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
해군 초계함 천안함, 서해상에서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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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0분쯤 서해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경비 활동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령부 소속 초계함 천안함(1200t급)이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합동참모본부 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에 따르면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해군 역사상 초계함급 이상 대형 전투함이 폭발로 침몰한 것은 처음이다.
침몰 직후부터 다음 날인 27일 새벽까지 구조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승조원 104명 중 58명만 구조되고 46명은 실종자로 확인됐다. 이후 함수와 함미가 분리되어 각각 해저에 가라앉은 천안함의 실종자 구조, 수색작업은 해군 해난구조대(SSU)잠수사와 해국특수전여단 수중폭발팀(UDT)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작업 10여일 만인 4월 3일 추가 생존자 없이 실종자 가족의 요청에 의해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UDT 소속의 한준호 준위가 3월 30일 함수 부분 탐색 도중 실신해 순직했으며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저인망 어선 금양 98호가 4월 2일 옹진군 대청도 인근해서 침몰했다.
이후 4월 4일 선체 인양 작업을 시작한 군은 4월 15일 함미를 인양하고 36명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24일에는 함수를 인양했다.(그외 수색 및 인양 작업에서 4명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했으며 이외 실종 6명의 시신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천안함의 46용사 유가족은 4월 30일 오후 백령도 침몰해역에서 합동 해상위령제를 지냈다.
천안함의 폭발 원인은 내부의 원인미상 폭발과 외부의 고의폭발, 두가지가 제기됐지만 침몰 초기부터 5월 20일 민군합동조사단의 공식발표가 나올 때까지 논란이 계속됐다.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천안함은 어뢰에 의한 수중 폭발로 발생한 충격파와 버블효과에 의해 절단, 침몰했고 폭발 위치는 가스터빈실, 무기체계는 북한의 고성능 폭약 250kg 규모의 어뢰인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9월 13일 최종 ‘합동 조사결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천안함은 해군 평택 2함대사령부 소속 PCC(Patrol Combat Corve tte)-772 초계함(哨戒艦)으로 만재 시 배수량이 1200t급이다. 1989년 취역했으며, 해상에서 적 습격에 대비하여 경계하는 군함이다. 1999년에 발생한 1차 연평해전 때 참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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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불효자는 웁니다' 부른 반야월 별세
▶2011년미국 첫 여성 부통령후보 페라로 별세
▶2010년'대한성공회 첫 한국인 주교' 이천환 주교 별세
▶2010년‘김의 전쟁’ 권희로씨 별세
김의 전쟁’ 권희로(權禧老) 부산광역시에서 사망(1928년
11월 20일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출생 ~)는 재일 한국인 2세, 기업가, 범죄자로의 일본 최 장기수였으며 일본인 조직폭력배를 살해한 죄로 체포되어 24년간 복역하였다.
‘한인 차별 철폐’ 외친 金의 전쟁
1968년 2월 일본 시즈오카현, 한 남자가 야쿠자 두목과 부하 1명을 총으로 쐈다. 그 남자는 재일교포 김희로 씨였다. 김 씨는 사람을 죽인 뒤 근방의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은 혐의로 인해 무기수가 됐다.
김씨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멸시와 모욕을 겪으며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남들보다 깊은 반일감정을 품은 그는 ‘여관 인질극’으로 일본사회의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조선인 출신이란 이유로
학교 중퇴, 이혼 겪어…
일본사회 만연한 차별
부당함 알리려 인질극
김 씨를 알게 된 건 TV에 생중계된 88시간의 인질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여관에서 일어난 재일교포의 인질극을 영화처럼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저러나’ 하며 막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김 씨와의 인연은 일본에 가게 된 후 이어졌다. 1983년 나는 처음 일본에 갈 일이 생겼다. 알고 지낸 일본인 스님과의 연으로 재일교포 수감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다시 김 씨 생각이 났다. 그동안 김 씨는 장장 7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당시 김 씨에 대한 양국의 생각은 엇갈렸다. 한국인의 눈엔 야쿠자를 죽인 의인이지만, 일본인이 보는 김 씨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스님들에게 무기수 김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결수에서 무기수가 된 그는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됐고 김 씨를 만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김 씨의 면회를 주선해달라고 부탁받은 스님마다 “그 김희로? 그런 요주의 흉악범은 아무나 만나기 힘들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김 씨를 만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김 씨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날마다 면회를 했던 김 씨의 노모가 3년 전부터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김 씨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진 뒤 홀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김 씨의 노모가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측은지심이 들어 돕고 싶었다.
