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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5일

♧1984년 11월 15일 사상최초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서 개최


남북한 당국자간의 경제회담이 1984년 11월 15일을 시작으로 1985년까지 5차에 걸쳐 개최됐다.

1984년 10월 10일 우리 정부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인 신병현의 서한을 통해 남북한간에 경제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적 신뢰관계와 유대를 회복하기 위해 경제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한측에 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의 정무원 부총리 김환은 1984년 10월 16일자 서한을 통해 우리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로인해 1984년 11월 15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쌍방 정부당국의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하는 각 7명의 대표단이 마주앉는 첫 경제회담이 열리게 됐다.

우리측의 수석대표 김기환과 북한측의 수석대표 리성록 등이 참석한 남북경제회담에서 쌍방은 다른 어느 분야의 남북접촉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제1차 회담에서는 남북한의 교역품목과 경제협력사업 등에 관해 거의 비슷한 내용의 구체적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해 준 회담이었다.



▶2009년 허영섭 녹십자 회장 별세
▶2009년 바둑 현대화 공로자 이학진 선생 별세
▶2009년 허영섭 녹십자 회장 별세



▶2009년 독도를 외국으로 규정한 일본 대장성 문서 발견

2009년 11월 15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실이 익명의 일본 고위관료를 통해 입수한 자료에 의해 독도를 외국으로 규정한 일본 대장성 법령 자료가 발견됐다. 1946년 8월 15일 일본 대장성(大藏省)이 발표한 고시(告示) 654호에서 독도(竹島로 표기)는 조선, 대만,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과 함께 외국(外國)으로 규정되어 있어 사실상 일본이 대한민국 광복 이듬해에 스스로 '독도(獨島)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인정한 것이다.



[2008년]첫 G20 금융정상회의 개최
2008년 11월 워싱턴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8년 11월 15일 미국 워싱턴에서 첫 G20 금융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번 G20 금융정상회의는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설된 회의로 1999년 창설되었던 G20 재무장관 회의의 규칙이 적용된다. 따라서 2010년 G20 재무장관회의 의장국인 한국은 2008년 의장국 브라질, 2009년 의장국 영국과 함께 G20 금융정상회의의 주도 3국으로 선정되어 5개 분야 47개 중·단기 개혁과제의 내용 및 추진 방법을 2009년 4월 G20 정상회의 이전까지 마련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은 중·단기 과제를 명시한 47개의 구체적 행동 계획 등을 담은 공동성명서를 채택했으며 2009년 4월 2차 회의를 열기로 했다.
G20 회원국들은 공동 성명서에서 ▲투명성 및 책임성 강화 ▲금융감독 및 규제 개선 ▲금융시장의 신뢰성 제고 ▲국제적인 협력 강화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 금융 개혁 5대 원칙에 합의했다. G20 회원국들은 또 향후 대응 조치로 ▲금융 시스템 안정화 노력 ▲내수 진작을 위한 통화정책 사용 ▲적극적인 재정정책 추진 ▲IMF의 단기 유동성 지원 제도 도입 환영 등에 합의했다.
또 G20회원국들은 향후 3개월 동안 은행 및 신용평가사 감독 강화, 경영진 급여 제한, 재정 및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 침체 연착륙을 시도한다는 데 합의했다. 정상들은 또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라운드의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양식(modalities)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앞으로 12개월 동안 새로운 무역·투자 장벽을 설치하는 것을 억제하기로 합의했다.



▶2005년 실미도 요원 유해발굴(경기도 고양시 벽제서울시립묘지)
▶2005년 쌀협상 국회비준 반대 전국 농민대회(여의도 문화마당)
▶2004년 납북 일본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 27년 만에 유골로 귀환, DNA 확인 결과 거짓으로 판명
▶2002년 장쩌민(江澤民) 공식퇴진-후진타오 시대 개막



▶2002년 손기정 옹 폐렴으로 별세

손기정 [孫基禎, 1912.8.29~2002.11.15]

'마라톤 영웅'손기정씨 별세

일제 치하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쳤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1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손 옹은 노환인 폐렴 증세가 악화돼 갑자기 의식을 잃은 채 13일 서울 일원동삼성서울병원에 실려왔지만 끝내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15일 오전 0시40분께 별세했다. 임종을 지켜본 아들 정인(59)씨는 "그동안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닥치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라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중환자실의 위유미 당직 레지던트는 "자정을 넘어가면서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다가 심전도의 변화가 없어 사망을 확인했었다"면서 "편안한 상태에서 가셨다"고 전했다.

