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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0월 27일

✿ 2014년 10월 27일
슬프고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가요계의 마왕 신해철이 사망한 날이다.


누구보다 강해보였던, 그래서항상
그 자리를 당당하게 지킬 줄 알았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그는 홀로고통 속에 잠들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믿지 않을마왕 신해철의 빈자리...

2015년 10월 27일은 가수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째
되는 날이다.갑작스러웠다.

신해철이 쓰러졌다는,
그래서 의식을 잃었다는 거짓말 같은소식이 10월 22일 보도됐다.

그리고 5일 만에 신해철은 사망했다. 누구도예상한 적 없는,
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는 사고였다




▶2014년 실력파 음악가 '마왕 신해철'
향년 46세로 사망
▶2010년 인도네시아 천재지변으로
국가비상사태 선포
▶2009년 문학평론가 장백일씨 별세
▶2005년 쌀협상 비준안 국회상위 통과
▶2005년 노충국씨, 군 오진(위궤양)
으로 전역 한달 뒤 암으로 사망
▶2004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지진
발생 후 매몰 92시간 만에
두 살배기 유타군 구조
▶2000년 정현준-이경자씨, 동방금고-
대신금고 불법대출과
로비혐의로 구속



▶1995년 프랑스, 남태평양 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에서 3번째
핵실험 강행

사실 프랑스의 핵실험은 1960년 2월13일 '사하라'에서 핵실험 성공한것이 첫번째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유독 '프랑스 핵실험'및 '핵보유'의 역사를 다루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습니다!
1960년 프랑스가 알제리 남부 사하라사막
'인 에케르' 핵실험장에서 원자폭탄실험에 성공. 이로써 프랑스는 미국, 소련,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이 실험에 사용된 원자폭탄은 TNT 화약 70kt에 이르는 양으로, 미국이 최초 실험한 원자탄의 3배가 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압력과 유엔의 비난을 무시하고 핵무기개발을 추진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핵실험 성공을 보고 받은 후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하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라고 환호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4년 남짓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은 경험은 콧대높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전후 위대한 프랑스 재건을 부르짖은 샤를드골대통령이 찾은 해답은 바로 '독자적인 핵무장'이었다.
"프랑스 방위는 프랑스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 프랑스인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닌 어떤 전쟁 혹은 어떤 전투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군사력에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지간에 그것은 우리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는 드골대통령의 믿음은 곧 프랑스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프랑스는 수상 직속기구인 원자력 위원회를 설치했고, 1947년 연구용 원자로를 건조에 착수하여 1948년 12월에 가동시켰다. 1953년부터는 핵개발5개년계획을 실행하여 58년까지 3기의 원자로가 '마르쿠르'지역에 들어섰다.

1956년 10월29일 수에즈운하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제2차 중동전쟁은 핵무기에 대한 프랑스의 열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운하에 대한 국유화를 선언하자,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이후로 이 운하의 경영권을 주장하던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을 부추겨 이집트를 공격하고 수에즈운하를 장악한다.
11월에 들어와 유엔이 중재에 나서고
소련 당국은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와 영국 대사를 크렘린궁으로 소환,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대사 동무,
파리에 핵폭탄이 떨어지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소! 수에즈운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핵폭격을 가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었다. 거기다 중동지역에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미국도 양국의
군사행동을 비난했다. 두 나라는 고스란히 수에즈운하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조성을 시인하는 기자회견




▶1989년 제9차 개헌안 국민투표 실시,
93.1% 찬성으로 통과.
제6공화국 성립


▶ 1989년 오늘,
도시지역 가구당 평균 저축액 674만원
빚은 평균 155만원 !
2017년기준 한국의 1인 가구 약 562만 가구, 이 중 절반이 평균 6,200만원에 빚을지고,
이 들중 20%이상이 1억원이상 빚을지고있다.
빚이 이정도 이니 저축은 꿈도 꾸지못한다.



