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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뉴스

<오늘의 역사> 11월 18일

✿1998년 11월 18일금강산 관광 1호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동해시 여객터미널. 실향민들의 꿈을 실은 금강호가 북한 금강산 을 향해 출행했다.

금강산 관광 1호선인 현대금강호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 시 43분 동해항을 출발, 4박5일의 일정으로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

현대금강호에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총지휘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관광객 8백89명, 승무원과관 광안내원 4백66명 등 모두 1천3백65명이 승선했다.

한반도 분단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북 한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해항을 떠난 금강호는 19일 새벽 3시쯤 북방어로한계선을 통 과, 출항후 10여시간이 지난 오전 4시쯤 북한 장전항에 도착해
구룡폭포, 만물상, 해금강 등 3개 코스로 나누어 관광한 후 22일 새벽 무사히 동해항에 도착했다.

이번 관광은 남북간 경제협력과 인적교류를 가속화하는 촉매제
가 됐다.

▶2008년 판돈 1조원대 인터넷 도박조직 검거



▶2004년 1300만년전 유인원 화석 일명 인류진화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스페인서 발굴




▶2004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고향에 ‘대통령 도서관’ 개관
▶2002년 한국기자협회 주최 제1회 재외동포기자대회 개막



▶ 1998년 금강산 관광 1호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금강산 관광 1호선인 현대금강호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43분 동해항을 출발, 4박5일의 일정으로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 한반도 분단 이후 한국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북한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해항을 떠난 금강호는 19일 새벽 3시쯤 북방어로한계선을 통과, 출항후 10여시간이 지난 오전 4시쯤 북한 장전항에 도착해 구룡폭포, 만물상, 해금강 등 3개 코스로 나누어 관광한 후 22일 새벽 무사히 동해항에 도착했다. 이번 관광은 남북간 경제협력과 인적교류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금강산관광 1호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김대중대통령 '국민의정부'가 들어서,
정.경 분리의 원칙 아래 '햇볕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 경제협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남한의 현대그룹과 북한과의 경제협조로 정주영현대그룹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에 다녀오면서 '금강산관광'이
공식적으로 처음 허용되었다.




▶1997년 우수 DB 대상 신설
▶1994년 한국-짐바브웨 국교 수립
▶1993년 駐호치민 한국총영사관 개설
▶1992년 유명우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다시 획득
▶1992년 한국-슬로베니아 국교 수립
▶1992년 한국-크로아티아 국교 수립
▶1991년 전 체코대통령 구스타프 후사크 사망



▶1988년 광주특위 청문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를 위한 광주특위 청문회가 1988년 11월 18일부터 열렸다. 광주특위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으로 1988년 7월 13일 구성된 바 있다. 청문회에서는 5.17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일부 정치 군인들에 의한 치밀한 사전계획에 따라 취해졌을 가능성이 드러났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조작여부, 광주사태에서의 미국의 역할, 공수부대의 지휘책임 등이 중점적으로 추궁됐다. 핵심적인 발포문제는 피해자측과 계엄군측 증인들 간에 주장이 엇갈려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진압이 실제로 있었고 이것이 사태악화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드러나기도 했다.



▶1987년 전국우표전시회 개최
▶1987년 일본 소니사, 미국의 CBS레코드사 인수
▶1982년 권투선수 김득구 사망
▶1982년 한국형 해군경비함 첫 진수



▶1978년 남미 가이아나서 사이비 종교단체 ‘인민사원’ 집단자 살, 914명 사망

남미 가이아나의 밀림에 본부를 둔 사이비 종교단체 ‘인민사원(People‘s Temple)’은 원래 사회개혁이라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교주의 개인화와 우상화가 시작됐다. 미 정부에서 조사차 파견된 라이언 하원의원과 NBC방송 기자 등 5명을 살해한 교주 짐 존즈는 신도들과 함께 자살을 결심했다. 주스에 독약을 탄 다음, 신도들에게 마시게 했고, 어린이들과 개들한테는 주사로 독약을 주입했다. 이들의 자살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무장한 경비원들에 의해 강요된 살인이라 볼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스피커에서는 교주의 연설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개혁혁명이라는 내용이었다.

