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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3월 28일

✿1995년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 시험발사 성공

국방부가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해온 단거
리 지대공 미사일(K-SAM) ‘천마’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고 1995년 3월 28일 발
표했다. 국산 지대공 미사일 개발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천마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와 민간 방위산업체가 1980년대 말부터
공동개발해 온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로
유효 사정거리는 5㎞다. 우리 군의 약점으로 지적돼 온 저고도 적
항공기에 대한 요격용으로 개발된 천마는,
역시 국내기술로 개발된 30㎜ 대공자주포
비호 (사정거리 3㎞)와 함께 주로 기계화
부대나 공군기지의 대공 방어용으로 실전
배치돼 활용되고 있다. 천마가 개발되기
전까지 수도권 및 공군기지에 주로 배치돼
있던 단거리 지대공미사일은 미국제인
스팅어 , 프랑스제인 미스트랄 , 영국제인
재블린 등이었다.


▶ 2012년 오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가 19세기 말에 제작된 일본지도를 공개하다.

독도 표기 빠진 일본측 자료들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일본 검인정 교과서 등 일본측 자료 4편을 공개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최근일본지도(1929)', `개정 최신 일본 역사지도(1933)', `신일본도첩(1934)', `최근조사 일본 분현 지명 총람(1940)'./이덕기/사회/ 2006.11.23 (경산=연합뉴스) duck@yna.co.kr (이덕기)


▶ 2008년 오늘,
1945년 일본 오키나와 현에서 발생한 주민들의 집단자결에
일본군이 깊이 관여한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일본군 하사가 자결하라며 수류탄 건네”

오키나와 현지에서 만난 생존자 증언

한겨레신문 김도형 특파원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은 전쟁의 광기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으며 맹목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증언해준다. 끔찍한 집단적 동반 살육은 이성을 말살해버린 황민화 교육과 반복적인 세뇌작업의 결과였다. 태평양 전쟁이 좀더 지속되었더라면 오키나와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연되지 않았으리라는 단정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총후보국'과 '결전태세'를 앞장서 외치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친일군상들을 떠올리면서, 이 땅에서 옥쇄가 벌어지지 않은 사실을 천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일본정부와 우익은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도록 반성은커녕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면서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미화하고 있다.이제 일본의 일부가 되어버린 오키나와에서 들려오는 절규조차 외면하고 있는 일본의 외눈박이 역사인식을 비극적으로 전해주는 한겨레신문의 르포기사를 전재한다. -편집자 주-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3월30일 오키나와전의 가장 처참한 사건인 주민들의 집단자결과 관련해 “일본군에 의한 강제 또는 명령은 단정할 수 없다”며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의 강제’라는 기술을 삭제하도록 하는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오키나와 집단자결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오키나와현 자마미섬, 도카시키섬, 게류마섬에 미국이 상륙하자 8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수류탄과 면도칼 등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서로 죽인 사건을 말한다. 오키나와 현지취재를 통해 이 사건의 진실과 일본 정부의 교과서 기술 삭제 의도를 추적했다. 편집자
1945년 3월28일 일본 오키나와현 남단 도카시키섬의 한 참호 안. 전날 섬에 상륙한 미군의 함포사격을 피해 밤새 8㎞ 가량을 걸어 마을 뒷산 동굴의 피난처에 도착한 마을 사람 600~800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참호 밖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채 비구름이 낮게 깔려 이날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 했다.

마을 촌장이 ‘천왕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16살 소년 긴조 시게아키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절망적으로 직감했다. 일부 마을사람들과 방위대원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꺼냈고, 그 가족들과 친척들은 빙둘러 앉았다. 여기저기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수류탄에 의한 죽음은 극히 적었다. 동굴 안에 모인 사람 수에 비해 수류탄 개수가 적은 데다가 조작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불발탄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지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때 마을의 지도자격인 50대 남자가 나뭇가지를 잘라 부인과 자식을 마구 때려 죽이는 장면을 어린 긴조는 목격했다. 그 이후 면도칼, 끈, 곤봉, 돌 등 모든 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이는 흉기로 변했다. 긴조도 “형과 함께 어머니와 동생에게 손을 댔다”며 “어머니의 목숨이 끊어졌을 때는 돌멩이가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그 동굴에서 329명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난달 27일 오키나와현 나하시 ‘나하중앙교회’에서 만난 긴조(78) 목사는 62년 전 오키나와 전투 때의 집단자결에 대한 교과서 기술에서 ‘일본군에 의한’이라는 주어가 삭제된 것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왜 당시 살아남은 부대장의 의견만 듣고, 당시 체험자나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지 화가 난다.”
당시 살고 있던 도카시키섬에서는 미군이 상륙하기 일주일 전에 군의 병기담당 하사관이 수십명의 마을 사무소 남자 직원들과 청년들에게 수류탄 2개씩을 건넸다고 한다. “한발은 적을 만났을 때 던지고, 나머지 한발은 자결하라.” 그는 “천황으로부터 수여받은 중요한 무기를 군대가 비전투원에게 주는 일은 절대 없다”며 “주민에게 나눠준 수류탄은 일본군이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주민들의 정신상태도 사태의 비극성을 더했다. 그는 당시 주민들을 지배했던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말이 집단자결을 읽는 주요 열쇳말이라고 말했다. ‘귀축영미’라는 말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미군에게 체포되면 팔다리가 잘리고, 여자들은 ‘욕을 본다’는 강한 공포감이 있었다고 한다. 황민화 교육으로 주민들 온몸에 새겨진 미군에 대한 적개심이 실제 상황이 되자 공포심으로 변한 것이다.