나는 김 씨의 어머니가 있는 지역이 ‘가케가와’라는 것밖에 몰랐다. 통역을 해줄 사람과 무작정 가케가와로 갔다. 김 씨가 수감된 형무소와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주소는 물론이고 요양원 이름조차 모른 채로 길을 떠났다. 나는 몇 사람의 인연을 통해 겨우 김 씨의 어머니가 있는 요양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살인죄로 잡혀간 무기수를, 심지어 면회도 하기 어려운 김 씨를 구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김 씨보다 그의 어머니를 먼저 만났다. 김 씨의 어머니 박득숙 씨는 팔순이 넘은 할머니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박 씨를 만난 나는 애절한 모정에 이끌리고 말았다. 박 씨는 병세가 깊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통곡했다. 박 씨는 내 장삼자락을 잡고 “아들이 나오는 것을 봐야 눈 감을 수 있다”면서 “스님이 좀 데리고 나와달라”고 빌었다. 명백한 중범인 김 씨를 석방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희로를 꼭 데리고 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헛소리 같은 약속 때문에 김희로에 묶인 셈이 됐다.
김 씨가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폐지를 주워 팔며 생계를 꾸렸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권 씨에서 성을 바꿔 ‘김희로’란 이름으로 불렸다. 김 씨는 재일조선인으로 극빈층의 삶을 살았다. 학창시절 김 씨는 의붓아버지의 구박과 소학교 동급생들의 차별을 겪으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13살 나이에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 김 씨는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 먹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구치소를 드나들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김 씨는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몹시 나빴다. 집을 떠난 것은 어머니가 의붓아버지 사이서 낳은 동생 셋과 가정을 일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조센징’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김 씨였다.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였지만 집을 나간 뒤로 김 씨는 변변한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건달의 삶을 살았다.
김 씨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는 그의 출신을 알고 자신을 속였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김 씨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만연한 일본 사회에 신물이 났다. 일본인에 대한 부당함과 삐뚤어진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런 그는 1968년 자신을 쫓던 야쿠자 둘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리고 도주하다 맞닥뜨린 여관에 들어가 일본을 상대로 1인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한인 차별에 항거한 재일교포 김 씨의 인질극 사건의 배경이다.
김 씨가 인질극을 벌인 모도가와네 온천 후미여관. 일본 경찰은 헬기를 띄우고 여관 건물 주변을 포위했다. 김 씨는 당시 벌떼같이 모여든 취재진을 향해 말했다.
“나는 민족차별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일본이다. 일본은 나를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불렀으며 조국을 욕되게 하고 멸시하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들이 공식 석상에 나와 나에게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질들을 절대 풀어주지 않겠다. 여관 안으로 나를 잡으러 온다면 내 몸에 두른 이 폭탄으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
협박이자 절규였다. 나중에 특별면회를 통해 김 씨를 만나 직접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김 씨는 애초부터 자결할 마음으로 인질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김 씨는 인질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코 해치지 않겠다며 안심시켰다. 인질 가운데 한 명이 공무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잠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일도 있었다. 김 씨와 인질로 잡힌 이들 사이에 충분한 대화를 했고 신뢰하게 됐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대치상황이 길어지자 일본 경찰은 김 씨를 설득하기 위해 어머니 박 씨를 데려왔다. 마이크를 손에 쥔 박 씨는 김 씨에게 말했다.
“너는 한국인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목숨을 잃는 모습은 이 어미가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자결하라.”