가이아나의 존스타운에서 '짐 존스'목사는
276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914명의 신도들에게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시도록 명령, 소위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조사 결과 914명이 독약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집단 자살사건이었다. 수습한 시신 중에는 한 명의 미국 하원의원과 3명의 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4명은 음독자살이 아닌 '총'에의한 '타살'이었다.
그 외 모든 희생자들은 '인민사원'이라고 알려진 사이비종교신도들이었다.
이들은 1977년 미국에서 남미의 가이아나로 이주해 생활중이었다.
'짐 존스' 인민사원의 교주는 신도들에게 '아버지'로 불리며 인민사원 내에서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에 자신의 첫 교회를 세우고, 1965년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와 LA로 교회를 옮겼다. 이때만 하더라도 신도들은 겨우 10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존스의 교회는 흑인, 마약 중독자, 노숙자 등 빈민층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와 탁아소 등의 구호활동을 시작하면서, 신도들은 2만 여명으로 급증했다. 많은 신도를 거느리게 된 존스는 곧 자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자신 스스로를 '신의 현신'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사이비종교의 교주가 늘 그렇듯이 '대재앙'을 경고했다.
그를 열렬히 신봉했던 신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헌납했다.

인민사원의 예배는 성가대와 무용단의 열광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존스의 이름이 점차 유명해지자
유명한 흑인지도자들도 예배 참여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는 존스의 교회를 자신의 개인소유처럼 지배하고, 신도들에게 금품을 갈취한다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스의 교회를 빠져나온 몇몇의 신도들이 인민사원의 실상을 '폭로' 하기에 이르렀다. 탈퇴한 신도들의 주장에 따르면, 존스는 신도들의 재산을 훔치고 조작된 기적을 행하며 신도들을 폭행하는데 이어 남성신도와 변태적행위까지 서슴치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던 복지관에서는 100여명의
빈민아동들을 인민사원에 위탁했다.

1977년 언론과 정치권에서 위험을 느끼던 존스는 어린아이를 포함한 1,000여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미의 가이아나정글로 이주했다. 이 정착지는 위험을 대비해 3년전 존스가 미리 사둔 땅이었다.
존스는 그곳이 '낙원'이라고 신도들에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존스의 명령에 따라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인권을 침해당했으며 모두 함께 존스타운을 건설해야만 했다.
인민사원에서 일어나는 비인륜적인행위들이 밖으로 점점 새어나가자,

미하원의원 리오 라이언이 조사에 착수했다.
1978년 11월 17일 3명의 기자들과 함께 가이아나에 도착한 라이언의원 일행은
'미국시민들'의 보건과 복지를 조사할 예정이라고 방문목적을 알렸다.
실제로 처음 도착했을 때 라이언의원은 교묘하게 꾸며진 겉모습에 속아 넘어갔다. 아이들은 좋은 복지를 받고 있었으며, 신도들의 생활도 평화로워 보였다.
라이언의원은 몇몇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주위를 둘러보는 인민사원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명의 신도가 실상을 적은 쪽지를 라이언의원에게 전달함으로서, 라이언의원도 정착촌의 실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존스는 떠나는 라이언의원 일행에게 친절하게 작별인사를 건네지만, 곧 미국정부에 실상이 보고 될 것이 두려웠다. 라이언의원 일행뿐만 아니라 '인민사원 정착촌'을 떠나고 싶어하던 30여명의 신도들도 같이 비행기에 타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불안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라이언의원이 비행기에 도착해 조종사에게 악수를 건네는 순간 한 무리의 남자들이 트럭을 타고 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라이언의원과 3명의 기자 그리고 떠나려고 한 30여명의 사람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그 결과 라이언의원과 세명의 기자 그리고
한 명의 신도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나머지 떠나려던 신도들은 정글로 도망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한 인민사원 신도들