중국전선에서 돌아온 일본군이 저지른 갖가지 만행이 은연중에 퍼지면서 이런 공포심이 배가됐다. 일본군이란 배경이 없었으면 수 백명이 한꺼번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이 배가 고파 밭에서 고구마를 캐먹다 총살당하고, 오키나와 방언를 사용한 주민들이 스파이 혐의로 처형당하는 등 일본군은 마을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고 정상적인 상태가 되자 가족을 죽였다는 고통과 고뇌가 더욱 깊어졌다. 2년쯤 지나 기독교인 선배로부터 받은 성서를 읽고 목숨, 죽음, 영원한 구원이란 말에 강렬한 끌림을 받았다.
그 뒤 오키나와그리스도교대 교수가 된 긴조 목사는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1972) 직전부터 인간을 황폐화시킨 일제 황민화교육의 실상과 전쟁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대중 앞에 증언자로 나섰지만, 마음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 집단자결 문제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됐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그때의 체험을 이야기해주면서 ‘살아남은 게 두렵다는 것은 체험자 이외에는 모를 것’이라고 하자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문에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가족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썼다. 그게 정상적인 감각이다. 그때 우리의 상황은 살아남는 게 두려운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회상하기 싫은 과거의 잘못을 지워버리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개탄했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진보하는 것은 없다. 아름다운 나라 운운하지만 과거 어두운 역사에 대해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최초로 상륙한 오키나와 자마미섬의 한 참호 안에서 수류탄 자폭으로 누나를 잃은 미야기 쓰네히코(73)는 ‘일본군에 의한’이란 표현을 삭제한 것은 ‘폭거’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당시 마을 군 책임자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해 “명령을 내렸는지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당시 지도자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교사 출신인 그는 19년 전부터 매년 오키나와 전쟁 체험자를 한 명씩 선정해 체험담을 담은 소책자를 발행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누나를 두고 동굴에서 나와 최후를 보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어머니의 회한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고 당시의 체험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본 정부는 교과서 바꿔 쓰기를 통해 ‘과거 일본군의 싸움은 아름다운 전투였다, 집단자결은 미담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4년영국의 저명한 배우 겸 극작가인
피터 유스티노프 사망
▶2003년일본, ‘한반도 정찰위성’ 발사
▶2002년최규선 게이트 첫 폭로
▶2001년김포국제공항, 국제공항 시대 마감

2001년 3월 28일 '국제공항 40년 역사'를
마치는 김포공항 국제선 2청사 앞에 27일
국제선 취항 비행기들이 활주로에 늘어서있다.

국제’ 공항으로서 마지막 날을 맞은 28일 오후 11시 김포공항 2청사 계류장. 비행기를 끌 때 쓰이는 견인 장비인 50t 토잉트랙터를 견인차에 싣기 위해 D운송업체 직원 10여명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형광 주황색 조끼를 입은 이들은 트랙터를 이용, 특수견인차에 토잉트랙터를 싣느라 바삐 움직였다.
국제선 2청사 2층 건물 외곽에 붙어있던 항공사별 안내표지판도 철거됐고 대신 체크인 카운터 위쪽 벽에 ‘김포공항에서 함께 한 32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오후 9시 50분, 국제선 1청사에서는 28일 김포공항에서 떠나는 마지막 항공편인 우즈베크 항공 HY514편이 이륙했다. 한국공항공단 김건호 이사장은 이륙 직전 기장 카디로브마흐티에르(47)씨에게 기념 꽃다발을 건네기도 했다.
마지막 항공편이 어두운 하늘을 날아오르자 김포공항 여객청사에도 불이 꺼졌다.

▶1999년루이스 곤살레스,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
▶1997년정보근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 횡령혐의로 구속


▶ 1995년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 시험발사 성공




▶1994년한-중 정삼회담
(북한 핵문제, 경제협력 집중논의)


▶1993년변정일 WBC 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3년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구포역입구서
지반붕괴로 전복(68명 사망, 123명 중경상)


이 사고로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부상을 당하여,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보다 더 많은 사망자수가 나와서 대한민국 최악의 철도사고로 기록되었다.