어머니의 단호한 말을 들은 김 씨는 곧바로 자결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김 씨는 88시간 만에 검거됐다. 기자로 위장한 경찰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한국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인 이 사건은 영화 〈김의 전쟁>으로 제작돼 더욱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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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귀국 당시의 권희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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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독도 개방 이후 첫 유람선 출항
▶2003년천안초교 축구합숙소 화재로 25명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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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초교 화재 참사로 부상당해 순천향병원에
입원중인 한 어린이가 소방관의 사고경위를
묻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26일 오후 11시 17분쯤 충남 천안시 성황동 천안초등학교 축구부 합숙소에서 불이 나 이 곳에서 잠자던 축구부원 25명 중 고원주(10세)·김바울(10세) 등 8명이 숨졌다. 13분 만에 불은 꺼졌으나 축구부원들이 잠을 자고 있어 피해가 컸다. 경찰은 합숙소의 환기 시설이 모자라고 출입문도 비좁아 사망자 대부분이 질식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推定)했다. 불이 난 합숙소는 1993년 10월에 지어진 벽돌조 슬래브 단독 1층 건물이었다. 최초 목격자 문재정(35세·학원 강사)씨는 “학교 가건물에 갑자기 불이 나고 있어 가보니 축구부 코치 허림욱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고 말했다. 이 학교 관리인 정철호(62세)씨는 “잠자고 있던 학생들이 실신한 상태로 소방대원 등에 업혀 병원으로 후송됐다.” 고 전했다. 충남도교육청 강복환 교육감과 학교·체육계 인사들은 대책 회의를 갖고, 천안교육청 3층 회의실에 사고대책본부(본부장 우형식 부교육감)를, 천안초등학교에 합동 분향소를 각각 마련했다. 충남도교육청은 27일을 ‘애도(哀悼)의 날’ 로 선포하고, 본청과 산하 기관 및 도내 모든 학교에 하루 동안 조기(弔旗)를 게양하도록 했다. 천안교육청과 천안초등학교는 사망 학생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조기를 계속 게양하기로 했다. 천안초등학교는 29일까지 3일간 사고 수습을 위해 임시 휴교 했다.
▶2003년국가인권위원회, 이라크전 반대
▶2002년정부, 범부처 공동 전산환경을 구축하기로 결정
▶2002년제11대 조계종 종정에 법전스님 추대
▶2001년한국,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가입
▶2000년러시아 대통령 선거, 블라디미르 푸틴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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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북한 원로 여배우 문예봉씨 별세
▶1997년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등
6대도시 시내버스 파업
▶1997년미국 사교집단 ‘천국의 문’ 신도 39명 집단자살
▶1992년정부, 통신위원회 구성
▶1991년기초지방의회 의원 선거
(시-군-구의회 의원선거)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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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참가
▶1991년개구리소년 실종1990년한국-몽골, 국교수립
▶1983년중국통일학술회의에 중국과 대만학자 참가
▶1983년장정구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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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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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광양만 산업기지개발 구역 지정
▶1982년일본, 우라늄 공장 첫 가동
▶1982년일본군의 2차대전 중 생체실험 폭로
▶1980년차드 내전 격화
▶1980년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 사망
▶1979년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 조인
▶1976년한국-과테말라, 무역협정
▶1975년세균무기(생물무기) 및 독소무기의 개발,
생산 및 비축의 금지와 그 폐기에 관한 협약(BWC) 국제적으로 발효
▶1975년남북적십자 제9차 실무자회의 개최
▶1973년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구속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육사 8기)하였고, 육군 대대장이었을 때 박정희 사단장에 의하여 군수참모로 발탁되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5·16 군사정변 직후 비상조치로 설치한 통치기관)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지냈고, 1963년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 1965년 육군 방첩대장, 1968년 월남 파병 맹호부대장이 되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수도경비사령관을 지냈다. 당시 군부의 TK(대구·경북) 세력 대부로서,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3년 4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형님이 각하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업무상횡령·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 8개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 15년형과 벌금·추징금 약 2,6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를 포함한 장성 3명과 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으며, 이로 인하여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군복을 벗었다. 한국 현대사의 권력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윤필용 사건이라고 불린다.