존스는 곧바로 신도들을 소집한 다음,
살인에 대한 보복을 피하려면 모두가 자살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신경안정제와 청산가리가 든 음료수를 마시게 했다. 대부분이 스스로 음독자살을 했으나 일부 거부한 사람들은 억지로 음료수를 마시게 했다. 어린아이들은 음료수를 마시자마자 곧바로 사망하였고,모두가 죽고 나자 존스자신과 간호사, 두 명만 남게 되었다. 남은 두 사람은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인민사원의 집단자살극이 막을 내렸다. 당시 죽은 사람들은 최소 2세에서 최고 84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였다.
이 소식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자
한 사람의 명령으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자살 할 수 있는지 놀라워 했다.
그 뒤 사람들은이 사건을 '화이트나이트'(white night 하얀 밤)라 불렀으며,이 말은 부패된 '사이비종교'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




▶1977년 전 외무장관 최덕신 미국에 망명
▶1976년 문양자, 종별사격대회서스탠다드권총부문 세계신기록 수립
▶197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1970년 서독, 폴란드 국교정상화 가조인
▶1967년 영국, 파운드화 평가절하.세계적 통화위기 촉발
▶1961년 문교부, 사립대 정비 일환으로 전국 12개교 폐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증수회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정



▶1958년 국가보안법 신안 국회에 제출-보안법파동의 시작

이승만 정권은 1958년 들어 진보당사건과 KNA여객기납북사건 등이 잇달아 터지자 간첩 색출과 반공체제 강화를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대폭 강화하고 이 개정안에 언론규제조항까지 추가 삽입하는 2차개정안을 다시 제출했다. 간첩개념 확대, 불고지죄 엄벌, 변호사 접견 금지, 2심제 폐지, 언론보도 규제 등을 골자로 한 보안법은 헌법이 정하는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 요소가 많아 논란이 많았다. 자유당은 12월 19일 오후 3시 국회 법사위에서 자당 국회의원만으로 법안을 3분 만에 날치기로 가결시켰고, 12월 24일 한희석 국회 부의장은 전격적으로 경호권을 발동, 무술경위 3백여명을 국회 본회의장에 투입한 후 보안법 개정안과 1959년도 예산안을 전격 통과시켰다.



▶1957년 상용한자 1300자 채택
▶1957년 북한적십자사, 납북인사337명의 명단 통고
▶1957년 캄보디아 영세중립국 선언
▶1955년 소련수뇌 일행, 인도 방문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1952년 작가 프루스트 사망
▶1952년 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사망
▶1952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 작고
▶1951년 여객선 남해호 진도앞바다서 침몰. 70명 사망
▶1943년 일본의 자연주의 소설가 도쿠다 슈세이 사망
▶1936년 독일-이탈리아, 스페인의 프랑코정권 승인
▶1934년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스파리사망 - `교회법전`을 편찬



▶1928년 미키 마우스의 ‘증기선 윌리’ 개봉

증기선 윌리’는 1928년 11월 18일 월트 디즈니와 어브 아이웍스가 제작한 미키 마우스의 두 번째 애니메이션 작품이자 애니메이션 역사상 처음으로 소리가 나는 유성 애니메이션이다. 제작 당시 이전까지 유성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적이 없었기에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한다. 당시 시대가 시대라서 흑백 영화. 그 때 미키의 성우는 월트 디즈니가 직접 맡았는데, 대사는 "하아"하는 소리 밖에 없다.(…) 미키의 첫 대사는 이듬해 1929년작인 카니발 키드(Karnival Kid)에서 등장. 현재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미키 마우스의 '증기선 윌리' 개봉

   20세기 만화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이끌어온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곳은 기차 속이었다. 1928년 아내 릴리와 함께 기차여행 중이었던 월트 디즈니는 문득 창고 속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던 시절, 그가 주는 빵부스러기를 받아먹어 친구처럼 지내던 쥐 ‘몰티마’를 떠올렸다. 몰티마의 모습에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채플린의 이미지를 덧씌우면 어떨까. 디즈니는 쥐의 이름을 ‘몰티마 마우스’로 지었다. 그러나 아내는 몰티마 대신 ‘미키’를 제안했고 그 순간 ‘미키 마우스’는 20세기 최고의 스타 자리를 예약했다.