▶1991년소련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관 화재발생
▶1990년 희망사항 / 변진섭
(1990.3.4.~4.7. 가요톱10 5주연속1위)
https://youtu.be/DZtjmLVuoEs
▶1990년차세대전투기사업의 기종을 제너럴다이내믹스사의 F16으로 확정


▶1985년프랑스 화가 샤갈 사망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




▶1983년농업보험 1987년부터 실시 계획
▶1983년소련, 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 사령부 신설
▶1982년멕시코 치아파스의
엘치콘 화산 폭발로 약2천여명 사망
▶1980년미국-터키 군사협력협정 조인
▶1980년박동진 외무부장관, 스리랑카서 주최한
리셉션에 PLO대표 초청하고자 접촉
▶1979년영국 캘러헌 노동당정부 붕괴


▶1979년미국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
방사능누출사고 발생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 직원들이
귀가전 방사능오염 측정을 받고 있다.




▶1975년 고래사냥 / 송창식
https://youtu.be/j8hRaEuuuBY


▶1974년한국-오만, 국교수립
▶1972년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 방북(-31일)
▶1969년김수환 대주교, 한국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
▶1969년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사망
▶1968년한국경제인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
▶1965년칠레에 지진, 약 5백여명 사망
▶1963년공군수송기 C46 추락 11명 사망
▶1962년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1962년시리아, 군부쿠데타로 쿠드시 대통령 취임
▶1953년미국의 운동선수 소프 사망
▶1953년북한, 부상포로 교환에 합의
▶1950년남로당 총책 김삼룡 검거
▶1941년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 사망



▶1939년‘2차대전의 리허설’ 스페인 내전 종결




▶1938년중국 남경에 일본의 괴뢰정부 수립
▶1930년일본 무교회주의를 선도한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 사망
▶1913년독립운동가 규호 이규창 출생
▶1910년앙리 파브르, 최초의 수상기 개발. 비행 성공
▶1894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피살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 1871년 파리코뮌 수립

사상 첫 민중정부 ‘파리코뮌’ 수립, 두 달 단명했지만 20세기 긴 파장

1871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역사상 첫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자치정부 ’파리 코뮌’(1871.3.18-5.28)이 수립됐다. 파리 코뮌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도 등장했으나 통상 보불(프러시아-프랑스)전쟁(1870.7.19-1871.5.10) 와중에 등장한, 사회주의 색채를 띤 이 두달여간의 민중정부를 가리킨다. 비록 단명했지만 파리 코뮌은 그 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독일제국 통일을 주도한 프러시아 재상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 국왕 빌헬름1세의 전보를 조작(엠스 전보사건)해 촉발된 보불전쟁은 1870년 7월19일 나폴레옹3세(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선전포고로 시작됐으나, 사태전개를 예측하고 대비해온 프러시아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됐다. 프랑스군은 연전연패했고 나폴레옹 3세마저 9월2일 세당전투에서 져 10만명의 장병과 함께 투항, 포로신세가 됐다. 격분한 파리시민은 9월4일 제2제정 종언과 나폴레옹3세 폐위를 선언했고, 제3공화정(1940년 나치 독일의 파리점령 때까지 지속)이 수립됐다. 전쟁은 계속됐으나 9월18일부터 파리는 포위당했다. 심각한 식량부족 상태속에 가진자와 못가진자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대중의 불만은 고조됐으며 노동자들은 과격해져갔다. 1871년 1월28일 4개월간의 포위 속에 프랑스 정부는 결국 프러시아에 항복했다.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소집돼 루이 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강화조약이 추진됐다.

우파와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강화를 주장했으나 노동자와 국민방위군은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결사항전 태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포위 6개월이 지난 3월18일 티에르는 정부군에게 수만명의 파리시민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의 대포를 거두어들이도록 명령했으나 사기가 떨어져 있던 정부군은 오히려 국민방위군과 손을 잡았고 티에르는 베르사이유로 도망갔다. 3월26일 선거를 거쳐 28일 정식으로 파리 코뮌이 선포됐다. 92명의 코뮌 멤버들은 숙련노동자들과 일부 전문직업인들(의사, 언론인 등), 그리고 개량주의적 공화파에서 사회주의자, 자코뱅주의자에 이르는 다수의 정치활동가들로 구성됐다.

파리 코뮌은 단명했으나 그것이 끼친 역사적 파장은 컸다. 여성참정권을 실현했고 아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으며, 정교분리, 징병제와 상비군제 폐지, 종교재산의 국유화, 이자 폐기, 노동자 최저생활보장, 관리봉급 상한, 공장주가 버린 공장의 노동조합 관리 등의 정책과 법령들을 공포했다.
독일군과 손잡은 정부군의 공세속에 5월28일 최종 진압당할 때까지 7일간의 시가전 ‘피의 1주일’ 등을 거치면서 3만여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망명한 활동가들에게까지 뻗친 탄압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했다.




https://youtu.be/SKTUNBQtpQo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