장의 참관 소감까지 소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2001년 박세리, LPGA클래식대회에서 우승

프로골퍼 박세리가 2001년 1월 15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올 시즌
LPGA투어 개막대회 LPGA클래식에서
챔피언에 올랐다.
▶2001년 백남억 전(前) 공화당 의장 별세
▶2000년 `발칸 백정` 아르칸 피살
발칸의 백정’ 으로 불린 아르칸이 2000년 1월 15일 암살됐다. 본명이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인 아르칸은 이날 베오그라드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입과 눈, 관자 놀이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현장에선 38구경 리볼버 권총 탄창이 발견됐다.

‘공포의 인종 청소업자’ 로 불리면서
테러전문 무장단체 ‘타이거즈’ 를
이끌었던 아르칸.
아르칸은 자신이 조직한 악명높은 민병대 ‘타이거즈’ 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내전에 개입, 악명을 떨쳤고, 1999년 코소보에서도 인종청소를 자행,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다. 17살 때부터 범죄 경력이 있는 아르칸은 1970년대에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은행강도를 자행, 적어도 두 차례나 투옥된 바 있다.
이후 고향 구 슬로베니아 공화국으로 돌아와 도박과 밤무대 비즈니스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흘러 1990년 민병대 ‘타이거즈’ 를 창설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과도 교분을 쌓게 됐다. 미국과 영국은 아르칸 피살 소식에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없게 됐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1998년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첫 정상회담
▶1997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내 헤브론시에서 이스라엘 철군에 관한 협정 조인
▶1992년 유고슬라비아연방 사실상의 해체 시작
▶1991년 제2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91년 언론인, 국사학자 천관우 사망
▶1990년 한국-알제리 국교 수립
▶1989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열차 충돌 100명 사망
▶1987년 김만철 일가 11명 북한 탈출
▶1981년 민주정의당 창당

‘민주, 정의, 복지’ 를 슬로건으로 내건
민정당의 창당대회와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1981년 1월 15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다.
▶1980년 문공무,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 재개설을 허가(1977년 5월 폐쇄)
▶1976년 박정희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영일에서 석유 발견해 매장량 조사중이라고 언명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장준하, 백기완 구속 발표
▶1973년 미국, 월남전 전면정지 발표
▶1971년 이집트, 아스완 하이 댐 완공
▶1968년 이탈리아 시실리에 강진, 6,000명 사망
▶1966년 나이지리아 육군 쿠데타
▶1964년 키프로스 평화회담
▶1962년 서울시 시민헌장 선포식
▶1962년 광화문 전화국 개국
▶1957년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사망
▶1956년 소련, 제6차 5개년계획 발표
▶1951년 파푸아뉴기니 래밍턴산에서 화산가스와 먼지 분출로 4천여 명 사망
▶1950년 한일무선전화 개통
▶1948년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사망
▶1946년 남조선 국방경비대 창설
우리나라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제1대대가 1946년 1월 15일 현재의 육사(서울시 태능)자리에 설치됐다.