▶ 1987년 오늘,
제9차 대한민국헌법개정을 위해 찬반 '직접 투표' 실시.
투표율 78.2%, 찬성률 93.1%로 확정. 박정희의 독재, 철권정치에, 전두환의
무식한 군사정치에 질려서 장기집권 no! 단임제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 no!



▶1983년 산악인 허영호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 성공




▶1981년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전수회관 준공



▶1981년 원효대교(1470m) 준공




▶1981년 소련 잠수함,스웨덴 해군기지
근해에서 좌초
▶1980년 8차 개헌안
(제5공화국 헌법) 공포
▶1980년 '10.27 법난' 발생
▶1979년 최규하 총리,
대통령권한대행 취임
▶1979년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1976년 안동 다목적댐 준공

1976년 10월 낙동강의 본류를 막아서 만든 안동댐. 왼쪽 위로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들로 가득한 시사단이 보인다.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하나인 안동 다목적댐이 1976년 10월 27일 준공됐다. 경북 안동군 와룡면 낙동강 본류에 자리잡은 안동댐은 산업기지개발공사가 1971년 4월 1일에 착공, 5년6개월만에 준공하게 됐다.
총사업비가 4백14억6천5백만원이나 들었고, 이중 내자가 79%를 차지한다. 토석(土石)으로 만든 안동댐은 높이 83m, 길이 6백12m, 하폭 4백20m, 상폭 8m, 체적 4백1만5천 입방제곱미터, 총저수량 12억5천만t으로 소양강 다목적댐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큰 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댐건설 역사상 처음으로 화강토를 사용한 점과, 국내 최초로 양수발전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선 소양댐을 앞지른다.
안동댐 준공으로 낙동강 유역의 한수해가 크게 줄고 풍부한 농업-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됐다. 또 영산강 상류에 있는 장성·담양·광주·나주 등 4개 댐을 주축으로 한 영산강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 사업을 착공한지 3년6개월 만인 10월 14일 하구언을 준공했다. 여기에 든 총사업비는 7백30억원이다.


▶1976년 워싱턴포스트(WP), 박동선의
로비활동(코리아스캔들) 폭로



▶1972년 10월 유신 헌법안 공고

비상 국무회의 ‘유신헌법안’ 통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추천으로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과 법관 임면권을 갖는다,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제한을 철폐한다….

1972년 10월27일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유신헌법안의 주요 내용이다. 요즘 같아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 집중이다. 한 해 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선거가 필요없는 총통이 되려 한다”고 한 경고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유신헌법안은 헌법의 효력까지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한 대통령에게는 ‘영도적 국가 원수’라는 지위가 부여됐다.

유신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박정희는 열흘 전인 10월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선언에 의거해 국회를 해산한 뒤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포고령을 내려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도록 하며 대학은 당분간 휴교토록 했다. 반대 목소리를 사전에 봉쇄하는 정지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그후 전문과 12장 126조 및 11조의 부칙으로 된 유신헌법안이 실체를 드러냈다. 정부는 이 유신헌법의 성격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 확립, 자유와 평화 수호의 재확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 국민 기본권 침해와 대통령 권한의 극대화를 가능케 한 헌법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비상 국무회의는 특별선언에 의해 해산된 국회의 권한을 대행해 헌법안을 의결 공고했고, 11월21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안은 90%가 넘는 찬성을 얻어 공포됐다. 이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15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 27일 박정희가 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9년 디오리 하마니 니제르공화국
대통령 방한
▶1969년 서독 정부, 2개의 독일
(서독-동독) 인정
▶1968년 유엔총회,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남아공 위임통치 종식
▶1966년 중국, 핵미사일 실험 성공
▶1962년 태국, 태풍 하리에트
엄습으로 138명 사망
▶1961년 로마 사회주의 인터내셔날
회의, 한국의 투옥된 민주
사회주의자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결의안 채택
▶1955년 제네바서 미국-영국-프랑스
-소련 외상회담
▶1955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군사협정 조인





▶1950년 정부, 서울로 돌아오다.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에 밀려 1950년 6월 27일 '대전'으로 옮김, 다시 7월16일 '임시수도 대구'로 옮김, 또 다시8월28일 '부산'으로옮김. 그리고 9월28일 UN군에의해 '서울수복'. 10월27일 '수도서울 환도'!