지난 몇 년간 노환에 따른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고생해 온 손 옹은 지난 9월부터는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만큼 건강했던 손 옹은 지난 98년 다리에 동맥경화 증세를 보이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생명과도 같은 다리에 이상이 생기면서 2000년부터는 치매 증세가 찾아왔고 신부전증을 비롯한 각종 합병증에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지난해부터는 일체의 외부접촉을 끊고 집에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신이 또렷할 때면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이봉주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등 후배들의 근황을 물어올 정도로 마라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구멍가게와 행상을 하던 부모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손 옹은 한국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산 증인이었다. 암울했던 시절 베를린마라톤에서 우승하며 핍박받던 민족에 커다란 긍지와 용기를 안겨줬고 이는 20세기 한국 스포츠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기미가요가 울리는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단 채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었으며 금메달은 영광보다 큰 상처로 가슴속에 박혔다.

손 옹은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에는 지도자로 나서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키워내며 한국이 마라톤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대부터는 대한육상연맹 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 등을 맡으며 행정가로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이바지해 왔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이 응어리졌던 `태극마크의 한'도 무려 56년이 지난 92년, 공교롭게도 같은날 같은시에 열린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면서 풀렸다. 당시 팔십 노구를 이끌고 직접 바르셀로나를 찾았던 손 옹은 태극마크를 단 황영조가 1위로 결승선을 넘자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주저 앉았었다. 하지만 쌓인 한이 풀려서인지 손 옹은 이후 눈에 띄게 늙어갔고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손 옹은 국민훈장 모란장(70년)을 수상했으며,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1995년 지하철5호선 강동구간(왕십리-상일동) 개통


▶1989년 올림픽대교 개통




▶1989년 목동 아이스링크 개장



▶1988년 소련, 첫 우주왕복선 부란호 발사
▶1988년 동요작곡가 윤극영 사망


▶1984년 사상최초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서 개최

첫 남북경제회담이 열린 1984년 11월 15일 오전 10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광경


▶1983년 북한병 민홍구 일본 망명 요청
▶1983년 터키계 키프러스 독립선포
▶1982년 브라질, 군정 18년 만에 총선거
▶1981년 방글라데시 대통령에 압두스 사타르 당선
▶1980년 기니비사우에 군사쿠데타, 공산정권 축출
▶1980년 숭전대, 수원 서둔동서 철기시대 집단취락지 발견
▶1978년 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사망


▶1976년 프랑스배우, 쟝 가뱅 사망(72세)



▶1975년 제1회 서방선진국 정상회담 파리에서 개최



▶1974년 북한 제1땅굴 발견



▶1973년 통일벼 개발
▶1971년 마이크로 프로세서(MPU) 세계 최초 탄생
▶1971년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 착공