   그림은 동료 만화가 어브 아이워크가 형상화했다. 눈이 왕방울만하고 손에 장갑을 끼지 않은 미키 마우스는 먼저 단편영화 ‘미친 비행기’와 ‘갤러핀 가우초’에 등장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한 해 전 성공을 거둔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를 떠올린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에게 제 목소리를 찾아 주기로 하고 자신이 직접 미키의 목소리를 맡았다.

   1928년 11월 18일,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 최초의 유성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가 뉴욕 콜로니 극장에서 개봉됐다.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몰아닥친 세계대공황에도 미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파산 직전에 있던 한 회사는 미키를 그려넣은 시계를 2년간 250만개나 팔아 디즈니에게 사례금을 지급했다. 캐릭터가 돈이 된다는 최초의 사례였다.

https://youtu.be/BBgghnQF6E4



▶1903년 미국-파나마, 파나마운하조약체결. 건설-운영-관리-보호에 대한모든 권리를 획득

파나마 운하에는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파나마는 콜롬비아에서 분리된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1901년 미국의 여론조사통계가 조지 갤럽 출생

조지 호레스 갤럽 (1901 ~ 1984)은 미국의 통계학자로 갤럽 여론조사로 유명하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신문학 및 광고학 교수를 역임하다가 1935년 미국 여론 연구소를 세우게 된다. 이후 갤럽은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대선 여론조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여론조사 전문 기관은 잡지사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에서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앨프 린든이 현직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앞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갤럽은 이를 부정하며 루스벨트가 린든을 크게 앞선다고 발표하게 되었다. 실제 개표 결과 루스벨트는 린든을 20%차로 크게 이기게 되어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폐간되며 갤럽은 이후 계속 대선 여론조사를 맡게 되었다.



▶1884년 우정총국, 우정업무 개시

조선 후기인 1884년(고종 21년) 11월 18일, 우리나라도 역참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통신제도로 우체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인 우정총국을 개국했다. 이에앞서 개화기 선각자 홍영식은 일본과 미국 등을 둘러본 후 근대 우정제도 도입이 절실함을 느끼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직제를 공포했다. 우정총국과 인천분국이 먼저 개국하여, 최초의 근대우표 5문, 10문의 2종이 발행됨으로써 한국최초의 근대식 우편업무가 시작되었다.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개업 축하연날 갑신정변이 발발하여 12월 9일 문을 닫았다.




▶1884년 국내 최초 우표 발행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는 개화파 홍영식과 생사를 같이 했다. 홍영식은 1884년 4월 22일에 설치된 우정총국의 첫 우정총감에 올라 첫 우표를 발행하는 공을 세웠지만 갑신정변 실패로 그가 참살되면서 우정총국도 폐지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발행된 것은 우정국 개국일인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아직 우표란 용어가 없었는지 우표에는 한글로 ‘대조선국 우초’, 영문으로 ‘COREAN POST’라고 쓰여있었다. 우표가격은 당시 통용화폐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된 5문·10문이었다.



▶1626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 봉헌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바티칸 시국 남동쪽에 있는 대성당을 말한다. 바티칸 대성당(Basilica Vaticana)이라고도 부른다. 성지 가운데 하나이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거대한 교회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서기 67년에 순교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주교, 즉 교황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대성당의 제대 아래에 묻혀 있는 까닭에 옛날부터 교황이 선종하면 그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다. 대성당의 건설은 1506년 4월 18일에 시작되어 1626년에 완료되었다.






https://youtu.be/mPtxMESKkEM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행디의 행복블러그, 편집 달콤쵸콜렛