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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6일

♧1979년 11월 6일 계엄사,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사진.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경위를 발표하는 전두환 ]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발표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이 사건은 주범인
前중앙본부장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연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는 박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김계원
외에 만찬석을 도와준 여인 2명이 함께 있었고 김재규는 만찬도중 박대통령과
차 경호실장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대통령의
경고와 정국수습책의 거듭된 실패로 해임설이 돌자 불안한 상태에 놓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이 軍후배이며 연하인 車실장만을 편애한다고 생각, 박대통령을 제거하면 자신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 부마사태를 대통령제거의 계기로 역이용, 거사 후 계엄군을 장악하면 사후수습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살해계획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 2009년 국회, 한.인도 CEPA 비준안 처리
▶ 2005년 원로 영화 감독 최훈(崔薰) 씨 타계
▶ 2005년 대한항공 비행 시뮬레이션 대회
▶ 2005년 로버트 김, 10년만에 고국땅으로...
▶ 2000년 사진작가 김근원씨 별세
▶ 1998년 서울 월드컵 경기장 기공식
▶ 1998년 전세계 300만번째 도메인 네임(lizzybee.com) 등록
▶ 1997년 TDX 1000만 회선 돌파
▶ 1995년 조선 중종때 정온의 시신, 파주군서 미라로 발견
▶ 1990년 한국-소련 간 직통전화 개통


▶ 1989년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착공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참석한 가운데 춘천-대구간 중앙고속도로 건설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대구와 춘천을 잇는 전장 2백80km의 중앙고속도로가 1989년 11월 6일 착공됐다. 이날 충북 제원군 봉양면 장평리 현장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
모두 2단계의 공사로 진행되는 중앙고속도로는 지금까지 춘천에서 대구 구간이 지형적 어려움으로 상당부분 우회하거나 거친 산악길을 달리는 바람에 자동차로 무려 6시간 걸리던 것이 그 절반으로 단축되며 대구-김해간에 건설될 80km 고속도로와도 연결돼 춘천-부산까지 거리도 7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중앙고속도로 착공은 낙후된 강원내륙 지방과 충북, 경북일부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고 강원과 영남권의 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게 했다. 또 이로 인해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지역일대 관광자원이 본격 개발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중앙고속도로는 이날 착공을 시작으로 1995년 8월 29일 대구-군위(38.2km), 서제천-원성(37.6km), 춘천-홍천(26.2km)등 1백2km 길이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됐다.



▶ 1984년 아시아-태평양전기통신협의체(APT) 서울총회 및 관리이사회 개최
▶ 1983년 미국, KAL기 블랙박스 수색중단
▶ 1981년 안기부, 학원침투 교포간첩단 검거 발표
▶ 1980년 조치훈, 일본 바둑 명인위 획득
▶ 1979년 계엄사,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1978년 이란, 팔레비왕 군사내각 수립
▶ 1975년 모로코, 평화대행진 선발대 서부사하라 국경내 10km까지 진입
▶ 1972년 태국 학생들 일본상품 불매운동 결의
▶ 1970년 이탈리아-중국 국교 수립
▶ 1968년 닉슨,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
▶ 1968년 월남평화협상 시작
▶ 1966년 이동문학가 마해승 별세
▶ 1962년 동해북부선 개통
▶ 1962년 아랍연합,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
▶ 1961년 유엔, 핵실험 금지안 가결
▶ 1959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한 필리핀 대통령(1943-45) 라우렐 사망
▶ 1959년 능의선 기공식(능곡-의정부)
▶ 1956년 아이젠하워 재선
▶ 1954년 유엔총회서 미국-영국 등 60개국, 원자력 평화이용 공동결의안 제출
▶ 1951년 허정, 국무총리 서리 임명
▶ 1950년 맥아더, 중국 월경(越境) 성명
▶ 1949년 북한, 중국과 국교수립
▶ 1947년 폴라로이드 사진기 개발
▶ 1945년 일본 연합국총사령부(GHQ), 일본재벌에 해체 명령
▶ 1937년 도로규칙 개정(1938.4 실시)
▶ 1937년 이탈리아-일본-독일 방공(防共)협정 가입
▶ 1937년 영국의 배우 포브스 로버트슨 사망



▶ 1922년 안창남 도쿄~오사카 왕복우편비행대회서 우승

          1922년 11월 6일 안창남은 창고 속에 버려두었던 폐기와 다름없는 비행기를 몰고 나와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토쿄-오사카 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 안창남의 고국방문비행을 보러 온 사람은 당시 경성 인구는 30만, 이날 경성 사람 6분의 1인 5만여 명이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로 몰려들었다.  지방에서 몰려드는 사람을 위해 남대문역에서는 하루 4회의 임시 특별 열차를 할인으로 운행했다.