1975년 석방되었으며,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그 권력을 등에 업고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 후 한·미친선회 이사,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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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티토, 교황청 방문1970년영국 증기선 미국 도착
▶1969년소련, 기상위성 메테오르 1호 발사에 성공
▶1967년한-미 위성중계 직통전화 개설
▶1963년한국-우간다 국교 수립
▶1962년전국 10개 교육대학 개교
▶1962년한국-뉴질랜드 국교 수립
▶1959년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적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 사망
▶1953년미국 조나스 소크 박사,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인 ‘소크 백신’ 개발( 1914년 10월 28일 미국 뉴욕 주 뉴욕에서 출생~ 1995년 6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호이아 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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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 혹은 폴리오(Polio)라 불리는 이 병은 피코르나 바이러스과(Picornaviridae)에 속하는 폴리오 바이러스가 뇌 또는 척수신경에 침입해 신경기능에 이상을 초래하는 질병이다. 뇌성 소아마비일 때는 사지마비와 지능장애, 시력이나 청력의 장애 등이 동반되고, 척수성 소아마비의 경우에는 운동이나 근육 기능 장애, 사지마비 등을 동반한다.
다른 바이러스성 질병이 그렇듯이 20세기 중반까지 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제대로 분리해 내지 못한 까닭에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세 번 이상 대통령을 재임한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belt, 1882~1945)도 39세의 나이에 이 병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는 후유증으로 고생을 해야만 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는 매년 5만 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할 정도로 소아마비가 만연했다. 따라서당시 소아마비 백신 개발은 국가적, 국민적 여망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국립소아마비재단은 연구자금을 지원했고, 소아마비 퇴치 모금운동에는 국민들의 기부금이 답지했다.
다행스럽게도 1953년 3월 26일, 미국의 조나스 소크(Jonas Edward Salk, 1914년 10월 28일 ~ 1995년 6월 23일)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소크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이 날은 세계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날이 됐다.
소크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 1호로 삼아 성공을 확인한 뒤 곧 공개적인 실험접종에 나선다. 그는 미국 44개 주180만 명의 어린이가 참여한 대대적인 임상시험을 거친 뒤, 1955년 4월 12일, ‘소크 백신’이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결과가 발표된 후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당시 소아마비 백신 개발은 사균과 생균 두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소크의 방식은 바이러스를 포르말린으로 사멸시킨 사균방식이었다. 곧 이어 알버트 사빈도 약독화(弱毒化)한 생균 즉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소아마비는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빈이 개발한 백신은 주사에 의한 소크 백신과 달리 먹는 백신이어서 간편하고 면역효과도 컸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까지는 매년 2,000여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나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는 연간 200명 정도로 감소되다가 1984년 이후부터는 한 명의 환자발생도 보고되지 않아 2000년10월에 소아마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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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 출생
▶1923년프랑스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 사망
▶1916년박중빈, 원불교 창
▶1911년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출생
▶1910년안중근 의사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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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지 108주년이 되는 날이다.
독립은 이루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의사의 유예....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거사하였고, 다음해 3월26일 뤼순 사형장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의사나이 31세였으며, 신분은 의병장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이였다.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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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안 의사가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러나 독립은 이루었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를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안 의사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후 유해를 돌려주지 않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임의로 매장해버렸기 때문이다.
민족의 영웅을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한 채 친일의 잔재와 여전히 다투고 있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하에 계신 안 의사는 언제쯤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순국 108주년의 아침에, 삼가 안 의사 영전에 머리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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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다이아몬드 왕’ 세실 존 로즈 사망
▶ 1827년 오늘,
독일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독일어: Ludwig van Beethove)오스트리아 빈 에서 사망( 1770년 12월 17일 독일 본에서 출생~ )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 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가운데에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https://blog.kakaocdn.net/dn/bg8Wy2/btrxlqlpeiY/ilqCXIVxE0r7Kv1KkxVp30/img.jpg)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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