▶1969년 미국, 아폴로12호 발사. 콘라드, 고든, 빈 3우주인 탑승

아폴로 12호 발사모습. 얼마 후에 번개에 직격당하게 된다
이날 케네디 우주 센터 주변의 기후가 불안정하여, 발사를 중지해야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비행기도 이륙하지 않는데, 훨씬 비싼데다가 위험성이 높은 대형 로켓은 날씨에 더 큰 영향을 받게되죠. 하지만 이 때 NASA는 그냥 로켓을 발사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일어난 사고는 챌린저호 폭발사고가 있습니다. 우주왕복선인 챌린저는 추운 날씨로 인해 연료계통에 사용된 고무 패킹이 얼어붙어 갈라지면서 연료가 누출되어 폭발해버렸죠. 당시에 고무 패킹의 문제로 발사연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었지만, NASA는 그대로 발사하여 결국 참사를 일으켰습니다. 아폴로 12호의 발사를 강행한 것은 닉슨 대통령이 참관했기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발사대를 배경으로한 번개치는 모습
여하간 아폴로 12호는 발사 36.5초 후, 상공의 구름에서 발생한 번개에 직격당했습니다. 번개는 로켓을 때리고 배기가스를 따라 지표로 방출되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 전기계통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기계통에 문제가 발생하면 신호제어장치가 자동으로 회로를 차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고장나면서 아폴로 12호의 사령선이 지상의 관제소로 잘못된 데이터만 전송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원래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은 없었고, 우주비행사들도 번개에 맞아서 전기계통이 맛간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대책은 마련되어있었습니다. 우주선과 로켓의 내부구조는 한 사람이 전담하기에는 복잡하기 때문에, 부분별로 전문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느 계통에 문제가 생기면 해당 계통의 전문가가 대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존 애런은 전기계통 담당자였고, 그가 신호제어장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대처법을 지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착륙선 조종사인 앨런 빈이 1년 전에 비슷한 상황에 대한 훈련을 받아서, 지시사항을 즉시 실행할 수 있었죠. 덕분에 시스템 복구에 성공하고, 우주비행사들은 미친듯이 웃으며 그대로 달을 향해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령선 조종사 리처드 고든 주니어(Richard Gordon, Jr.)가 달 궤도에 남아있을 때, 아폴로 12호의 달착륙선(lunar module, LM)은 '폭풍의 대양'(Oceanus Procellarum)에 있는 크레이터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착륙했다. 착륙지점은 경도 23.4°, 위도 3.2°로, 대략 '지식의 바다'(Mare Cognitum)의 중심부로부터 정북 방향이다.




▶1962년 병무청 발족
▶1959년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토마스 윌슨 사망
▶1955년 일본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당한 자유민주당 창당
▶1954년 수복지구 행정권 인수식
▶1952년 영국, 해중 TV시험 성공
▶1950년 북한, 중국군 총반격 개시
▶1947년 연료부족으로 대부분의 열차 운휴
▶1941년 독일군, 모스크바 공격 개시
▶1938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국제의용군 해산
▶1936년 평양방송국(JBBK) 개국
▶1935년 평남의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 신사참배 거부
▶1935년 필리핀 연방공화국 성립
▶1926년 이상협, 일간지 중외일보 창간
▶1920년 국제연맹, 제네바서 제1차 총회
▶1918년 여운형, 상해에서 미국대통령특사와 회견. 한국독립건의서 제출


▶1908년 청 부의(溥儀) 선통제로 즉위



▶1908년 서태후(西太后) 사망



▶1903년 인천 연초회사 설립


▶1900년 대한성공회 강화읍 성당 축성

흔히들 한국의 교회건축은 서양교회건축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고유의 특성을 갖지 못하고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유리된 무국적의 건축이라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초기교회건축 중에는 토착화의 훌륭한 시도가 적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 으뜸을 꼽는다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당이 위치한 강화읍 관청리 언덕은 고려중기 몽고군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 천도하고 내성을 축조한 남쪽 성터의 일부분으로 강화읍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견자산 언덕마루이다.

경사지 주변대지를 배 모양으로 축성하고,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을 남서향 종축으로 배치하여서 흡사 강화읍과 남산을 향해 항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외부공간의 구성이 구릉지 가람(伽藍)과 유사하게 경사 진입로, 석축계단,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 성당에 이르게 되고 성당 뒤 담을 둘린 뒤 사제관이 위치한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이고 보다 낮은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제2대, 3대 주교의 기념비가 있다. 내삼문도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인데 서쪽 칸이 종각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당의 평면 형태는 전통 목조 중층한옥의 축을 바꾸어서 전형적인 삼랑식 바실리카 성당의 내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정면 횡간이 보칸(梁間)으로서 좌우 툇간 한 칸씩을 합쳐 4칸이고, 측면 종간(道里間)은 앞뒤 툇간을 합쳐 10칸이다. 앞 툇간 4칸은 배랑(拜廊, narthex)으로 쓰이고 뒤 툇간 4칸은 제의실로 쓰이며 예배실은 좌우 7개씩의 고주에 의해 신랑(nave)과 측랑(Aisle)의 구별이 뚜렷하다. 신랑의 폭은 측랑 폭의 두배이고, 신랑의 천장높이(대들보 하단까지)는 측랑의 폭과 거의 같다. 사방 고창에 의해 내부는 밝다.