    그러나 불행히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어 공중은 고사하고 평지에서도 넓은 벌판에서 몰아오는 찬바람이 얼굴을 때려 이로 정신을 차릴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안창남 군을 만류하야 바람이 적이 지기를 기다렸으나 바람은 용히 그치지 아니하고 수만 군중을 찬바람을 쏘이며 기다리었다.  날씨가 영하에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발동기가 작동을 하지 않을 정도였고, 게다가 비행기 자체도 성능면에서 매우 허술하여 주최 측은 비행을 만류했지만, 안창남은 군중을 보라면서 비행에 나섰다.

    오전 10시에 서울 방문, 다음 경성, 인천 왕복 비행 끝으로 고등비행술의 묘기 발휘하는 순서로 진행되기로 하였다.
    이날 안창남이 그의 비행기 금강호로 비행한 시간은 첫 번째는 13분, 두 번째는 고난도의 곡예 비행을 하며 5분간 계속되어 열광적인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뒤집어진 비행기에서 나온 안창남을 사진기자가 촬영을 하자 그는 의연하게 자세를 취했다.
    뒤집어져 배를 하늘로 내어놓은 비행기와 달리 그는 마치 비행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매는 더욱 빛나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띠고 있다.
  
    1923년 6월 22일은 일본의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가 비명횡사한 지 23주기가 되는 날로 호시의 '위업'을 알리고자 전단 십만장을 인쇄 제작하여 도쿄상공에서 뿌리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동경 스사키 해변에 있던 민간항공회사인 오코리 비행학교에 이작업을 의뢰하게 되고,  오쿠리 비행학교의 '신진비행사' 안창남이 이 일을 맡았다.

    안창남은 전단을 실은 비행기를 몰고 이케카미 상공을 날았다.
    그러나 갑자기 기체에 고장이 나서 누가니하치만(根方八幡)의 진흙밭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바퀴와 프로펠러 등 기체는 온통 진흙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무사했다.



▶ 1917년 오늘,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발생.

'10월 혁명' 혹은 '볼세비키 혁명'은
1917년 2월혁명에 이은 러시아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위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였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노동자와 사병들이 근위병들의 탄압에도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레닌 자신도 혁명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10월혁명은 러시아 사회 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세력의 볼셰비키에게서 시작되었다.
일련의 러시아혁명 속에서 로마노프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2월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혁명에서는 2월혁명으로 출범한 입헌민주당 카세트주도의 임시정부가 쓰러지고, 임시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 노동자, 농민, 군인 위원회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것에 의하여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 결국 1922년에
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한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현재 태양력에 13일이 늦었다 따라서 양력으로 계산하면 11월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유명사로 고착되어 계속 '10월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1907년 미국, 파나마 독립승인

890년대 후반에 들어 '콜롬비아',의 상업은 침체를 겪었다. 보수당의 권력독점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면서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1899년 10월 반란을 일으켰다.  '천일전쟁'으로 명명된 이 콜롬비아분쟁은 3년을 끌었다. 승리는 결국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했지만 천문학적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천일전쟁'을 치르느라 기업과 자원을 소진한 콜롬비아정부는 '파나마상실'이라는 중대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맞았다.
'파나마'는 스페인 정복이래, 페루와 '누에바그라나다' 부 왕령에 속했고,
독립 후에는 '콜롬비아영토'가 되었다.
지리적위치상 밀림에 막혀서 콜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육로로 접근할 수 없어,
바다를 건너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콜롬비아 연방에서는 늘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또한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을 수 있는' 잠재력 덕분(?)에 세계열강에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이 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파나마에 대한 권리를 갈수록 강하게 요구했다.1848년에 '마야리노- 비들렛'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에 '중립'과 '통행자유'를 보장받는 듯했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키워 '파나마 철도건설'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대거 파나마를 통과하게 되면서 주민과 갈등이 불거져 폭동이 일어났고, 1856년 미국인 15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배상금 '40만달러', '기차의 기점과 종점의 자치행정구역 신설', '철도 양쪽 10마일에 대한 주권양도', '2개의 섬을
미 해군이 사용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요구는 콜롬비아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국민이 영웅적 저항을 촉구했다. 불가항력이라 보고 체념한 이들도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미국을 정치모델로 따랐다. 그런데 이제 그 미국이 '부당한 최후통첩'을 보내며 제국적 오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보수당출신의 외교장관은 양키들이 파나마를 점령하도록 유인하고 배상금을 받아 내자고 제안하기도했다. 콜롬비아 지도자중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콜롬비아편을 들어 개입 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사라지고, 1879년 콜롬비아정부는 페르디난드 레셉스와 운하건설 계약을 맺었다 그러는 사이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집권한 미국 정부가 운하건설을 결정했다.
미국은 뉴 프렌치사의 권리를 인수하고 1903년 콜롬비아와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콜롬비아 상원은 이 조약이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다.
이후 다양한 이해관계와 음모 끝에
미해군의 삼엄한 경계속에서 '파나마독립'이 선언되었다.
1903년 11월 미국은 신생 파나마 공화국을 승인했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나는 파나마를 얻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고 한다.