1946년 1월 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원들이
행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부터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해 운영해 왔다. 그러나,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국군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국권마저 상실하는 민족사적 비운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내ㆍ외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의병20년(1895~1915)ㆍ독립군 25년(1915~1940)ㆍ광복군 5년(1940~1945) 등 총 50년에 걸쳐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고국으로 환국한 이들 광복군은 지난 날의 나라없는 민족의 쓰라린 체험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국군준비대’와 학도병 중심의 ‘학도동맹’ 등 12개 자발적 군사조직을 창설, 창군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이들 군사조직 모두 미군정의 법령28호에 의해 해산되기에 이른다. 이유인 즉, ‘미 군정당국에 의해 조직되지 않은 일체의 경찰ㆍ군사조직을 금지한다’는 당시 법령때문이었다.
이에 미 군정당국은 친미성향의 고급간부를 국방경비대에 배치하기 위해 국방경비대 창설 1개월 전인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는 이 군사영어학교를 발전시킨 조선경비사관학교(1946.5.1)에 뿌리를 두고있다. 군사영어학교는 1백10명의 장교를 배출했고 이들 중 78명은 군장성에, 13명은 참모총장에, 7명은 합참의장에까지 올랐다. 미 군정당국은 이들을 기간(基幹)으로 1946년 오늘,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그 후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남)조선경비대로 개칭(1946.6.15)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편입(1948.9.1)됐다가 육군으로 개칭(1948.9.5)됐다. 이후 조선해안경비대를 개편한 해군과 육군항공부대에서 출발한 공군이 국군에 통합됨으로써 3군체제가 갖춰졌다. 결국, 우리나라 국군은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그 정통성을 계승한 셈이다.
▶1945년 북조선중앙은행 창립1943년미 국방부 건물(펜타곤) 완공
▶1929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출생
- 위대한 비폭력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1925년 소련 스탈린 집권, 트로츠키 실각
▶1919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피살
룩셈부르크 [Luxemburg, Rosa, 1871.3.5~1919.1.15]
리프크네히트 [Liebknecht, Karl, 1871.8.13~1919.1.15]
1919년 1월 15일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피살되었다.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한 핵심 인물이었고, 리프크네히트는 카를 마르크스의 측근으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했다. 사회민주당이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고 나섰을 때 룩셈부르크는 즉각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녀는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극좌파 동지들을 규합해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했으며, 혁명을 통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1918년 11월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공화국이 선포되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좌파 진영을 새로이 정비하기 위해 선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노동자를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격을 띤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결국 반혁명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장미의 투사...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1919년 1월 15일. 베를린의 밤은 꽁꽁 얼어붙었다. 러시아 혁명을 유럽에 이식(移植)시키고자 했던 극좌파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매서운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출감한 지 두 달 만에 다시 체포돼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내팽개쳐졌다. 사병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트럭은 란트베르 운하의 한가운데에 멈춰 섰고 그의 몸뚱이는 물 속으로 내던져진다.
그리고 장미가 만발한 5월 어느 날. 여자의 시신이 운하 위로 떠올랐다. 심하게 부패돼 얼굴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모습은 ‘장미’라는 그의 이름 때문에 더욱 참혹했다.
‘피의 로자.’ 그는 강철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혁명의 날카로운 검(劍)이요, 살아있는 불꽃이었다.”(클라라 제트킨)
150㎝의 작은 키에 볼품없는 외모. 다리까지 절었던 폴란드계 유대인. 그는 고교시절부터 프롤레타리아운동에 투신했다.
로자는 마르크스를 극복한 마르크시스트였다. 그의 이론적 성취는 마르크스의 전성기에 비견된다. 로자의 ‘자본축적론’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뛰어넘어 세계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본 명저다.
그는 혁명의 열정이 차갑게 빠져나갈 때면 논쟁의 불을 지폈다. 로자는 독일사민당의 거두(巨頭) 베른슈타인과 저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을 벌였고 레닌의 ‘위로부터 준비된 혁명’에 맞섰다.
‘자유로운 영혼’ 로자. 그는 자신의 실존을 껴안은 혁명가였다. 매 순간 삶의 경이 속에 머물고자 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 같다”는 수감생활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감방을 찾는 굴뚝새와 개똥지빠귀의 안부를 걱정했다. 새들에게 줄 해바라기 씨앗을 부탁했다. 생활은 곤궁했으나 귀한 손님에게는 캐비아와 샴페인을 대접하는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로자뿐 아니라 혁명가로서의 로자를 신뢰하게 되는 것은 이 같은 모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최전선에서 인간으로 남아있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1918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출생
▶1915년 윤상태, 서상일 등 30여 명 달성에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0년 영국 총선거에서 자유당 압승
▶1909년 나철, 대종교 창시(음력)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왼쪽에서 두 번째)은
`을사오적` 암살단 행동대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의사(義士) 이절, 나철, 홍필주, 오기호
(왼쪽부터).
▶1908년 미국의 핵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출생
▶1906년 선박왕 오나시스 출생
▶1896년 영국, 프랑스 샴보호조약 선언
▶1842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출생
▶1759년 대영박물관 개관
1759년 1월 15일 세계최초의 공공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이 개관했다. 18세기 영국의 학자인 한스 슬로언 경이 국가에 6만여 점에 이르는 수집품을 기부하고 사망하자, 의회가 박물관을 세워 사람들에게 개방하게 됐다.

대영박물관의 전경.
처음, 박물관은 런던 외곽인 몽태규 하우스에 있었지만 1850년에 이사해 지금까지 런던 블룸스버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후 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겼고, 민족학 부문 소장품은 1970년에 웨스터민스터 벌링턴가든스의 인류박물관에 따로 전시했다.
대영박물관은 44개의 이오니아식 원기둥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94개의 전시실에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시아 등지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타우네레, 엘긴 대리석 조각,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 등이 있다. 2000년 11월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 백자 등 250여 점의 수집품을 전시한 한국관이 신설되었다.
▶1622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 출생
▶1597년 정유재란

▶1433년 조선, 일식 발생
▶69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암살
▶69년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 즉위
황제의 근위대를 사주해 갈바 황제를 살해한 오토가 69년 1월 15일 제7대 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원로원 의원도 오토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대세에 따라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시대부터 명문 귀족가였던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문하생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비롯해 많은 요직을 거친 인물이었다.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시절부터 다섯살 아래인 네로와 함께 어울렸으나 성인이 되어 네로에게 자신의 부인 포파이아를 빼앗기고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쫒겨나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지(任地)에 도착한 오토가 실의에 빠지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현지 주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갈리아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거기에 홍응해 일어나자 어느 속주 총독보다 먼저 갈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황제가 된 갈바에 의해 로마로 돌아온 오토는 게르마니아군이 자신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어수선한 틈을 타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https://youtu.be/N1p_lA9xsk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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