5번째 고주 사이의 신랑과 6번째, 7번째, 8번째 칸의 신랑과 측랑 사이에 3척 높이의 성찬란이 둘러처져 있어 지성소 내진(chancel)과 성가대석 및 회중석을 구분하며, 7번째 대들보 아래에 주제단이 놓여있고, 성찬란 바깥 좌후면에 소제대가 설치되고 그 위에 감실이 위치하고 있다. 신랑 두 번째 칸의 중앙에 상대적으로 큰 화강석의 팔각 세례대가 놓여있으며, 바닥은 목재 장마루로 되어 있고, 5번째 칸의 좌우외벽에 아치형의 측면 출입문이 나있어 전체적인 라틴십자가의 진행축을 암시한다. 건립당시엔 회중석 중간에 남녀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

구조는 순수한 전통목조로서 중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붕가구는 납도리 5량 구조이다. 외벽은 기둥 사이에 적벽돌 한 장 불식 쌓기로 되어 있다. 좌우 측벽의 매 칸마다 나있는 창은 쌍여닫이로 외부 유리와 내부한지의 2중창이며 처마 아래 고주 사이에는 사방 둘러 고창(clearstory)이 있다. 지붕 용마루에는 목재틀에 동판을 씌운 십자가가 올려 져 있으며, 목 부재에는 가칠단청이 칠해져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첫 사제이자 후에 대한 성공회 3대 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신부의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밀한 구상과 설계, 공사를 담당한 대궐목수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걸작이다. 순수한 한식목조건물로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치 및 외부공간구성도 한국의 구릉지 사찰건축 배치기법을 잘 응용하였다. 토착화의 매우 귀중한 사례로서 한옥성당의 모델이 된 건물이다.



▶1895년 단발령 공포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11월 15일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공포했다.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태자와 함께 먼저 머리를 자르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단발하도록 했으나, 일반 백성들은 이를 청천벽력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조선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1894),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그리고 1896년의 아관파천까지 비참지경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단발령 강요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했고, 또 일본을 본따 만든 제도라는 인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반일의식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으로 촉발된 반일 분위기는 전국 각지의 의병운동으로 전개됐고, 을미사변과 함께 의병운동의 결정적 기폭제 구실을 했다.




▶1891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출생

에르빈 롬멜은 1910년 육군에 입대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소위로서 참전하였다. 전후 나치스운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히틀러의 호감을 사 경비대장이 되었다(1938).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1년 북부 아프리카에서 교묘한 작전으로 영국군을 괴롭혀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1942년 원수로 승진했으나, 10월 말 알라메인을 침범, B.L.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영국군에 패하였고, 결국 북아프리카에서 철퇴, 그 뒤는 서부전선의 지휘를 맡았다. 1944년 독일 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작전지휘 중 부상, 병원에서 요양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참여,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자살하였다고 한다.



▶1889년 브라질, 공화국 성립
▶1879년 영국-프랑스간 해저전화선 개통
▶1862년 독일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출생
▶1670년 칼뱅주의 신학과 철학에 기초한 개혁 신학자,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 사망



▶1630년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 사망

1630년 11월 15일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59세의 나이로 길에서 급사했다. 그는 튀빙겐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1591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신학에 싫증을 느끼고, M.메스트린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감동되어 천문학으로 전향했다. 천문학사에서 케플러라는 이름은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3법칙`으로 유명하다. `케플러의 3법칙`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타원운동을 한다든지 움직이는 속도는 면적과 비례한다든지 하는 하늘의 법도를 정확히 밝혀 낸 것이다.




▶1423년 조선,월식 발생


https://youtu.be/A3r-Dx5hWPE



https://youtu.be/KoAsGHQKMp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행디의행복블러그,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달콤쵸콜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