1232년 고려 고종19년 6월에 조정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지방백성들에게는 섬이나 산으로 피난하도록 조치하였다.
몽고는 동년12월에 살래탑을 재차 침입시켜 강화도에서 나와서 항복하도록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살례탑은 그대로 남아하여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뒤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승장 김윤후의 화살을 맞고 죽자 몽고군은 철수하였다.

이로부터 정확히 360년 후, 임진왜란!
1592년 4월13일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엄청난 기세로 쳐들어와 불과 보름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선조와 신하들은 궁궐을 버리고 나와서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했다.
왜군은 5월 말에는 개성을 점령했고 전쟁이 시작된지 두 달만인 6월13일에는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이로부터 정확히 44년 후,병자호란!
1636년 1월30일 청나라의 쫓겨,
인조는 대책없이 강화도로 피난하려하지만 눈이 내리는 등으로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머물게 된다.
결국, 남한산성 아래에 삼전도로 나아가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청황제가 내려다보는 곳에서
조선왕은 상복을 입고,세번 큰절을하고 아홉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절하는
소리가 단위에 앉자있는 청태종의 귀에 들리게하는예)로 항복하고,
북방 오랑캐의 나라에 세자와 아들들을 볼모로 뺏겼다. 전쟁 후 수많은 재물과 50만이 넘는 백성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이 로부터 정확히 260년 후, 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왜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11일부터 약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공관 공사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일국의 왕이 자신의나라에서 타국의 대사관에 몸을 숨긴 사건.

사진은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중앙청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 환도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연단위 왼쪽부터 베르나베 아프리카(Bernabe Africa) 한국 유엔위원회 위원, 존 J 무치오 주한 미국대사,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연설자),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1950년 서울

병자호란, 임진왜란.

'아관(러시아 영사관)파천'.



▶1945년 독립투사 박열,
22년2개월 만에 석방
▶1944년 군수회사법 시행
▶1938년 일본군, 중국 무한 3진 점령
▶1938년 듀폰사, 나일론 첫 상품화
▶1934년 제1회 조선어도서전시회 개최
▶1924년 조선학생총연합회 창립
▶1923년 국문학자 정한모 출생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토' 첫 상영
▶1918년 인천항 갑문식 선거(船渠) 준공
▶1905년 대한적십자사 창설
▶1904년 뉴욕지하철 개통


▶1902년 춘사 나운규 출생
아리랑"을 만든 우리나라 영화의 선구자, 나운규
춘사 나운규 / 영화 원작, 각본, 주연, 감독 / 풍운아1926 / 철인도1930



▶1895년 손문, 최초의 거병 시도
실패 (광주사건)
▶1883년 한국-독일 수호통상조약 조인
▶1871년 영국,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산지 병합
▶1870년 미국의 법학자 링컨 출생
▶1858년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스벨트 출생
▶1844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출생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1811년 가정용 재봉틀 `싱거 미싱`
개발자 아이작 싱어 출생
▶1782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출생
▶1728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출생
▶1553년 에스파냐 신학자
. 세르베투스 화형



▶1469년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출생

1469년 10월 27일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학자로 손꼽히는 에라스무스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고전과 그리스도교의 융합으로 보다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주장했던 그는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했지만 루터의 격렬한 종교개혁에는 반대하여 중용을 지키는 바람에 급진적 루터파와 기성종교의 보수주의 사이에서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로운 세계주의적 정신은 이후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 풍자우화집 ‘우신예찬’과 그리스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신약성서’ 등이 유명하다.


▶113년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 출발


https://youtu.be/NDquHoT0pm8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