▶ 1906년 일본, 남만주철도회사 설립
▶ 1905년 YMCA창설자 조지 윌리엄스 사망



▶ 1893년 거장 '차이코프스키' 자살하다. 러시아의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감독관으로 우랄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185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되었다. 1859년에는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주제한 음악교실에 입학했고,
그것이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학생이 됐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루빈슈타인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러시아 국민악파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국민악파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자, 루빈슈타인과 결별한다. 그러나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 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쪽으로 기울면서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국민악파와 결별하게 된다. 1874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꽃피는 '피아노 협주곡 1번 B 단조'를 작곡하였다.
이후 러시아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다가 1890년에 폰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하게 되고, 차이코프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원치 않는 결혼과 3개월만에 결별로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 후 오페라 '욜란다'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의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는 물을 마셔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1979년 소련 문화부에서 부검한 결과, 그의 몸에서 비소가 나왔다고 발표하면서 '음독'으로 인한 자살로 판명되었다.

출처 블로거 길거리 인문학도



▶ 1884년 영국, 뉴기니아를 보호령화
▶ 1880년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토 무질 출생



▶ 1860년 링컨, 미국16대 대통령에 당선

1860년 11월 6일,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링컨은 1832년 일리노이주 의회의
선거 출마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834년 일리노이 주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까지 올랐다. 이후 1858년 연방상원의원의 선거에 출마해 더글러스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였다. 당시 쟁점은 '노예제도'였는데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며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며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는 이후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지명되며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노예제 반대론자'였던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미국 남부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고
그 결과로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 1861년 오늘,
캐나다 스포츠인 '제임스 레이스미스' 출생. 1939년 11월 28일 사망,
농구를 최초로 고안한 인물로
미식축구헬멧을 발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캔자스대학교에서 교직원이자
시간제 농구코치로 몇 년간 일했으며,
이후 이 대학 운동부에 총책임자로도 재직했다. 농구의 창시 및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사후에 많은 관련단체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고, 1959년에 그의 업적을 기려 농구 명예의전당이 설립됐다.





▶ 1854년 `행진곡의 왕` 미국 작곡가 존 필립 수자 출생
▶ 1836년 프랑스의 왕 샤를10세 사망
▶ 1814년 벨기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 출생
▶ 1506년 연산군 사망
▶ 1107년 윤관 여진정벌


▶ 680년 오늘, 일본 호류지(법륭사) 재건,

'다마무시즈시' 본생도.
"흔들림없는 대비심으로 모든 번뇌 끊으려 하노라"
여덟 마리 호랑이 생명을 구하려고,
자신 몸 보시한 마하살타왕자.
백제,고구려 그림과 유사성 보여
일본 '나라' 호류지에 소장된 유물.

비단벌레 날개 붙여 장식 '눈길'
바라문 옷, 고구려벽화 와 비슷하다.
익산 미륵사지출토 대나무와 닮았다.
고대 한국 불교미술 되집는 시금석!

일본의 대표적인 고대도시 '나라'에는
참으로 많은 사원들이 있다.
588년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들이 지었다는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데라를 비롯하여, 세계 최대 청동불상이 모셔져 있는 도다이지, 사슴이 뛰어다니는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고후쿠지 등등, 그렇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찰을 꼽으라 하면 역시 호류지가 아닐까 싶다.
607년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호류지는 670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680년 이후
금당등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름다운 소나무길을 따라 남대문을지나 중문에 이르면 거대한 금강역사상이 진정 사찰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한다.
국보로 지정된 긴 회랑을 따라 경내에 이르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가람의 목조 건축물인 금당과 오중탑이 동서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금당 내에는, 안타깝게도 1949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일부 밖에는 남아 있지않지만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전해오는 벽화와 623년 쇼토쿠태자의 명복을 빌기위해 한반도계의 도리불사가 만들었다는
'금동석가삼존상'(623년)이 눈에 띈다.
백제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위해 만들었다는 동원가람의 '유메도노 구세관음상과 대보장 전'에 소장된 '백제관음'도 호류지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2m가 넘는 가냘픈 신체에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비주얼을 자랑하는 '백제관음'은 '앙드레말로'가 일본이 침몰해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다고 찬탄할만큼 '최고중에 최고'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백제에서 전래된 '허공장보살상'이라고 전해져 왔지만,
1911년 아미타 화불이 있는 '보관'이
발견되어 지금은 '백제관음'으로 불리우는 것을 보면, 고대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실감케 한다.

고구려 승려 '혜자'의 제자이자,
한반도의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백제계 일본인 쇼토쿠태자'(574~622)가 창건한 호류지에 남겨진 '다마무시즈시'는 백제관음과 구세관음상, 금동석가삼존상 금당벽화 등과 함께 우리의 고대 불교미술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https://youtu.be/J95h3E0eit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